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4월 17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27 온전한 사람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탈무드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왕이 시몬과 요한이라는 궁중의 광대들에게 임무를 맡긴다. “시몬, 너는 지금 나가서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와라” 왕은 요한에게도 말한다. “요한, 너도 지금 가서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와라”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시몬과 요한이 돌아왔다. 시몬이 먼저 왕에게 나아가 절을 한 후 상자를 내놓았다. 열어보니 거기엔 큰 글자로 혀라고 쓰여져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이 혀라는 것이다. 요한도 상자를 내어놓았는데, 열어 보니 거기도 똑같이 혀라고 쓰여져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도 혀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이 될 수 있고, 또한 가장 악한 것도 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혀라는 이야기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말에 실수하지 않고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나쁜 혀, 즉, 나쁜 말을 히브리어로 ‘라숀 하라(לשון הרע)’라고 한다. 뭐가 나쁜 말일까? 욕, 거짓말, 험담, 원망, 불평, 비난, 저주 등, 그 예가 많다. 유대인들은 라숀 하라를 우상숭배, 간음, 살인, 이 세가지 죄를 합한 것보다 더 나쁘다고 말한다. 그것은 나쁜 말이 말하는 대상 뿐만 아니라 말하는 사람 자신과 그것을 듣는 사람들 모두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나병환자를 다루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 나오는 ‘나병’은 히브리어로 ‘짜라아트(צרעת)’다. 짜라아트는 곰팡이균으로 인한 악성 피부병이다. 이 짜라아트의 증상을 점검하고 그 사람이 부정한지 정한지를 선언하는 것은 제사장의 일이었다.레 13:5, “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그가 보기에 그 환부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이레 동안을 가두어둘 것이며” 제사장은 나병환자를 1주일간 격리하고 그 후 다시 점검해서 병이 퍼지지 않았다면 1주일을 더 격리시킨다. 총 2주를 격리하는 것이다. 코로나 2주 격리가 여기서 나온 것 같다. 총 2주 격리 후에 환부가 엷어지게 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정하다고 선언한다.
자 그런데 양성 판정이 나면 어떻게 될까? 레 13:45-46,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나병 환자는 스스로 옷을 찢고 입을 가리며 자신이 부정한 자임을 알려야 했다. 그리고 병이 낫기까지 진영 밖에서 혼자 살아야 했다. 공동체와는 완전 격리되는 것이다. 여기서 ‘부정하다’는 말은 ‘불결하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영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부정하다’라는 말 ‘타메(טמא)’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로 더럽혀지고 부패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 랍비들은 이 악성피부병이 생긴 원인은 다름이 아니라 라숀 하라, 즉 나쁜 말에 대한 형벌이라고 말한다.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다가 나병에 걸린 사례가 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흔드는 것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결국 미리암은 짜라아트에 걸려 진영 밖으로 격리 조치된다. 그녀는 영적으로 부정하게 된 것이고, 그 결과 공동체와의 교제에 부적합한 자가 되었기에 격리가 된 것이었다. 그래서 짜라아트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이 부정한 사람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스스로 고백해야 했다. 그리고 공동체와는 철저히 격리되어야 했다. 혼자 있는 그 시간은 참회의 시간이 되었고, 다시 죄에서 돌이켜 정결함을 얻는 시간이 되었다.
가나안을 정탐했던 정탐꾼들이 그 땅을 악평하며 보고한 사건이 있다. 그 일로 온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게 된다. 모세는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백성들을 위해 중보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민 14:27-28,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겠다.’ 이것은 참 무서운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단적인 나쁜 말, 라숀 하라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무엇이었나? 그것은 원망하던 세대가 다 죽기까지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는 것이었다. 원망했던 세대는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구약시대 하나님은 라숀 하라에 대해 왜 이처럼 가혹하게 반응하셨을까? 그것은 말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빛이 있으라” 말씀 하시니 빛이 있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유대 경전인 탈굼은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번역한다. 하나님은 말하는 존재가 된 사람들과 언어를 통해 소통하셨다. 성경에서 이처럼 언어 자체는 거룩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를 입히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라숀 하라는 사소한 범죄가 아니다. 그것은 거룩한 것을 취하여 거룩하지 않은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라숀 하라는 말하는 존재를 만드신 하나님께 대한 모독인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말한다. 약 3:6,8,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 사람이 혀를 다루기 힘든 이유가 뭘까?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죄로 인해 타락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선언한다. 롬 3:9, 13-14,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인류가 죄 아래 있는다는 가장 큰 증거는 바로 언어의 타락으로 나타난다. 혀에서부터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면, 사탄은 세상을 그의 말로써 타락시켰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사탄이 아담과 하와에게 한 말이다.사탄은 하나님에 대해 비방과 거짓말을 하며 하나님과 그들 사이를 이간질했다. 그리하여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도록 했다. 이처럼 라숀 하라, 즉 나쁜 말의 근원은 바로 사탄인 것이다.이 세상의 신인 사탄은 지금도 믿지 아니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험담하고 거짓말을 하며 타락한 본성으로 살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여기서 우리는 말의 본질이 마음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마음에 악한 것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것이 말로써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말에 실수가 없는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가장 먼저 우리의 본성이 거듭나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고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한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마음의 변화를 경험해야만 우리의 언어가 변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에 실수가 없는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이후 말씀과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행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사람들의 혀에 나타났다.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120명의 제자들이 각국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게 되었다.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세상이 성령으로 인하여 서로 소통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은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가득해야 우리는 세상 신이 아닌 말씀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벧전 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우리가 삼킴 당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야고보 사도는 말한다. 약 3: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사탄은 우리의 혀를 통해 서로 갈라지게 하는 말을 하도록 유혹한다. 거짓말을 하거나 부정적인 말을 하게 함으로 관계가 깨어지도록 유혹한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우리는 우리 삶의 수레바퀴가 불살라지고, 우리 삶이 더이상 굴러가지 않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불평과 원망과 부정적인 말이 아니라 믿음의 말이 내 입에서 나오게 해야 한다.
약 3:3-5,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이것은 작은 혀의 영향력에 대한 말씀이다. 말(horse)이 아무리 힘이 쎄고 강해도 말은 그 입에 물려진 재갈에 의해 길들여 진다. 배가 아무리 광풍이 불어도 배는 사공이 작은 키를 조종함으로 움직여진다. 마찬가지로 혀도 작은 것이지만 이것으로 인생을 세울 수도 있고, 허물 수도 있는 것이다.잠 18: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우리는 혀를 잘 써야 한다. 아무리 광풍이 몰아치는 환경이라 해도 여러분의 말이 그 광풍과 상관없이 배를 나아가게 할 수 있는 말이 되길 원한다. 아무리 고집 세고 다루기 힘든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러분의 말과 격려가 그 사람을 길들이고 살릴 수 있는 말이 되길 바란다.
코로나 팬데믹의 광풍과 함께 지금 세상에는 나쁜 말들이 넘쳐나고 있다. 두려운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분노와 혐오의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지난 3월 미국 아틀란타에선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다. 사망자 8명 중 4명이 한국인, 2명이 중국계 미국인이었다. 마음에 가득한 혐오가 행동으로 나타난 사건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민해져 있다. 불안과 두려움이 커지면서 원망과 혐오가 우리의 일상에서 번져가고 있다. 라숀 하라, 즉 나쁜 말에 대한 형벌처럼 악성 피부병이 우리 사회에 드러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혐오와 경쟁이 가득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환대와 칭찬에 굶주려 있다. 사람들은 나를 따뜻하게 받아주고 지지해주는 누군가를 간절히 찾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평가하는 말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인해 오염되어 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여러 평가와 판단의 말들로 지쳐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속마음은 나병처럼 심하게 문드러져 있는 사람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판단하는 나쁜 말로 인해 부정하게 된 것이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부정하게 된 자를 고치셨던 것처럼 죄의 문제에서 정함을 얻은 우리들은 이제 나쁜 말로 오염된 세상을 향해 좋은 말을 선포해야 한다. 좋은 말은 그들을 살리는 것이다.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그리고 학교와 직장에서 사람들을 말로 세워주는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야고보 사도는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온전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면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는 사람이다. 즉 자신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그 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의 악한 본성에 따라 말을 확 내뱉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 내 입에 물린 재갈을 스스로 당길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온전한 사람인 것이다. 바라기는 내 성질 대로가 아니라 성령님의 이끄심을 따라 내 입을 열 수 있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평상시 기도해야 한다. 내 혀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다. 영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도하고 선포하고 축복할 때, 나와 소통하는 그 영혼이 살아 나는 것이다. 이처럼 기도로 내 입의 재갈을 물려 내 혀를 조종할 때, 우리는 말에 실수가 없는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온전한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을 온전하게 세워줄 수 있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