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5월 22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32 지불된 평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이 휴전 합의가 어제 새벽 2시에 이루어졌다. 지난 열흘 간 4천 발이 넘는 로켓 공격에 긴장하고 대피하느라 다들 고생 많았다. 전쟁 이후 가장 많이 생각했던 단어는 ‘평화’였다. ‘매일 샬롬을 인사말로 주고 받는 이 나라에 왜 이처럼 샬롬이 없는 걸까?’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질문했다. “왜 이 땅에 평화가 없는 걸까요?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라는 제사장의 축복기도를 매일 암송하고 기도하는 이 민족에게 왜 샬롬이 없는 걸까요?” 그렇게 질문했다. 두가지 답이 마음에 정리되었다. 하나는 정의와 화평이 입 맞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지불된 평화를 이들이 거부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 나누고자 한다.
구약 성경에서 샬롬은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룬 가운데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과 하나 되는 상태가 샬롬인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평화의 개념이다. 창조 전 세상은 혼돈과 공허로 가득했다. 혼돈과 공허는 히브리어로 ‘토후 바보후 (תוהו ובוהו)’이다. ‘토후’는 ‘혼돈, 빈 장소, 불모의 광야’라는 뜻이다. ‘보후’는 ‘공허, 폐허’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 토후 바보후인 곳에 질서를 가져오셔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셨다. 각각의 생명은 소중한 존재로 창조되었고, 이들 사이에 불일치가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평화는 사탄의 유혹과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지고 만다. 그래서 평화는 너무도 쉽게 깨어지고 회복되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평화가 깨어진 세상에서 인간은 두 가지 차원에서 평화를 추구한다. 하나는 ‘팍스(PAX)’고, 다른 하나는 ‘샬롬’이다. ‘팍스 로마나’라는 말에 나오는 ‘팍스’는 제국주의에 의한 평화의 시대를 말한다. 이것은 공평과 정의에 기초한 평화가 아니다. 힘과 군사력의 우위로 유지되는 평화를 말한다. 로마제국은 이 ‘팍스 로마나’를 위해 엄청난 폭력을 자행했다. PAX라는 말에서 지불하다라는 뜻인 영어 단어 pay가 파생되었다. PAX에서 파생된 라틴어 동사 paco가 있는데, 이는 “달래다, 안정시키다, 문제를 해결하다”라는 뜻이다. 이 라틴어 동사 paco가 프랑스어 paier를 거쳐 영어 단어 pay가 되었다. “돈을 지불하여 문제를 해결하다”라는 의미에서 후에 “지불하다”라는 뜻으로 굳어졌다. 팍스 로마나를 유지하기 위해 지불된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힘 없는 사람들의 피였다. 로마의 평화는 한마디로 피로 세워진 평화였다. 그러나 이 팍스 로마나는 200년이 못되어 끝나고 만다. 힘에 의해 세워진 팍스는 또 다른 힘에 의해 무너져 내리고 마는 것이다.
또 다른 평화인 샬롬은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평화다. 샬롬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 즉 사람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와 공의로운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조화로운 질서가 바로 샬롬인 것이다. 시편 85:10절은 이를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다”고 표현한다. 이웃과의 관계가 공의로울 때 하나님의 샬롬이 하늘에서 내려와 입을 맞추는 것이다. ‘왜 이스라엘에 샬롬이 없는 걸까요?”라고 질문했을 때 주신 마음이 바로 ‘의와 화평이 입 맞추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많은 고난을 겪은 민족이다. 그 고난은 단순히 고생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들의 생존과 관련된 고난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어떤 것보다도 자국민들의 안전(security)을 위해 많은 대가를 지불했다. 많은 돈을 들여 아이언돔을 개발했고, 이번에도 알 수 있듯이 단순 방어만이 아니라 가자지구에 엄청난 대응 폭격을 했다. 결국 이러한 댓가지불을 통해 휴전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휴전이 되었다고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이 추구했던 건 안전이었지 평화가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생존의 위협 때문에 안전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건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과도하게 안전에 집착하는 이상 어쩌면 화평이 이들 민족에게 입을 맞추는 것은 영원히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평안은 무엇일까? 이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어떻게 다를까?
샬롬이란 단어를 잘 살펴보면 예수님의 평안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샬롬(שלום)은 히브리어 네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다. ‘쉰(ש)’은 소멸하는 불의 형상이다. 불로 태워 제거하다라는 뜻이 있다. ‘라메드(ל)’는 지팡이 모양이다. 지팡이를 쥔 우두머리를 뜻한다. ‘바브(ו)’는 못의 모양이고 연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멤(ם)’은 물의 파동을 형상화한 것으로 혼돈과 죽음의 세력을 의미한다. 이 단어를 연결해보면 ‘혼돈과 죽음의 세력을 연결하는 우두머리를 제거하는 것’이 샬롬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혼돈을 가져온 세상의 우두머리, 사탄의 권세를 제거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댓가를 지불하셨다. 히브리어로 ‘쉴렘 (שִׁלֵּם)’은 ‘댓가를 지불하다’란 뜻이다. 여기에 ‘바브(ו)’가 합쳐진 단어가 샬롬(שָׁלוֹם)이다. 예수님이 못박히심(ו)으로 인간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신 것이다. 또 하나 히브리어 ‘샬람(שָׁלַם)’은 ‘다 이루다, 완성하다’라는 뜻이다. 여기에 ‘바브(ו)’가 들어간 단어가 샬롬(שָׁלוֹם)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도다!’이다. 이 말은 헬라어로는 ‘테텔레스타이(Τετέλεσται)’인데, ‘다 지불하였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못박히심(ו)으로 우리를 위한 하나님과의 평화, 샬롬을 다 완성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를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셨을 때 하늘의 평화가 입 맞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평안은 지불된 평화다. 죽음으로 순종하셨기에 죽음이 건드릴 수 없는 평화다. 많은 사람들 안에 평화가 깨지는 것은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다. 가자지구에서 로켓이 날아왔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아이언돔과 이스라엘 군의 대응 폭격에 환호했다. 그들은 다시 안전을 확보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 세상이 줄 수 있는 평안이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힘이 있을 때만 누릴 수 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안전이 확보될 때만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안은 환경과 상관 없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평안을 제자들에게 주시기 원했다. 그래서 십자가 죽음을 앞 둔 상황에서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엡 2:14-17,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지금 이스라엘에 진정한 샬롬이 없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 위에서 지불하신 평화를 이들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샬롬은 정치인들이 평화회담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샬롬은 군사력의 우위로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의 분쟁은 땅을 양보하거나, 한 민족이 사라진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지불하신 평화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샬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샬롬은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질 때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으로 결코 이룰 수 없는 평화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게 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강조한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샬롬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진정한 샬롬을 누릴 수 없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은 죄인임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며 화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때, 그 의에 하늘의 평화가 입을 맞추는 것이다.
지난 주 세례식이 있었다. 교회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한 차로 이동했다. 출발한 지 5분이 지났는데, 멀리 남쪽 하늘 위로 로켓이 발사되어 오는 것이 보였다. 사이렌이 울렸고 사람들은 도로에 차를 멈추고 내려서 엎드렸다. 우리도 그렇게 했다. 얼마 뒤 아이언돔이 로켓을 폭파시키는 소리를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보다 세례터가 있는 사해 쪽으로 가는 게 더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이렌 소리가 멈춘 뒤 다시 예루살렘 쪽으로 차를 달렸다. 공항 근처에 이르렀는데, 경찰이 차를 멈춰 세웠다. 로켓 파편이 1번 도로 바로 옆에 떨어져 밀밭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사이에 또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또 다시 엎드리는 상황이 되었다. ‘집사님들 오늘 온라인으로 예배 드리길 정말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15분 정도 차량 통제 끝에 우린 다시 세례터로 차를 달렸다. 3시에 입구 문을 닫는 시간인데, 5분 전에 도착했다. ‘교회에서 5분만 일찍 출발 했어도 이런 상황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런 상황을 다 겪어야 했을까?’ 단순히 들었던 생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실재를 더 경험하게 하셨다는 것이었다. 그날 요단강 예수님 세례터에 발을 담그면서 참으로 죽음이 인간의 실존에 얼마나 가까이 있는 문제인지 새삼 느껴졌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 것을 고백하는 세례식이 이 죽음이라는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해 얼마나 소망을 주는 예식인지 새삼 감사할 수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예수님이 지불하신 평화 때문에 영원한 하늘의 샬롬을 누리는 자들이다. 그 샬롬은 죽음도 흔들 수 없는 것이다. 죽어도 다시 사는 소망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미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 분의 평안을 누릴 수 있게 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장차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온 세상에 샬롬을 가져오실 것이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이 세상에 정글의 법칙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힘이 있어야 평화를 누리는 시대를 주님은 끝내실 것이다. 그 때에 평강이 강 같이 흐르며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쉽게 평화가 깨어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전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
세상은 여전히 돈과 힘을 통해 평안을 누리려 한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 안전을 누리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샬롬은 악을 버리고 의의 좁은 길을 가는 자에게 주어진다. 세상은 약한 자의 피를 댓가로 지불하면서 평안을 구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샬롬은 자기 희생과 십자가라는 댓가를 기꺼이 지불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세상이 주는 평안은 안전해 보이나 사실은 안전하지 않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세상이 주는 평화, 팍스(PAX)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지불된 평화인 샬롬을 누릴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그 평화를 전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