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4월 10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26 온전한 예수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히7:28)
우리는 나 자신의 불완전함을 발견할 때 불안을 느낀다. 불완전한 우리는 이러한 불안을 없애기 위해 완벽을 추구한다. 그러나 완벽을 추구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불완전함을 또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불안해진다. 괴테는 이런 말을 했다. “완전은 하늘의 척도이며, 완전하려는 희망은 인간의 척도이다.” 완전은 하늘의 척도라는 말에 동의한다. 완전은 하늘의 척도이기에 우리는 완전에 대한 하늘의 기준을 알아야 완전하려는 희망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늘의 척도인 완전에 이를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히7: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시대에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던 제사장들도 약점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거룩한 성소에서 제사 직무를 맡은 제사장도 치명적인 원죄의 굴레와 인간의 연약함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단편적인 예를 우리는 대제사장 아론에게서 살펴볼 수 있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아론이 처음으로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은 먼저 자신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는 장면이다. 레 9:7,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제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되 여호와의 명령대로 하라” 모세는 아론에게 여호와의 명령을 전한다. 그것은 제단에 나아가 ‘너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라’는 것이었다. 한글 번역에서는 그 의미를 살리지 못했지만 원문에는 ‘케라브(קרב)’라는 명령형 동사가 씌었다. ‘제단에 가까이 나아가라’는 의미다. 이것은 아론이 그때까지 제단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왜 아론은 성막이 다 완성된 후에도 제단 가까이 가지 못했을까? 라시는 그의 주석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남긴다: Aaron was ashamed and fearful of approaching the altar. Moses said to him: “Why are you ashamed? It was for this that you were chosen.” 아론은 제단에 접근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했다. 모세가 그에게 말했다. “왜 부끄러워합니까? 당신이 선택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아론은 단순히 자신감이 부족하거나 내성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제단 가까이 가지 못한 것은 성격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아론이 대제사장의 역할을 수행게 된 그 첫 날,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자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황금 송아지 사건 때문이었다. 모세는 이 황금 송아지 사건 때 아론에게 다그쳐 물었다. “이 백성이 당신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당신이 그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출 32:21) 그 때 아론은 이렇게 변명했다. “그들이 금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출 32:24) 참 너무도 치졸하고 무책임한 변명이었다. 아론은 대제사장이 되기에 완벽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성경의 가장 비참한 에피소드 중 하나인 황금 송아지 사건에서 자신이 한 역할로 인해 한없이 불편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 자신뿐만 아니라 전체 백성들을 위해 속죄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아론은 그 부르심에 주저했다. 자신은 분명 우상숭배의 큰 죄를 지은 사람이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과 백성 앞에 서서 거룩한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위선자로 느껴져 제단에 접근하는 것조차 부끄러워 했을지 모른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모세는 제단 가까이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아론에게 전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론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속죄의 사명을 맡기신 것이다. 그런데 아론은 죄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회개와 속죄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론의 불완전함은 그가 대제사장의 사명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가장 완벽한 조건이었는지 모른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아론부터 AD 70년 예루살렘 멸망에 이르기까지 모두 83명의 대제사장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이 대제사장 직분이 예수님 이후 한 세대도 못되어 사라져버렸을까? 히브리서 기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히 7: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그 이유는 레위 지파로 세습되는 제사장들로 인해서는 우리 인간이 온전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온전함이 뭘까? ‘온전함’은 헬라어로 ‘텔레이오시스(τελείωσις)’이다. 텔레이오시스는 ‘텔로스(τελος)’에서 온 말이다. 텔로스는 ‘결국, 목적’이란 뜻이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에 이르는 것, 그것이 온전함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세습을 통해 이루어지던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으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구원의 완전성을 말한다.
이 완전한 구원을 위해 세워진 제사장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히 7:20-21,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 말은 시편 110편의 인용이다. 시 110, 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하나님은 이미 다윗의 입을 빌어 레위 계통과 상관없는 영원한 제사장을 세우실 것을 맹세하셨다. 그것은 우리를 완전한 구원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여기서 멜기세덱을 언급한 것은 그가 항상 제사장으로 존재했던 자였기 때문이다. 즉 그가 영원한 제사장 되신 예수님의 모형이 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영원한 제사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분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히 7:28)이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 온전하게 되셨을까? 히브리서를 보자. 히 5:8-9,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성경은 예수님이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다. 인간으로 오신 그가 온전하게 되신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텔로스, 하나님의 목적에 순종하셨기 때문인 것이다.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야 하는 하나님의 목적을 감당했기에 예수님은 온전하게 되신 것이다. 어떤 물건이 그것이 만들어진 목적을 성취하면 그것은 온전한 물건이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 자체가 완벽해서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나를 부르신 목적을 이루어 낼 때 온전한 삶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온전함에 이르게 되는지 그 적용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먼저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온전함에 이르신 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세상에게 빼앗겨서는 안된다. 세상의 시선은 우리의 부족함과 불완전함을 들추어내려 한다. 우리는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해야 한다.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온전한 존재가 아님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온전한 신앙인으로 착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실상을 보지 못했다. 반면 예수님 당시 소경과 문둥병자들은 자신들이 온전치 않았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절박하게 외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온전함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역시 내가 영적으로 소경이요 문둥병자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완벽하게 보이기 위해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온전치 못함을 주님 앞에 드러내 보여야 하는 것이다. 나에 대한 탄식과 회개로 우리는 온전함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온전함을 위해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중재하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히 7:24-25,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여기서 ‘간구하신다’는 말은 ‘우리를 위해 복을 빈다’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엔튕카네인(ἐντυγχάνειν)’인데, ‘간청하다. 중재하다’란 뜻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중재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중재 사역으로 인해 우리는 비록 연약한 죄인이지만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나를 향한 하나님의 텔로스, 하나님의 목적이 회복되는 것이다. 그 목적이 회복되어야 우리는 온전히 쓰임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온전함에 이르기 원하셨다.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바울도 신약의 성도들이 완전한 자로 세워지기 원했다. 골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따라서 온전함에 이르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하는 궁극의 목적인 것이다.
나의 완벽주의가 나와 내 자녀들이 온전함에 이르는 기준이 되어선 안된다. 온전함은 하늘의 척도이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온전함의 기준이 되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계획하신 목적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온전함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 자녀들을 세상 완벽한 자로 키우는 게 그들을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 그것이 그들을 온전함에 이르도록 돕는 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함에 이르도록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으로 세우셨다. 우리는 우리를 온전함으로 이끄실 수 있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삶의 목적이 있다. 그 하나님의 텔로스를 발견하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 온전함에 이르는 길이다. 나와 나의 자녀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배우자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인간적인 연약함을 발견해도 그리 놀랄 필요가 없다. 다만 우리는 그들이 연약함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온전함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연약했던 아론도 대제사장으로 세우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아론처럼 우리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알고 주저할 수 있다. 그러나 미천한 죄인인 우리가 감히 감당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때, 우리는 온전함에 이르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가 과거의 연약함에 멈춰있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그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