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5월 8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30 한 새 사람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4-15)
예전에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오는 TV 프로그램에 스피드 퀴즈 코너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단어를 설명하고 할머니가 그 단어를 맞추는 상황이었는데, 그 때 제시어가 ‘천생연분’이였다. 할아버지는 이 단어를 보고 자신있게 설명한다. “마누라, 당신과 나 사이가 뭐지?” 그랬더니 할머니가 답한다. “웬수!” 당황한 할아버지가 다급히 설명을 이어간다. “아니, 옛날 말고 지금… 네 글자로 말해봐” 그랬더니 할머니가 답한다. “평생 웬수!” 천생연분이 되야 할 관계가 평생 원수로 사는 관계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어떤 사람의 원수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둘을 하나로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는 표현이 나온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표현하는 말이다. 어떻게 십자가 사건이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 수 있을까? 본문은 더 나아가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이 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말한다. 어떻게 원수처럼 여기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만들어질 수 있을까? 둘이 한 새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은 교회의 가장 높은 부르심이다. 내 안에 모든 막힌 담들이 허물어지고 다른 사람과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은 교회의 부르심이자 사명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 부르심과 사명을 성취할 수 있을까? 교회 창립 14주년을 맞이하면서 그 방법을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골 3:9-10,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자들이다’라고 표현한다. 그들은 옛 사람 때의 모든 죄가 가려진 새 사람이 된 것이다. 바울은 이어서 이 새 사람의 특징에 대해 말한다. 골 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이 새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새 사람에게는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족의 다름과 종교 관습의 다름과 신분의 차이가 이 새 사람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헬라인이냐 유대인이냐가 중요하지 않다. 할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야만인인지 고상한 사람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종인지 자유인인지가 상관없다. 왜 그럴까?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모든 사람은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둘째,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이시고 만유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 안에 계시기 때문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새 사람 안에는 나를 위한 여지가 없다. 내가 부자인지, 많이 배운 사람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내가 한국 사람인지, 중국 사람인지, 홍콩 사람인지, 이스라엘 사람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이처럼 교회의 부르심은 세상의 모든 차별과 분리의 기준을 뛰어넘어 새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유독 사람만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을까? 그것은 관계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펼쳐가기 위해서다. 그러나 사람은 창조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타락한다. 사탄은 유혹을 통해 사람 안에 분열의 씨앗을 심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분열이 일어났다. 선악을 알게 된 사람은 서로 정죄하기 시작했다. ‘너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는 사랑의 고백은 ‘이 여자 때문에’라는 정죄로 바뀌었다. 가인과 아벨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하나님과의 분열은 바벨탑 사건으로 이어졌고, 결국 인류는 온 세상으로 나뉘고 흩어지고 만다. 한 사람으로 시작되었던 인류는 더 이상 하나가 아니었다.
사람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펼쳐가려던 하나님의 뜻은 실패하고 만 것일까?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실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구원 역사를 펼치기 위해 친히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요 1: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 요한은 ‘말씀으로 존재하셨던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기록한다. 이 사람을 성경에서는 ‘둘째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고전 15: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이 둘째 아담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다. 그럼으로 첫째 아담의 실패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사도 바울은 대랍비 힐렐의 손자 가말리엘에게서 배운 랍비였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이런 기록을 남긴다.롬 5:12,14,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쉽게 분열되고 원수 관계를 맺게 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아담과 같은 범죄를 짓지 않았어도 그 아담의 범죄로 인해 사망이 왕 노릇하는 영향력 가운데 살기 때문이다.하나님은 사망이 왕 노릇하는 인류의 운명을 바꾸시길 원했다. 그리하여 바울은 인류의 운명을 새롭게 할 또 한 사람을 소개한다.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둘째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인류는 사망이 아닌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운명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한 사람 아담 때문에 사망 권세가 모든 인간에게 임했지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생명의 권세가 인류에게 회복된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엡 2:14-15,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중간의 막힌 담은 모든 분열의 씨앗이다. 이 분열의 씨앗은 ‘반유대주의’라는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 가운데 뿌려져 있다. 이 분열의 씨앗은 ‘인종차별’이라는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 마음에 뿌려져 있다. 이 분열의 씨앗은 또한 ‘계급, 종교,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뿌려져 있다. 어떻게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 사이에 원수 된 것, 중간에 막힌 담이 허물어질 수 있을까?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 때 가능하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원수 된 것,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한 새 사람의 이상을 믿는 사람들은 그들 마음 속에 있는 막힌 담들을 허물게 된다. 나는 2014년 텔아비브에서 있었던 ‘엘라브’ 집회에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을 보았다. 예수님을 믿는 이스라엘 청년과 아랍 청년들이 서로 부둥켜 안고 울면서 용서를 구하고 사랑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백인과 흑인들이 이 한 새 사람의 이상을 본다면, 그들의 관계에는 더 이상 인종차별이란 막힌 담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뉴욕에 사는 사람들이 이 한 새 사람의 이상을 본 사람들이라면 더이상 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증오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이 한 새 사람의 비전이 이루어지도록 이천 년 전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주셨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언어가 통일되었고, 마음이 하나 되는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의 모임은 교회가 되었고, 교회를 통해 사람들은 더이상 분열된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세워지기 시작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한다. 각각의 몸의 지체는 누가 더 쓸모 있고 쓸모 없는지, 그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 몸은 나누어지거나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펼쳐가기 위한 한 새 사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유대인이었다. 그는 오순절 이후 욥바에서 기도할 때 환상을 보게 된다. 하늘이 열리고 한 그릇이 내려오는데 거기에는 각종 짐승들이 있었다. 그것을 잡아먹으라는 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려왔다. 베드로는 기겁을 하며 말한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이것은 코셔를 지켰던 유대인으로 그의 종교적 신념을 보여준다. 이 환상에서 속된 짐승을 잡아먹는 것은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베드로가 그 음식을 거절한 것은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것을 꺼리는 그의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하늘에서 또 음성이 들렸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이 환상 후에 이방인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를 찾아온다. 이 환상이 없었다면 베드로는 당연히 그의 초청을 거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에 그는 그 초청에 응한다. 그리고 그가 복음을 전했을 때 그 집에 있던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게 된다. 베드로는 놀랐다. 베드로는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차별이 없고 이들이 한 새 사람으로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알다시피 베드로는 이미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을 통해 베드로의 마음속에 그가 유대인으로 자라면서 형성된 깊은 생각의 뿌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나의 생각 역시 옛 사람에 속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나라의 문화와 역사, 신념에 따라 교육받으며 자라왔다. 그래서 우리 안에 형성된 생각은 좀처럼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한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방해가 된다. 우리가 한 새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의 생각까지도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베드로처럼 고집스럽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한 새 사람 안에는 옛 사람으로서의 나에 대한 여지가 없는 것이다. 내 안에 익숙하게 형성된 생각까지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욥바교회는 베드로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처음으로 한 새 사람으로 세워졌던 욥바에서 14년 전에 세워졌다. 여전히 이방인에 대한 담이 높은 이 나라에 이방인에 의해 교회가 세워지고 여기까지 온 게 기적이다. 욥바교회는 한국 사람만을 위한 교회가 아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세워지는 교회다. 한 사람을 위한 교회이고, 새 사람을 위한 교회이다. 우리는 한 새 사람을 세워 세상 사람들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이 땅에서 계속해서 펼쳐지기를 소망한다. 서로 분열하고 원수 되는 세상 속에서 한 새 사람이 되어 화평을 전하는 교회가 되길 기도한다. 한 새 사람의 이상 안에는 나란 사람은 없다. 너란 사람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지으신 한 새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 부르심과 사명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