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7월 17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40 죽은 선지자의 사회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마태 23:37-38)
유대인들에게 가장 슬픈 날이 언제일까? 오늘 저녁부터 시작되는 ‘티샤 베아브(תשעה באב)’이다. 유대력으로 아브월 9일이다. 이 날은 BC 586년 첫번째 성전이 파괴된 날이다. AD 70년 두번째 성전도 아브월 9일에 무너졌다. 유대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사건들이 거의 모두 이 날에 일어났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 날을 기념하며 금식한다. 회당에서는 평소보다 촛불을 희미하게 밝히고 모임이 끝나고서는 불을 완전히 꺼버린다. 유대 민족이 직면했던 캄캄했던 암흑을 기억하는 것이다. 탈무드에 의하면 아브월 9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결정이 내려진 날이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날 밤은 아브월 9일 밤이었습니다. 거룩하신 자가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까닭 없이 울었으니 그러므로 내가 오늘을 따로 두어 대대로 울게 하리라.”(탈무드 바블리 타아니트 29a) 이것은 성경의 기록은 아니지만, 지금 유대인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통곡했던 죄의 대가를 후세대인 자신들이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브월 9일이 시작되기 직전의 샤밧은 ‘샤밧 하존(שבת חזון)’이라고 불린다. ‘계시의 샤밧’이란 뜻이다. 오늘이 바로 샤밧 하존이다. 이 날 토라와 함께 읽는 선지서 말씀이 이사야서다. 사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여기서 계시란 말이 히브리어로 ‘하존(חזון)’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남유다가 멸망하기 약 120년 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을 유다 백성들에게 전했다. 임박한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계시였다. 이 말을 들을 때만 해도 남유다 백성들은 여전히 회개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길 거절했다. 그래서 약 120년 후, 멸망이 그들에게 임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 역시 예루살렘에 관한 계시를 보았다. 그래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탄식하며 계시의 말씀을 선포하셨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약 40년 뒤 또 다시 멸망하고 만다. 오늘은 예루살렘 멸망 전 선포되었던 이사야의 계시와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며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나누고자 한다.
사 1:21-23,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여러분이 천국문 앞에 이르렀을 때 어떤 질문을 받게 될 것 같은가? 탈무드에 의하면 우리가 이생을 떠나 내세에 도착할 때 우리가 받게 될 첫 번째 질문은 종교적인 질문이 아니라고 한다. ‘당신은 성경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라는 종교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당신은 사업에서 얼마나 정직하게 행동했는가?’라는 삶에 관한 질문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지금 읽은 이사야서 말씀은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거기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은에 비금속을 섞어 팔았고, 포도주에는 물을 타서 팔았다. 그들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며 살았다. 정치인들은 뇌물을 좋아했고, 자신의 직분과 권력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데 사용했다. 이와 같은 부정과 부패는 사회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사람들을 냉소적으로 만든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분열을 일으킨다. 다른 모든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평소에 성실히 살던 사람들도 왜 나만 공동의 선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도 공의와 정의의 길을 버리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국가는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이처럼 예루살렘의 운명은 이들의 종교적 열심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삶에서 정의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 1:11-1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이사야 선지자가 볼 때, 당시 종교는 사회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 문제의 핵심이었다. 우리 역시 예배에 자주 참석하고, 헌금을 많이 내면, 내 자신의 죄나 사회에서 짓는 죄를 무마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사야서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을 이보다 더 진노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사회에 도덕성이 사라지고, 경제와 정치가 오직 자기 이익에 의해 좌우될 때, 신뢰는 무너지고 사회 구조는 무너지고 만다. 예루살렘은 이러한 이사야의 선포 후, 대략 120년 뒤에 멸망했다. 역사상 다른 제국들도 그렇게 멸망의 길을 걸어갔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의 모습도 처음 멸망할 당시와 비슷했다. 마 23: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당시 종교 권력자들이었다. 또 다른 종교권력자들은 사두개파 제사장들이었다. 이들은 성전의 운영권을 맡아 성전세를 거둬들이며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이들은 종교적인 권력을 넘어 정치, 경제적인 기득권까지 독점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이 다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고 탄식하셨다.
마 23:29-31,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면서, 자신들은 조상들처럼 선지자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라고 말씀 하신다. 그들은 선지자인 세례 요한을 죽였고, 이제 또 그들에게 쓴 소리를 하고 있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는 선지자들을 죽이는 것이다. 선지자의 선포가 사라지는 사회는 멸망으로 가는 사회다. 하나님의 정의가 선포되지 않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하나님의 뜻이 선포 되지 않는 사회는 권력을 가진 자의 뜻만 남게 된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이 사라진 사회는 죽은 사회이며 반드시 멸망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 같은 선지자를 죽인 예루살렘은 예수님 사후 40년이 지난 AD 70년에 멸망하고 만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의 공의를 버리고서라도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걸까? 그것은 인간의 깊은 자기 불안감 때문이다. 편법으로라도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안전지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깊은 죄성을 이번 주 토라포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 1:19,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호렙 산을 떠나 너희가 보았던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아모리 족속의 산지 길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른 때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데스 바네아에 이른 것은 출애굽 이 후 2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을 떠나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왔다. 하나님은 이제 그들에게 ‘올라 가서 가나안을 차지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진격했다면 그들은 광야 생활을 2년 만에 끝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워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정탐꾼을 보낸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을 정탐한 뒤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들의 두려움은 커졌고, 그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원망으로 발전했다. 모세는 그러한 그들의 태도를 이렇게 묘사한다. 신 1:26-27,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두려움 때문에 무너진 것은 그들의 믿음이었다. 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고, 믿음으로 가나안을 바라보지 못했다.
모세는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신 1:29-31, 33,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미래가 불확실 할 때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위험이 예상될 때 우리는 불안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그분과 함께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그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을 나와 불확실한 미래로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애굽 군대와 친히 싸우신 분이셨다. 광야에서 지친 자녀들을 안고서 가데스 바네아까지 이르게 하신 아버지셨다. 그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가득한 광야에서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신 분이셨다. 모세는 이 사랑의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기에 너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휘둘려 그들의 현실을 원망과 절망으로 채웠다. 하나님은 그런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선언하셨다. 민 14:22-23,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선언이 티샤 베아브, 즉 아브월 9일에 있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티샤 베아브는 그들이 사랑의 하나님보다 두려움을 선택한 결과 맞이한 슬픈 역사의 날이다. 그들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휘둘려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함께 지나오신 하나님의 임재를 붙들지 못했다. 그들이 연약하고 힘들 때 그들을 안고 가신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은 광야에서도 장막 칠 자리를 먼저 찾아주신 하나님이 그들의 미래에도 그러하실 것이라고 믿지 못했다. 존재가 불안할 때 사람들은 안전지대를 찾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현실 속에서 자신을 지켜줄 대상을 찾는 것이다. 그것이 돈일 수 있고, 그것이 권력일 수 있다. 사람들은 불안한 현실을 살면서 하나님의 공의보다는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여겨지는 자기 이익에 집착하는 것이다.
불확실한 상황으로 인생이 흘러갈 때 우리에게 두려움이란 감정이 찾아온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 사회에는 그 어느 때보다 불안과 두려움이 증폭하고 있다. 염려되는 것은 이처럼 불안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서 안전지대를 찾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보다는 나부터 살고 보자고 모두가 다 자기 유익을 구하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하시는 분이다. 광야에서도 우리 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는 분이시다. 이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크고 두려운 광야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 우리는 우리의 유익보다도 하나님의 공의를 먼저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이익 때문에 선지자의 음성을 무시하는 사회는 선지자를 죽이는 사회다. 사회의 공동 선이 무너지는데도 그것에 저항하며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지 못하는 사회는 죽은 선지자의 사회다. 그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선지자가 사라진다면 그 사회는 멸망의 길로 가게 되어있다.
아브월 9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움 때문에 역사의 아픔을 경험한 날이다. 또한 선지자를 죽이고 자기의 이익만 구하는 삶을 살았기에 결국 멸망 당한 날이다. 우리도 이 날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길 바란다. ‘나는 내가 맡은 일에서 정직하게 행하고 있는가? 혹시 나의 이익을 구하느라 하나님의 정의를 저버리고 있진 않은가?’ 돌아볼 수 있길 바란다. 크고 두려운 광야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 한 분을 향한 절대 믿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앞서 가시며 우리의 갈 길을 예비하시는 분이시다. 두려움 때문에 타협하거나, 멈춰서는 자가 아니라 끝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붙드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결국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나안에 이르게 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