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7월 10일 설교 이익환
신약포션 39 성화의 여정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후 1:4)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게 우리 인생이다. 인생은 여행과 같아서 때론 우리가 계획하지 않은 의외의 일들이 여정 중에 발생하곤 한다. 우리 가족이 이스라엘에서부터 여러 복잡한 과정을 뚫고 한국에 무사히 왔는데, 온 지 이틀 째부터 코로나 확진자가 갑자기 증가했다. 정부는 월요일부터 2주간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를 실시한다고 한다. 반가운 만남을 기대하며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왔는데, 당분간 또 만남을 유예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 가족은 19일이면 2주간의 격리가 해제된다. 격리가 해제되면 아버지를 가장 먼저 뵈려고 했다. 그런데 어제 아버지께 전화가 왔다. 그 날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해서 2주간 입원하신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와의 만남도 미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또한 군에 있는 큰 아들은 코로나 상황이 심해져 휴가가 더욱 불투명해진 상황이다. 참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게 이번 한국 여정인 것 같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세상을 선형적인 방식으로(in a linear fashion) 본다. 즉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하는 목표를 가지고 이 목표에 도달하는 데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것이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꾸려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우리가 설정한 경로를 따라 그 목표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우리 삶의 성공 여부를 측정한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삶의 목적을 좀 다르게 표현한다. 그것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 편지는 베드로가 순교하기 직전에 쓴 것이다. 서기 65년경 기독교인들은 네로 황제 치하에서 고난의 시간을 겪고 있었다. 또한 교회는 한편으로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으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베드로는 성도들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쓴 것이다.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목표를 세우는 것만큼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목표를 세우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목표를 세운다고 해서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은 실제로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을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벧후 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베드로는 먼저 성도가 누구인지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성도는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을 경험한 자이다. 그리하여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들이다. 4절에서도 성도의 정의가 나온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기서 성도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정의된다. 신성한 성품이 뭘까? 신성한 성품은 타고난 성품과 반대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원죄 아래 태어났다. 그래서 우리의 타고난 성품은 탐욕적인 본능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의 타고난 옛 성품은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추구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를 추구할 수 없게 된다.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는 반드시 옛 성품을 벗어 버리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성한 성품’은 이전 개역성경에는 ‘신의 성품’으로 번역되어 있다. 즉 예수님의 성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자가 되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인간이 연약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단한 연단의 과정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벧후 1:6-8,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구원받은 성도는 구원의 확신만으로 신앙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부단한 성화의 여정을 통해 신앙이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의 썩어질 것에 굴복하고 만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내 자아, 내 옛 성품이 이끄는 대로 살게 되는 것이다. 성화의 여정을 통해 성품의 변화를 이루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주인 되신 주님의 완전한 뜻 가운데 살지 못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단호히 말한다. 벧후 1:9-11,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우리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않는다면 맹인으로 살 수 밖에 없다고 베드로는 말한다. 우리가 맹인이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를 볼 수도 없고 그것을 추구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성화의 여정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머물렀던 여정들이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라암셋을 떠나 여리고 맞은 편 모압평지에 이르기까지 40번 진을 친다. 라암셋에서 모압평지까지는 걸어서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야말로 광야 한 복판에서 뺑뺑이를 돈 것이다. 그 이유가 뭘까? 거기엔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 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는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낮추는 겸손 훈련의 장소였다. 광야는 또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순종 훈련의 장소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훈련의 시간을 지나면서 40년 만에 드디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준비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여정은 단순히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애굽 땅에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목표였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 년의 여정은 실패의 시간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직선 거리로 가고 싶었을 것이다. 광야는 그저 최대한 빨리 통과하는 지점이 되길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 한복판에서 뺑뺑이를 돌며 같은 곳을 반복해서 걸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처럼 광야의 여정을 보면 하나님의 관점은 우리와 다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선형적이고 목표 지향적인 관점에 익숙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뺑뺑이를 좋아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이 역사와 삶을 바라보시는 것은 그런 면에서 순환적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에도 순환적인 사이클이 나타나 있다. 지구가 해를 중심으로 돌아 간다. 그러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해마다 반복적으로 순환한다. 매 년마다 절기가 반복되고, 또 매 칠 일마다 샤밧이 반복된다.
유대인 랍비 아리 칸은 이렇게 말한다. “순환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목적지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목적은 여정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가장 즐거운 축하 행사에서 우리는 원을 그리며 춤을 춥니다. 결혼식과 Simchat Torah에서 우리는 유대교 생활의 순환을 축하하며 여행을 즐기고 자신을 그 순환의 일부로 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우리 현자들은 메시아의 미래에 의인이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하나님 자신이 그 중심에 서실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궁극적인 목적지가 원 그 자체 였고, 하나님은 항상 그 중심에, 우리 가운데, 항상 계셨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그가 죽기 전 광야 1세대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여정을 기록해야 했다. 민 33:2,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들이 행진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들이 행진한 대로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여기서 노정은 히브리어로 ‘마싸(מסע)’다. 마싸는 나싸(נסע)에서 온 말인데, 나사는 ‘장막 말뚝을 뽑다’란 뜻이다. 그래서 마싸는 ‘장막 말뚝을 뽑는 곳, 즉 ‘출발지 또는 여정’이란 뜻이 있다. 민수기 33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었던 지명이 모두 마흔 두 개가 나온다. 이름 모를 광야에 머물면서 그들이 겪어야만 했던 삶의 노정(마싸)이 곧 그곳의 지명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각각의 노정마다 아픈 역사가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을 왜 그 노정들을 기록하게 하셨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의 여정은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분의 마음을 배워가는 성화의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이 지나온 노정을 열거하신 후에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민 33:51-53,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고 그 땅을 점령하여 거기 거주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소유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까지 걸어온 노정이 끝이 아니었다. 그들에겐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최종 목적이 있었다. 하나님은 지금 광야 2세대를 하나님이 준비하신 미래로 이끄시기 원하셨다. 그래서 그들의 과거의 노정을 돌아보고 정리하게 하신 것이다. 그들은 광야의 여정을 회상하며 그것을 자신들의 선형적인 관점이나 상처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순환적인 관점에서 광야의 시간을 이해해야 했다. 과거가 정리돼야 미래가 소망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노정 속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하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들어가는 가나안은 그리 소망스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준비하신 미래인 가나안을 누리기 위해서 그들은 반드시 그들의 과거를 재평가해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광야에 들어가는 세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신 9:6-7, “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나안을 허락 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목이 곧은 자들이었다. 틈만 나면 불신과 원망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던 자들이었다. 우리가 살면서 고통 당하는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 그 분이 우리를 축복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 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고통 당하는 이유는 우리의 목이 곧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고통 당하는 이유는 우리의 성품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나안을 누릴 수 있는 자들이 되길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성품 훈련의 시간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우리는 우리의 탐욕을 따라 살지 않게 된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어야 우리는 가나안 땅에서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우리 중에 광야가 없는 인생은 없다. 광야에서 열외 되는 자도 없다. A 지점에서 내가 목표로 한 B지점으로 가지 못하고 내 인생이 광야를 맴돌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나의 믿음에 덕이 있는지, 덕에 지식이 있는지, 지식에 절제가 있는지, 절제에 인내가 있는지, 인내에 경건이 있는지, 경건에 형제 우애가 있는지, 형제 우애에 사랑이 있는지…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단순히 가나안에 빨리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가나안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광야의 시간은 단순한 처벌이 아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하여 신성한 성품으로 준비되는데 반드시 필요한 여정인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계획했던 B지점으로 갈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에 하나님의 큰 손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다음 여정을 위해 장막의 말뚝을 뽑은 그 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그 여정 자체에 감사하며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지난 주 텔아비브에서 말뚝을 뽑아 서울까지 왔는데, 이제 다음 노정이 어디가 될지 기대하는 마음이 있다. 그냥 이 여정 자체가 감사하고, 이 여정 중심에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감사하다. 그리고 이 여정 자체를 축복해주시는 믿음의 지체들이 있어 감사하다. 이 여정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기회가 되길 기도한다. 바라기는 환경과 상황과 상관없이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를 바라보며 우리 모두 날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매일의 여정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