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5월 29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33 위로의 역사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고후 1:6)
위로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세상이 줄 수 있는 위로가 있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가 있다. 오직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위로가 있지만, 하나님은 때로 그 위로의 시간을 늦추기도 하신다. 그럴 때 우리는 영혼의 깊은 밤을 통과해야만 한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고린도후서 1장에서만 ‘위로’라는 말을 열 번 이상 폭탄처럼 사용한다. 바울이 말하려는 위로가 무엇일까? 오늘 함께 살펴보며 위로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고 있다. 고린도교회는 그가 2차 전도여행 중 1년 반을 머물면서 세운 교회였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바울에게 가장 상처를 많이 준 교회였다. 그 교회에는 바울의 설교가 별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가시처럼 바울의 육신을 괴롭혔던 그의 연약함에 대해 수군거렸다. 그들은 바울을 다른 사도들과 비교했고, 또한 바울의 삶에 일어났던 많은 고난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그런 사람들 때문에 바울은 많은 위로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교회에 편지하면서 오히려 ‘위로의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다. 고후 1:3-4,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바울이 이처럼 위로의 편지를 쓸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받는 위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참 사도라면 그런 고난을 겪을 수 없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던것 같다. 그렇기에 바울이 이 편지에서 강조했던 주제는 “약함은 강함의 원천이다”라는 것이었다. “고난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의 도구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 편지에서 자신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받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설명한다. 고후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그가 당한 고난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당한 고난이었다. 그런데 그의 고난은 이미 그가 회심할 때 아나니아를 통해 예견된 고난이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에게 바울의 미래에 대해 예언의 말씀을 주셨다. 행 9:15-16,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한마디로 바울이 부름 받은 곳은 고난의 자리였고, 그의 사명은 그 고난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이었으며, 대랍비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전도유망했던 청년 바울의 콜링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쳤지만, 우리가 받는 위로 역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쳤다’고 고백한다. 그리스도로 인해 오는 위로가 넘쳤기에 바울은 그의 고난의 사역을 중단 없이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어 자신이 받은 고난의 목적에 대해 설명한다. 고후 1: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위로는 아무나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고난을 경험한 사람이 같은 고난을 통과하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고난도 그 정도 차이가 있다면, 유ㅣ로에도 정도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위로의 메카니즘이다.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고난 당한 바울을 위로할 수 있었고, 그 위로를 경험한 바울은 역시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이 시작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바울이 자신의 고난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나 때’의 경험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어려웠던 시절을 하소연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위로 받기 위함도 아니다. 그가 고난에 대해 말한 것은 궁극적으로 고난을 이기는 하나님의 위로에 대해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고후 1: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바울은 고난 당하는 고린도교회를 바라보며 소망으로 가득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참여하는 자가 될 것을 그가 믿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고난에 대해 이야기 한다.고후 1: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얼마나 힘들었으면 살 소망이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것처럼 느껴졌을까?
성경에서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명자들이 죽고 싶다고 탄원하는 장면들이 있다. 먼저 모세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 나오는 장면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에 지쳐 애굽 시절을 그리워한다. 거기서 먹었던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 마늘들을 먹은 것을 생각한다. 그러면서 각기 자기 장막에서 울기 시작한다. 이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야하는 리더, 모세의 입장에서는 정말 힘 빠지고 낙담 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모세는 하나님께 하소연한다. 민 11장 11절에서 15절까지 그의 대사가 이어진다.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모세의 결론은 죽고 싶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키워드는 ‘나’이다. 모세는 하나님께 부름 받은 지도자에서 그저 일인칭 단수 ‘나’로 전락한다. 그는 백성들의 반항을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본 것이다.
대선지자 엘리야도 그런 탄식을 했다. 왕상 19:4,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예레미야도 그랬다. 렘 20:14, 18,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좋을 뻔하였나니…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죽고 싶다는 거다. 요나도 그랬다. 욘 4:1-3,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믿음의 영웅들도 이렇게 절망했다. 그들 역시 영혼의 깊은 밤을 통과해야 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한 절망과 한계 상황에 부딪쳐 스스로 자신에게 사망 선고를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려면 많은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명자들이 고난과 반대 속에서 절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 그들이 받은 콜링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불가능한 일에 부름 받은 것이다. 모세는 노예였던 백성을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자유인으로 만드는 부르심을 받았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빼내는 게 쉬운 일이었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애굽을 빼내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엘리야는 왕을 비판하는 부르심을 받았다. 칼을 가진 권력자를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해야만 하는 부르심이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는 것을 말해야 하는 부르심을 받았다. 망한다는 예언의 말을 듣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대중의 인기와 가장 상관없는 일에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요나는 원수의 나라에 회개의 복음을 전하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적국의 백성들도 아끼신다는 사실에 직면해야 했다. 그리하여 이들 사명자들은 다 절망했다. 차라리 죽기를 원했다. 그러나 절망도 그들 부르심의 일부였다. 그들이 모욕과 비난을 당하면서, 또한 사람들의 인기에서 멀어지면서 그들 안에 소멸되는 것은 ‘나’라는 일인칭 주어였다. 그러나 자신의 자아가 파멸되는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 하나님의 위로가 찾아온다. 그리하여 자아가 소멸되고 하나님의 위로가 찾아 온 그 자리에는 오직 한가지만 남게 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그 사람에게 맡겨진 사명이다. 그것만 남게 된다. 이 시점에서 새로운 위대함이 탄생한다. 이제 하나님의 사명자에게 ‘나’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내가 인기가 있고 없고, 사람들이 내 말을 잘 따르고 안 따르고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과 그 일에 나를 부르신 하나님 한 분인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필요한 것을 친밀하게 말씀하시면서 그를 위로하신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백성의 짐을 나누어 감당할 70명의 장로를 세우라고 모세에게 지시하신다. 그러면서 이렇게 위로하신다. 민 11: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이후 모세는 변한다.진중에서 예언하는 엘닷과 메닷을 말리라는 여호수아의 요청에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반응한다. 그는 자신의 인기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마음을 쏟는 관대한 사람으로 변한 것이다.
엘리야도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면서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먹게 한다. 힘을 얻은 엘리야는 40일을 걸어서 호렙 산으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을 침묵하는 시간을 갖는다.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그에게 찾아오신다. 왕의 칼을 피해 나만 남았다고 느끼는 그에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주신다. 이후 엘리야는 엘리사를 만나 그에게 그의 겉옷을 던진다. 자신의 후계자를 세워 하나님의 사명이 이어지게 하는데 자신의 사명을 다 한 것이다.
바울 역시 죽을 것 같은 고난 속에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 고후 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는 하나님의 위로 속에서 고난의 목적을 발견했다. 그것은 고난이 더이상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는 도구임을 깨달은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언제나 크신 능력으로 우리를 건지시고 위로해 주실 것을 확신했다. 고후 1: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하나님은 사명자들의 삶을 쉽게 만들어 주시지 않는다. 그것은 그 사명 자체가 인간의 본성을 뒤집어야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명자들은 오직 고독과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얻는다. 사명자들이 힘든 건 단지 고난이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니다. 고난 중에 위로를 경험하지 못해서이다. 그래서 바울은 위로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한다. 고후 1: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여러분 각자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다 이루기까지 고난은 결코 여러분을 비껴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명자들에게 위로의 역사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위로가 역사해야 고난을 견딘다. 이것을 통과해야 ‘나’란 사람이 소멸되고 하나님의 사명만 남는다. 그럴 때 우리는 인기 여부에 관계없이, 나의 연약함에 상관없이, 그리고 고난의 크기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부르신 일에 계속해서 헌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영광은 고스란히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영광이 되기에 지속해서 하나님의 사명에 충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위로의 역사가 혹 지금 고난 중에 있는 여러분에게 넘치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