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5월 15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31 사랑의 도약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7-8, 18)
사랑이 영원한가?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는 건 쉽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쉽다. 그러나 우리는 내 스타일이 아닌 사람을 사랑하는 게 쉽지 않다. 나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을 사랑하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다. 사랑은 또한 변하기 쉽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안 좋은 과거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뒷걸음질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연약함을 계속 보게 된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던 나의 감정은 서서히 식고 만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도약이 필요하다. 이 세상에서 완벽한 사랑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가 도약할 수 있는 사랑이 어디에 있을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다’고 말한다. 우리가 도약해야 할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오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졌는지 살펴보며, 우리의 흔들리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이번주 토라포션은 민수기서가 시작된다. 민수기서는 히브리어로 ‘바미드바르(במדבר)’’이다. ‘광야에서’라는 뜻이다. 우리 중에 광야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광야는 그저 잠시 머물고 싶은 곳이지, 거기에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광야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곳이다. 내가 거기에 혼자 있다면 두려움밖에는 느낄 것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광야는 ‘사랑의 도약’을 위해 필요한 장소로 나온다.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여기서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그 마음을 측정하는 장소로 나온다.풍요로운 환경에서 나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쉽다. 그러나 필요가 충분히 채워지지 않는 환경에서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믿음과 사랑의 도약이 있어야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며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내일이면 샤부옷이 시작된다. 유대인들에게 샤부옷은 아주 특별한 날이다. 시내 광야에서 모세가 토라를 받은 날이다. 유대인들은 이 날 받은 토라를 ‘케투바’라고 여긴다. 케투바는 결혼할 때 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서약서이다. 따라서 오순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결혼하여 하나님의 신부가 된 날이라 할 수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것을 낭만적인 언어로 표현한다. 렘 2:2,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신부는 결혼식을 통해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신랑을 따라 어디든지 갈 것을 서약한다. 광야 한 복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어디든지 하나님을 따를 것이라고 맹세한 것이다. 이에 하나님이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결혼 서약문을 써서 신부에게 준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 시내 광야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짧은 신혼의 낭만은 40년이라는 긴 광야의 생활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셨을까? 광야라는 히브리어 ‘미드바르(מדבר)’는 ‘말하다’라는 ‘메다벨(מדבר)’과 발음만 다르지 같은 단어다. 성경에서 광야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으로 묘사된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바람난 아내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호 2: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여기서 ‘거친 들’이 히브리어로 ‘미드바르(מדבר)’이다. ‘광야’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데려가서 거기서 말로 타이르고 위로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광야 ‘미드바르’는 하나님이 ‘메다벨’하시는 곳, 즉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장소인 것이다. 호 2:15-16,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광야에서 타이르고,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회복이 일어난다. 죽음과 같은 아골 골짜기에서도 소망의 문이 열리게 된다. 광야라는 거친 들에서 ‘주님만이 나의 유일한 남편’이라는 신부의 고백이 회복되는 것이다. 광야는 이처럼 당신의 백성을 순전한 신부로 세우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발동되는 곳이다. 신랑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고백한다. 호 2:19-20,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광야의 시간은 물론 쉽지 않다. 그러나 광야의 시간은 우리가 얼마나 세상 신인 바알에게 마음을 빼앗겼는지 점검이 되는 시간이다. 세상으로 향하던 나의 욕망이 잦아지고 원래의 남편과 맺었던 서약을 다시 기억하게 되는 시간이다. 이 거친 들에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네게 장가 들겠다’는 하나님의 거친 고백을 듣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경험한 제자들 역시 그들의 인생에 광야를 만난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하였지만 그들은 여전히 주님 없이 사는 세상이 막막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남긴 채 하늘로 올라가셨다. 이 말씀대로 오순절이 시작되는 날,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다. 구약의 오순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토라를 받고 하나님의 신부로 세워졌다면, 신약의 오순절,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주님의 신부인 교회로 세워진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제자들은 그들의 인생에서 광야와 가나안이라는 경계선이 사라진다. 그들에겐 더 이상 광야도 없었고 가나안도 없었다. 신랑 되신 주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만 있었다. 그 사랑에 두려움이 없었기에 그들은 주님을 위해 어디든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오순절은 사랑의 도약이 일어났던 절기였다. 사랑의 도약이 있었던 사람들은 광야와 같은 두려운 현실을 넘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가나안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말한다. 요일 4: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보다 먼저 하신 사랑이다. 우리의 자격을 따지지 않고 베푸신 사랑이다.바울 사도는 말한다.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도 우리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우리는 너무도 쉽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다.그것은 내 자신이 하고 있는 사랑에 대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가 완벽하지 않고, 죄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을 거라 쉽게 단정한다. 내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기에 하나님도 나같은 사람을 별로 사랑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이고 본성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을 아셨다. 그러나 그런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인 것이다. 이 사랑 때문에 우리는 자격이 안 돼도 하나님의 사랑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사랑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랑하기 위해 지어졌음을 알게 된다.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DNA가 깨어나는 것이다.
요일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사랑의 도약을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보다 먼저 하신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 관계를 넘어서는 사랑이다.이 사랑이 있어야 우리는 연약한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 이 사랑이 있어야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나 자신도 사랑할 수 있다. 이 사랑이 있어야 우리는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는 지금 두려움이 많아지는 때를 살고 있다.이스라엘이 코로나를 극복하고 일상이 회복되는가 했는데, 메론산 참사가 일어났다. 그 사건에 대한 충격을 미처 수습하기도 전에 이번엔 가자지구에서 로켓이 날라오고 있다. 더 염려되는 것은 아랍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에서 폭동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 땅에 두려운 광야가 다시 펼쳐지고 있다. 사랑의 도약이 필요한 때이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말한다. 신랑에게 사랑을 서약한 신부는 신랑을 따라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그 사랑에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핍박과 혼돈의 때, 이 신부의 사랑으로 서지 못하면 두려움 앞에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부로 세워진 이 오순절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신부로 세워지길 바란다.
오순절, 구약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를 받았다. 오순절, 신약의 백성들은 성령을 받았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은 인생의 거친 들을 지나가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따라서 인생 광야를 통과하려면 반드시 말씀과 성령의 인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과 성령은 광야와 같은 현실을 하나님 나라로 바꾼다.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바꾼다. 그리하여 변함없는 사랑으로 광야에서도 주님을 따를 수 있게 한다. 하나님 나라 신부들은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특권을 가진 자이다. 사랑하는 자와 함께 한다면 우리는 광야에 있든, 가나안에 있든, 환경이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바라기는 이 오순절에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선물인 말씀과 성령을 받기 원한다. 이것을 통해 이 두려움이 많은 시대에 흔들리지 않고 사랑의 도약을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