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4월 24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28 거룩한 사람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 1:15-16)
‘거룩’이란 말처럼 부담스러운 말은 없는 것 같다. 그것은 하나님에게나 어울리지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도무지 어울리는 말 같지가 않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부담스런 편지를 쓰고 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이 명령은 레위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레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이번 주 토라포션의 소제목은 ‘케도쉼(קדשים)’이다. ‘거룩’이라는 ‘카도쉬’의 복수형이다. ‘너희는 거룩하라’라는 이 명령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던져진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행복해지길 원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먼저 거룩해지길 원하신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이 명령의 의미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우리는 어떻게 거룩해지는가? 혼자 열심히 성경 읽고 기도하면 거룩해질까? 이번 주 토라포션 ‘케도쉼’에는 ‘사랑하라’는 두 가지 명령이 나온다.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고 다른 하나는 거류민을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너희는 거룩하라’고 명령하시면서 하나님은 왜 ‘사랑하라’는 명령을 이어서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룩이 관계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추구하는 것이 ‘거룩’이라는 것이다.
먼저 ‘사랑하라’는 계명은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온다.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원수를 갚는 것, 동포를 원망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대사다. 그러나 성경은 ‘복수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한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한 사회의 사람들이 일일히 원수를 갚고, 주변 사람들을 원망한다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될까? 거룩이 파괴된다. 무자비로 인해 무질서와 혼돈만 남는다.
하나님은 원수를 갚는 것, 동포를 원망하는 것 대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우리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나님이 주신 존귀함을 부여받았다. 고대사회에서는 오직 왕만이 ‘신의 형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기록한다. 계급, 인종, 피부 색깔, 종교와 상관 없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이웃의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를 당신의 거룩으로 초대하신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원수 갚고 싶은 게 우리의 본능이지만, 그 본능 대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웃 사랑을 선택할 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거룩하다’고 보시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은 선택이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세상은 이런 선택을 한 거룩한 사람들에 의해서 그 거룩함이 유지되는 것이다.
‘사랑하라’는 두번째 계명은 레위기 19장 34절에 나온다. 레 19:34,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기서 거류민은 히브리어로 ‘게르(גר)’다. ‘이방인, 외국인’을 말한다. 너희 가운데 살고있는 이방인, 외국인을 자기 같이 사랑하는 명령이다. 이 명령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보다 더 어려운 명령이다. 왜 그럴까? ‘이웃’은 나와 같은 언어와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거류민’은 나와는 모든 것이 다른 외국인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이방인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쉽게 함부로 대한다. 나와 공유할 만한 것이 없는 낯선 사람들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사랑할 이유를 좀처럼 찾기 힘들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 근거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즉 ‘너희도 애굽에서 거류민 신세였었기 때문에 그 때를 생각하고 지금 너희와 함께 사는 거류민들에게 잘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이방인들을 배려하라는 계명을 주셨다. 레 19:9-10,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구약시대 이 말씀을 잘 따랐던 사람이 있다. 보아스다. 그는 이방인이었던 룻이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많이 주울 수 있도록 배려했다. 보아스는 이 일을 통해 룻과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자손을 통해 다윗과 예수님이 태어나게 된다. 보아스는 이방 거류민의 처지를 자기 일처럼 돌봐주다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에 동참하는 거룩한 사람이 된 것이다.
추수할 때 우리의 본능은 무엇인가? 내 밭의 곡식은 한 톨도 남김없이 다 내 곡간에 쌓아두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본능을 누르고 가난한 사람과 이방인을 위해 이삭을 남겨두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거룩인 것이다. 거룩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거룩은 내가 나중에 성공해서 기부금을 많이 내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기회를 만들어 베푸는 것이 바로 거룩인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말한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와 이방인과의 관계 속에서도 우리를 당신의 거룩에 초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적인 편견을 버리고 낯선 이방인들을 사랑으로 섬길 때, 하나님은 그런 우리을 거룩하게 보시는 것이다.
거룩은 이처럼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 거룩인 것이다. 원래 거룩은 제사장들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하나님은 아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레 10:10-11,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또 나 여호와가 모세를 통하여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 여기서 ‘분별하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레하브딜(להבדיל)’이다. ‘구별하다’라는 뜻이다. 제사장의 사명은 한마디로 구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을 구별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제사장의 소명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이 있기에, 그 정하신 한계 밖으로 사람들이 가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한계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 한계를 두셔야 했다. 한계를 갖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한 인간 조건인 것이다. 그 한계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존재했다. 하나님은 동산 안에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를 두셨다. 하나님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하셨고, 선악과 나무의 열매는 금지하셨다. 에덴 동산 안에는 이처럼 허용된 것이 있었고 또한 금지된 것도 있었다. 그 한계를 통해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 자신과 교제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인간이 그 한계 밖으로 넘어가도록 유혹했다. 아담의 눈에 그 한계 밖의 세상은 자신을 더 지혜롭게 해줄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 한계를 넘어갔고, 그 결과 에덴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처럼 한계가 무너지는 곳에서 혼돈은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가 무너지는 곳에서 거룩이 파괴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이 파괴된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워 갈 사람들을 부르셨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은 제사장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거룩의 사명을 맡기셨다. 그들에게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이 거룩에 대한 사명은 신약 백성인 우리들에게도 이어진다. 베드로 사도는 신약의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이렇게 정의한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역시 이 땅에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세워가는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것이다. 우리가 그 질서를 세울 수 있는 기준은 세상 철학이나, 이념이나, 인본주의가 아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구별하고, 그것을 이 세대에게 가르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사탄은 계속해서 인류를 혼돈과 흑암 가운데 가두려 한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 보이는 선악과를 우리의 입에 넣어주려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 밖으로 나아가도록 유혹한다. 우리가 그 경계를 넘어설 때, 우리는 아담처럼 에덴을 상실하고 무질서와 혼돈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 안에 거룩은 파괴되고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도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보다 인류의 생존과 번영, 그 자체가 더 중요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가 빠른 속도로 무너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낯선 사람들에 대한 배려보다는 나의 안전에 대한 염려로 서로 경계하며 혐오를 표출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 ‘거룩한 자가 되라’고 편지했던 사도 베드로는 또한 ‘사랑하라’는 당부를 전한다. 벧전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거룩은 이처럼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거룩한 사람은 다름 아니라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웃에게 쉽사리 원수 갚지 않으며, 가까운 이웃들에게 쉽게 원망을 쏟지 않으며, 낯선 사람들에게 배려의 손길을 거두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거룩한 사람인 것이다.
지금은 힘 있는 사람이 대우받는 시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힘있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내가 성공하고 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행복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려는 선택을 유보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 그 마음에 이웃에 대한 사랑과 긍휼이 있는 사람이다. 원수 갚는 것, 원망하는 것 대신, 사랑을 선택할 때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그럴 때 진정으로 행복하게 된다. 사랑하기로 결정한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생명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우리에게 주신 관계 속에서 아낌없이 사랑함으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거룩한 사람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