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4월 3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25 첫 열매 예수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것으로 표현한다. 왜 첫 열매일까? 오늘은 이 표현의 의미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레 23:9-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한 해 이스라엘에서 거두게 되는 첫 곡물은 보리다. 하나님은 보리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 가져가라고 명령하신다. 제사장은 그것을 받아 안식일 다음 날 하나님 앞에 흔들며 제사를 드린다. 여기서 안식일 다음 날은 언제일까? 유월절은 니산월 14일에 있었고 그 다음 날이 무교절이 시작되는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안식일 이튿날은 니산월 16일에 해당되는 날이다. 이 날이 바로 초실절, 즉 곡식의 첫 열매를 드리는 날이었다. 성전시대에는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오는 안식일 다음 날 새벽에 초실절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초실절을 히브리어로 ‘욤 하비쿠림(יום הבינורים)’이라고 한다. 그런데 비쿠림은 ‘처음 난 자’를 뜻하는 ‘베코르(בכור)’에서 나온 말이다. 민수기서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민 8:16, “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 처음 태어난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는 사람과 짐승에게 뿐만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 얻어지는 모든 곡식과 열매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초실절 제물을 드리는 의미는 ‘모든 첫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인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초실절 제물이 드려지던 니산월 16일 새벽 죽음에서 부활하신다. 바울은 이 예수님의 부활을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표현한다.이것은 죽은 자들 역시 예수님처럼 몸의 부활을 경험하게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을 위한 첫 열매였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 역시 구약 절기 초실절의 완벽한 성취인 것이다.
바울은 모든 성도들에게 있게 될 부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전 15:21-23,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예수님이 다시 강림하실 때 부활하게 된다고 말한다.여러분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몸의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영원을 누리기 위해서 다시 살리심을 받는 것이다.
바울은 이어서 부활 소망 때문에 어떻게 자신의 삶이 바뀌었는지 간증한다. 고전 15:30-31,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부활에 대한 소망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헌신했다.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강과 바다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광야의 위험,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했다고 그는 고백한다.바울은 어떻게 그런 위험을 무릅쓸 수 있었을까? 그것은 부활에 대한 소망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한다. 날마다 죽는 것은 어떤 삶일까? 고후 4:10-12,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날마다 죽는 삶은 예수님 때문에 수고와 핍박을 감당하는 삶이다. 다른 사람 안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기 위해 고통과 수고를 피하지 않는 삶이다. 이것이 자신의 부활을 믿은 바울이 감당했던 삶인 것이다.
부활을 믿었던 바울은 세상 사람들과는 분명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이 생을 살았다.고전 15: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바울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라고 증거했다. 에베소 사람들에게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아데미 우상을 만들어 팔던 사람들로부터 극심한 반대에 부딪힌다. 하지만 그는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에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반면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죽음의 문제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들에겐 영원에 대한 소망이 없다. 그래서 ‘죽기 전에 오늘 먹고 마시자’라는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된다. 한마디로 쾌락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이처럼 자신의 행복과 즐거움을 이 생에서 다 누리기 위해 오늘을 사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고전 15:33-34,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이 절에서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라는 격언이 나온다. 이 말은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희곡 작가 메난드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말이다.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 이후의 삶은 없다. 그들은 남을 위해 살지 않는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하루 하루 최대한의 쾌락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 태도는 결국 선한 행실을 더럽히고 죄를 짓게 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런 세상의 쾌락주의에서 벗어나길 바랬다. 그리고 그들이 부활 신앙으로 깨어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기를 원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 자가 부활 때 받게 될 영광에 대해 말한다.고전 15:40-42,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땅에서는 세상의 기준에 따라 영광이 주어진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세상의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받게 될 영광이 정해진다.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자신을 다 드린 자가 장차 하늘에서 받게 될 영광은 세상의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말한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부활 소망이 없다면 주님의 일에 힘쓰는 것이 의미가 없다. 그래서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은 좀처럼 공동체에 헌신하지 않는다. 공동체를 위해 수고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활 소망이 있는 사람들은 주의 일에 힘쓰는 것보다 더 값진 것이 없음을 안다. 그래서 바울은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 하는 모든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 않은 줄을 그는 확신했기 때문이다.
자 그런데 레위기서를 보면 초실절부터 오순절까지 오십 일을 계수하라는 명령이 나온다. 레 23:15-16,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곡식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일곱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일곱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하여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유대인들은 이 규례를 ‘세피랏 하 오멜(ספירת העומר)’이라고 한다. 한 오멜의 곡식단을 카운트하라는 것이다. 오멜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두었던 만나의 하루치 분량이다. 이 오멜을 50일 동안 세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유대인들은 이 규례에 따라 초실절로부터 일곱 안식일의 수효를 세어간다. 일곱 번의 안식일이면 7 곱하기 7, 즉 49일이다. 그리고 다음 날이 50일째인 오순절이다. 유대인들은 오순절 날 추수한 밀을 성전으로 가져가 새 소제로 여호와께 드렸다. 이 오멜을 세는 7주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식인 밀이 익어가는 시간이다. 이 기간의 날씨가 그 해의 수확을 결정했다. 따라서 오멜을 세는 것은 오순절의 풍성한 수확을 바라는 그들의 기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성전이 파괴된 뒤 유대인들은 더이상 소제를 드릴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오멜 카운팅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즉 오순절 토라를 받기까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날짜를 세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출애굽을 하면서 정확히 50일 후에 토라가 주어질 것에 대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출애굽 이후 자신들에게 주실 토라를 열망하며 날짜를 카운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2세기 유대인 철학자 람밤은 이렇게 말했다. ‘노예의 신분에서 풀려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법(십계명)이 주어졌을 때 비로소 그들은 진정한 자유를 가질 수 있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시작이었던 유월절은 오순절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월절에 시작된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도 그 50일 뒤인 오순절에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순절 성령을 받음으로 비로소 제자들의 삶이 바뀐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여전히 두려움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오순절날 성령을 받고 나서야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맺는 일에 자신의 삶을 헌신하게 된다. 성령을 통하여 진정한 부활 신앙을 가진 자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자들이다. 사망 권세가 넘어간 유월절의 은혜를 이미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봐야 한다. ‘나의 삶에 과연 말씀과 성령을 받았던 오순절의 은혜가 있는가?’ ‘성령을 통하여 내 안에 분명한 부활 신앙이 있는가?’ 만약 이 확신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오순절의 은혜가 임할 때까지 하루 하루를 카운트해야 할 것이다. 분명한 부활 신앙이 임할 때까지 하루 하루를 세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 날짜를 센다는 것은 기다림과 기대를 의미한다. 군인들은 전역할 날짜를 카운트 한다. 신랑과 신부는 결혼식 날짜를 손꼽아 기다린다. 우리도 우리의 삶에 시작된 구원의 완성을 위해 하나님이 은혜와 은사를 부으시도록 기대하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부활은 단지 이천 년 전에 끝난 사건이 아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모든 사람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해 내기 위하여 여전히 유효한 사건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부활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내가 다시 부활한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이 생에서도 영원을 위해 살게 된다. 그런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어차피 죽을 인생, 오늘 먹고 마시자’라는 운명론에 따라 살지 않게 된다.
부활과 함께 최후 승리와 영광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된다. 현재의 고난과 십자가를 기쁨으로 감당할 수도 없고, 자신을 헌신하거나 희생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그저 모범적인 삶을 살다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분이 아니다. 도덕적으로 탁월한 성인 중에 한 명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예수님은 한번 죽음을 경험하는 우리도 그 사망에서 건지실 수 있는 분이다. 부활의 첫 열매기 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감당하는 사람이 된다. 바라기는 사도들이 붙들었던 부활 신앙이 여러분의 신앙이 되길 바란다. 부활을 믿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 생에서도 영원을 위해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