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6월 19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36 분노의 동기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약 1:19-20)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때로 화가 나는 일들이 종종 있다. 조금 옛날 통계이긴 하지만 대한 신경정신의학회 2015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 국민의 절반 정도가 상당한 분노 감정을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 11%는 치료가 필요한 분노를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분노하고 있는가? 분노란 욕구 좌절에 대한 반응이거나 생존을 위협하는 자극에 대한 반응이다. 이것은 정신의학자가 내리는 분노의 정의다. 내가 원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을 만날 때 우리 뇌의 편도체에서 분노 자극이 생긴다고 한다. 그런데 분노 감정이 자극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뇌의 전두엽에서 이성적 사고 기능이 작동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화 내는게 타당한가?’라는 성찰과 함께 자기 제어 기제 또한 반사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코로나가 장기화 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화를 내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다. 우울감을 느끼는 ‘코로나 블루’를 넘어서 이제 불쑥 화가 치밀거나 분노를 조절할 수 없는 우울증 단계인 ‘코로나 블랙’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 상황 때문에 생존의 위협과 일상생활에서의 기본적인 욕구가 좌절되면서 분노하고 싶은 요인이 더 많아진 것이다. 정신의학적으로 보면 지금 많은 사람들의 뇌의 편도체가 분노로 달아올라 있는 반면, 뇌의 전두엽의 기능은 그만큼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성찰을 하며 분노를 제어할 수 있는 기능이 약화된 것이다. 이러한 분노 사회에서 여러분의 편도체는 안녕하신지?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성내기를 더디 하라’고 권면한다. 그 이유는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우리 뇌의 전두엽의 이성 기능을 활성화시키는데 아주 유익한 말씀이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의 분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먼저 전제하고 싶은 게 있다. 분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분노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시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은 분노할 게 참 많으신 분이시다. 예수님도 거룩한 성전이 장사하는 자들의 소굴로 변한 것을 보시고 환전상들의 상을 뒤집어 엎으셨다. 이처럼 분노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가’ 이다. 분노의 동기가 무엇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가 지켜지지 않는 것에 대해 분노하신다. 우리는 언제 분노하는가? 우리도 배우자에게, 자녀들에게, 가까이 있는 동료들에게 어쩌면 매일같이 분노한다. 그런데 혹 우리는 분노해야 할 때 가만히 있고, 가만히 있어야 할 때 분노하지는 않는가?
바울은 말한다. 엡 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분을 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마귀에게 틈을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분노를 반드시 신속하게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처리하지 못한 분노는 죄가 되고 한이 되어 결국 분열의 길로 가게 된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가인은 마귀에게 틈을 주어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다. 오늘도 사람들은 분노의 문제를 다스리지 못해 마음 속에서 자신을 죽이고 남을 죽이는 일을 무수히 반복하고 있다. 분노도 반복하면 습관이 된다. 습관처럼 분노하는 사람에겐 홍해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피하게 된다. 결국 분노하는 사람 곁엔 아무도 남지 않는 것이다.
약 1:19-20,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분노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상대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가 나서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쏟아내기 바쁘다는 것이다. 야고보 사도의 권면은 그 반대다. 듣기를 빨리 하고, 말하기는 천천히 하라는 것이다. 성내는 것도 템포를 죽여서 천천히 하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 분노가 나온다. 므리바에서의 모세의 분노이다. 그 상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민 20:1-2, “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이르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에 장사되니라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에게로 모여드니라” 때는 출애굽 한 지 40년이 되는 해 첫째 달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광야가 있는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한다. 그곳은 38년 전 그들이 이미 도착했던 곳이었다. 그들은 거기서 정탐꾼을 보냈고, 이 정탐꾼들의 보고로 인해 출애굽 1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38년이 지나는 동안 출애굽 1세대는 거의 다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 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도 가데스에서 죽어 장사된다. 백성들은 그곳에서 마실 물이 없자 모세에게 모여든다. 모세는 그들과 다툰 뒤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이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민 20:8,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40년 전 르비딤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모세는 성난 백성들이 곧 자신을 돌로 칠 것 같은 위협을 느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백성들이 마시게 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번 므리바에서는 지시하신 사항이 좀 달랐다.반석을 치라는 것이 아니라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세가 많이 화가 났던 모양이다. 모세는 반석에게 명령하지 않고 반석을 두 번 내리친다. 그런 모세와 아론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민 20:12,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모세는 이 사건으로 인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게 된 것이다. 40년 광야에서 수고한 모세에게 너무도 가혹한 선언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분노를 왜 그리 큰 문제로 보셨을까?
우선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했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사라질 때 우리는 쉽게 상황과 사람 때문에 분노한다. 광야 생활 내내 모세는 백성들의 불평에 시달렸다. 물론 모세 입장에서도 분노가 쌓이고 쌓였을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회중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민 20:10,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반역자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그저 광야 생활에 지친 백성들에게 물을 주기 원하셨는데, 모세는 자신이 물의 공급자인 것마냥 말하며 백성들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그는 야고보 사도의 권면과는 정반대로, 듣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는 속히 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사실 모세는 백성들이 그에게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못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이렇게 말했다. 민 20:5,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그러나 이들의 불만은 광야 1세대의 불만과 달랐다. 광야 1세대들은 애굽에서 먹던 음식들을 그리워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스라엘 땅의 열매인 무화과와 포도와 석류가 없는 것을 애통해 한다. 그들은 과거 광야 1세대처럼 애굽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기보다는 가나안 땅에 있지 않는 것에 대해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 세대는 애굽의 익숙함을 떠난 것에 대해 한탄했지만, 자녀 세대인 그들은 그들이 아직 약속의 땅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한탄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과거로 돌아가길 원했던 이전 세대의 불평과는 다른 것이다. 이 사람들은 과거지향적이 아니라 그들에게 찾아올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약속의 세대였다. 그런 그들을 모세는 단순히 반역자라고 비난한 것이다. 그러면서 모세는 그들의 말을 듣기보다는 자신의 분노를 쏟아내기에 빨랐던 것이다. 모세는 어쩌면 그들이 실제로 말한 것을 듣지 못하고, 과거 세대의 불평의 메아리를 들었던 것인지 모른다. 이처럼 모세는 출애굽 1세대의 과거 프레임에 갇혀서 새로운 세대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데 실패한 것이다.
모세가 새로운 세대를 반역자라고 부르며 분노한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행동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신세대에 대한 약속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모세는 이들과 이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부족했던 것이다. 결국 모세는 출애굽 1세대와 함께 광야에서 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선고를 받게 된다. 결국 출애굽 한 지 사십 년째 해 오월 첫째 날, 아론은 호르산에서 죽는다 (민33:38). 그리고 모세는 같은 해 열한째 달 첫째 날, 비스가산에서 죽게 된다 (신1:3).
우리는 왜 분노하는가? 그것은 우리 안에 믿음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갖고 계신 하나님의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도 쉽게 나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에게 분노하며, 우리도 모세처럼 그들을 반역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얼마든지 나와 다른 생각을 말하며 이의 제기를 할 수도 있는 것인데, 그것을 자신에 대한 반역이라고 카운트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도 모세처럼 과거 상처 받았던 패러다임에 갇혀 내 몸이 기억하는 분노를 습관처럼 쏟아내는 것이다. 우리가 성내기를 빨리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듣지 못한다. 그들이 말하는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들의 힘든 현실에 대해서도 공감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내 기준과 내 감정에 사로잡혀 분노로 그들의 의견을 제압하려 한다. 그러나 분노하다 보면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할 전두엽의 기능이 일시적으로 마비된다. 자신이 왜 분노하는가 살펴 볼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오로지 분노라는 그 감정 자체에 휘둘리게 된다. 그리하여 쉽게 성내는 것이 마귀에게 틈을 주며 우리를 죄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에는 분노에 대한 많은 권면의 말들이 있다. 잠언 14:17,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 잠언 15:18,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잠언 19:11,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모두 다 우리 뇌의 전두엽의 기능을 강화시켜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말씀이다. 요셉은 형제들로 인해 충분히 분노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분노로 반응하지 않았다. 상황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주목하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키웠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때에 형통케 하시는 은혜를 경험했던 것이다. 다윗도 사울로 인해 충분히 분노할 수 있는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분노로 반응하지 않았다. 다윗은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데 삶의 원칙을 두었고,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요셉이나, 다윗이나 모두 분노 찬스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전환한 결과였다.
우리는 내가 분노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항상 그 동기를 점검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라면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분노의 속도도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분노의 감정이 올 때, 가급적 그 표현을 더디 해야 한다. 배우자의 이야기, 자녀의 이야기, 동료의 이야기를 먼저 잘 듣고 나서 해야 한다. 그리고 안 해도 될 분노라면 하지 말아야 한다. 요즘 같이 쉽게 분노하는 사회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반드시 분노의 동기와 분노의 속도를 점검해야 한다. 분노가 일 때 분노를 잠재우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라기는 분노의 팬데믹 속에서도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이 하실 일을 주목함으로 분노가 아닌 믿음으로 반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