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6월 26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37 축복의 상속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3:8-9)
축복은 실제이다. 우리는 복 받은 사람의 인생이 형통하게 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저주도 실제이다. 우리는 저주 받은 사람의 삶이 어떻게 꼬이는지도 종종 보게 된다. 축복과 저주는 우리 삶의 성공과 행복을 좌우하는 실제적인 메카니즘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인생이 저주가 아닌 축복의 울타리 안에 있길 간절히 소망한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복을 이어받는 삶의 비결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벧전 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베드로는 지금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나그네와 같이 살아가는 성도들을 향해 편지 하고 있다. 이 서신은 이제 고난을 앞두고 있는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한 편지다. 여기서 베드로는 고난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의 원칙을 이야기 한다. 베드로는 8절에서 다섯 개의 형용사를 사용한다. 첫번째 형용사는 호모프로네스(ὁμόφρονες), ‘마음을 같이하여’이다. 이것은 ‘같은’을 뜻하는 ‘호모스’와 ‘마음’을 뜻하는 ‘프렌’의 합성어다. ‘동일한 것에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똑같은 의견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다. 각자가 서로에 대한 동일한 관심을 가지며 영적인 끈으로 연합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난의 때에는 예민해진다. 위기에 대처하는 각자의 방식이 다르다. 서로 견해가 틀리면 쉽게 마음을 같이 하기가 힘들어진다.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고난의 시기를 겪으며 다들 예민해지기 쉬운 때를 지나고 있다. 백신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을 같이하여 고난을 극복해야 하는 때인 것이다.
두번째 형용사는 쉼파데이스(συμπαθεῖς), ‘동정하며’이다. 이것은 ‘함께’를 뜻하는 ‘쉰’과 ‘고통을 받다’에 해당하는 ‘파스코’의 합성어이다. 이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하여 그 사람의 감정을 지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는 즐거워 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존재인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고전 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손가락을 다쳤는데 손만 아픈 것이 아니다.한 부분이 아프면 몸 전체가 힘든 것이다. 고난의 때에 한 지체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세번째 형용사는 필라델포이(φιλάδελφοι), ‘형제를 사랑하며’이다. ‘사랑’에 해당하는 ‘필로스’와 ‘형제’에 해당하는 ‘아델포스’의 합성어이다. 이는 단순한 형제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결속시키는 형제애를 말한다. 인간의 사랑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원수도 사랑하는 사랑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라고 고백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마음을 흔들어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고난의 때에 우리에게 베푸신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일으키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네번째 형용사는 유스플랑크노이(εὔσπλαγχνοι), ‘불쌍히 여기며’이다. 이것은 ‘좋은’의 뜻을 가진 ‘유’와 ‘마음’을 뜻하는 ‘스플랑크논’의 합성어이다. 이는 ‘좋은 내장’이란 뜻도 있는데, 애끓는 심령’으로 해석하면 좋을 듯 하다.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쉽지 않은 감정이다. 특히 나에게 잘못했거나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쉽지 않다. 교회 안에는 늘 함께 하고픈 사람도 있지만 정말 함께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고난의 때, 함께 힘든 시간을 지나는 그 자체만으로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애끓는 심령을 회복하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다섯번째 형용사는 타페이노프로네스(ταπεινόφρονες), ‘겸손하며’이다. 이는 ‘겸손한’의 의미를 가진 ‘타페이노스’와 ‘마음’을 뜻하는 ‘프렌’의 합성어이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마 11:29)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길에서 서로 누가 높으냐고 싸우고 있을 때 예수님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겸손해야 우리는 서로 마음을 같이할 수 있는 것이다. 고난의 때에 서로의 발을 씻기며 고난을 통과하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베드로는 이어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설명한다. 벧전 3:9,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는 욕을 욕으로 대응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욕을 먹으면 되 갚고 싶은 게 사람의 본성이다. 그러나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는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욕을 먹을 것을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나를 비난하고 불이익을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즉, 고난이 성도의 부르심이라는 것이다. 손해보는 것이 성도가 치러야 할 댓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핍박속에서도 오히려 축복하는 것이 성도의 소명이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말한다.‘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복은 교회 다닌다고 해서 저절로 찾아오는 게 아니다. 고난의 부르심을 감당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바로 축복인 것이다.
복을 이어받는 삶은 축복의 상속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약속하셨다. 창 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 축복을 이삭이 물려받았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물려받았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모압 왕 발락이 발람이라는 주술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는 여기서 축복과 저주의 메커니즘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축복이 하나님과의 깊은 연합의 결과인 반면, 저주는 하나님과의 분리의 결과라는 것이다.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향해 다가오자 두려웠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멸하길 원했다. 발락은 축복과 저주의 메카니즘을 알았던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연합 되어있는 한 어떠한 부정적인 힘으로부터 영향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발락은 당대 유명한 주술사였던 발람을 고용한다. 그를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의 강한 연결을 끊기 위해 저주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발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 할 수 없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 할 때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축복의 말을 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발람은 이렇게 그들을 축복한다. 민 23:21,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그러나 발람이 원래하고싶었던 말은 뭘까? 이 축복과 정 반대의 말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기를 그는 저주하기 원했던 것이다. 발람은 왜 그들을 저주할 수 없었을까? 한 가지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브라함의 축복을 이어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발람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축복한다. 민 24:5-6, 9, “야곱이여 네 장막들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 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 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랍비 라시는 이 축복을 할 때 발람이 유대인들의 장막이 서로 이웃의 천막을 볼 수 없도록 배열된 것을 관찰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유대인들은 서로의 장막을 넘겨다 보며 서로를 비판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대 민족은 서로의 결점을 찾아내며 서로 멀어지는 것보다 서로 간의 결속과 이웃을 사랑하는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발람이 야곱의 장막을 바라볼 때 사실은 저주하기 위해 악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유대인들의 결속이 그 악한 의도를 막는 힘이었다고 라시는 해석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통해 자신들이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를 지켜줄 때 하나님께서도 자신들을 악에서 보호하고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어 단어에는 각각 고유의 숫자 값이 있다. 연합, 하나됨을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 에하드(אחד)는 숫자 값이 13이다. 사랑을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 아하바(אהבה)도 숫자 값이 13이다. 이 에하드와 아하바의 숫자 값을 더하면 26이다. 그런데 이는 야훼(יהוה)와 같은 숫자 값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람이 사랑(아하바)으로 다른 사람과 연합(에하드)할 때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야훼)과의 연합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우리 삶에서 다른 사람과 친밀한 사랑을 만드는 가장 실질적인 방법이 뭘까? 그것은 서로를 축복하는 것이다. 축복의 말을 함으로 우리는 사랑과 용납의 환경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를 더 가까워지게 하며 결국 하나님께도 더 가까워 지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서로를 저주하면, 우리는 나뉘어진다. 그러한 분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 역시 하나님과 멀어져 악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악과 욕으로 대하는 자들에게 복을 빌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벧전 3:10-11,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고난 앞에서 사람들은 생존에 급급하게 된다. 남을 비난하고 고발해서라도 자기부터 살고자 한다. 그러나 성도는 고난 앞에서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꺾여서는 안된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그것은 성도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코람데오의 삶이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는 그래야 하는 이유를 이어서 설명한다. 벧전 3: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가 상속받을 축복을 놓치지 않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시는 자의 축복에 간섭하시는 분이시다. 신명기는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신 23:4-5, “그들은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저주를 변하여 축복이 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저주에서 자신을 보호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과 긴밀히 연합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도 복을 비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축복을 이어 받는 삶의 비결인 것이다.
축복을 상속받길 원하는가?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라.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라.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라.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라. 그럴 때 주의 눈은 여러분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여러분의 간구에 기울이실 것이다. 그리고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며 그들로부터 여러분을 보호하실 것이다. 바라기는 고난의 때에도 축복을 이어받음으로 이 고난의 시간을 넉넉히 통과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