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포션 41 사랑의 증명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7월 24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41 사랑의 증명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누가 10:36-37)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남산에 올랐다. 부모님들이 좋아하시는 모습에 모처럼 사위 노릇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서울타워 입구에 들어서니 연인들이 걸어 둔 ‘사랑의 자물쇠(Love Lock)’가 보도 옆으로 가득했다. 서로의 사랑을 잠근 뒤 열쇠는 멀리 던져버리고 자물쇠만 달려 있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가 사랑하는 증거를 영원히 남기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랑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그 자물쇠 사이를 지나가면서 ‘저 수 많은 자물쇠들 중 과연 몇 퍼센트가 영원했을까’란 비딱한 생각도 들었다. 예수님은 모든 계명 중에 으뜸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서기관의 질문에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오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0:25-27,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한다. 정말 그것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예수님을 떠보려는 속셈 때문이었다. 이에 예수님은 율법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되물으셨다. 율법교사는 자신 있게 대답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율법교사는 말씀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613개의 계명 중 가장 큰 계명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언급했다. 이에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자 그런데 이 율법교사는 한 가지 질문을 더 한다.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의도를 가진 질문이었다.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한 질문이었다. 이 율법교사는 왜 이웃이 누구인지 질문했을까? 그가 이웃이 누구인지 몰랐을까? 아니다. 아마도 그는 이웃 사랑에 자신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이 질문을 통해 자신의 이웃 사랑을 증명해 보이는 기회가 되길 원했는지 모른다.

이웃은 히브리어로 ‘레아(רע)’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무나 이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웃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동반자나, 동료나, 친족, 친구들이다. 율법교사의 이웃개념에는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들은 이웃에 포함되지 않았다. 율법교사에게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이웃이라는 경계 밖에 있는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이 율법교사의 질문에서 이 사람이 착각하고 있는 것을 간파하신 듯 하다. 그래서 갑자기 그에게 비유를 말씀하신다. 10:30-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제사장은 왜 강도 만나 거의 죽은 사람을 피해갔을까? 그것은 그가 알고 있는 율법 때문인 듯 하다. 레위기에 이런 말씀이 있다.2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그는 제사장으로서 거의 죽은 것 같은 자를 만짐으로 자신이 부정해지지 않을까 염려했는지 모른다.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레위인은 또 왜 그 사람을 피해 갔을까? 레위인은 일반적으로 유대교에 대한 종교적 열심이 강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섬긴다고 자부했던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포로생활 했다는 것은 너무도 큰 충격이고 상처였다. 그래서 그들은 포로 시대 이후 더더욱 종교적 열심에 매달렸다. 율법을 완벽히 지키기 위해 더 많은 규례와 유전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율법의 본질인 사랑보다는 율법의 형식을 잘 지키는 것이 그들 삶의 목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더 뜨겁게 사랑한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종교인으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특히 예수님 당시 종교적 유대인들 안에는 인과응보 사상이 있었다. 그들은 병든 자, 가난한 자, 불행을 당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벌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버린 자들이니 자신들도 그런 사람들을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비유에 나오는 레위인도 강도 만나 불행을 겪은 자를 하나님께 죄 지은 자로 여겨서 피해간 것이라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세번 째 사람으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신다. 10:33-36,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는 이 예수님의 질문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이에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한 율법교사에게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라고 되물으셨다. 강도 만난 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를 돌보아 준 사마리아 사람이 그의 이웃이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에겐 충격적인 결론이었다. 율법교사는 자신이 정한 이웃의 범위 안에서 이웃 사랑에 대해 자신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율법의 경계 안에 갇힌 지극히 제한된 사랑에 불과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이웃이 되는 그 울타리를 걷어내기 원하셨다. 그리고 그 울타리 밖에 있던 원수들도 이웃으로 초대하기 원하셨다. 예수님에겐 그러한 울타리가 없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의 울타리 밖에 있었던 세리와 창녀와 병자들의 친구가 되셨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경 구절이 나온다.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쉐마’로 시작되는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외우는 기도문이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드리는 기도문이다. 예수님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는 한 서기관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셨다.  12:29-31,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처음 부분에서 신명기 쉐마 말씀을 인용하셨다. 즉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그리고 거기에 레위기 말씀을 더하셨다.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예수님은 첫째 되는 계명에하나님 사랑만이 아니라 이웃 사랑도 덧붙이신 것이다. 그 이유가 뭘까? 그것은 하나님 사랑이 곧 이웃 사랑으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위한 종교적인 열심이 대단해도 우리 옆에 있는 이웃들이 나에게서 사랑을 못 느낀다면 그 사랑은 온전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이웃은 우리가 얼마나 종교적 열심을 갖고 있는 지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얼마나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고, 헌금을 많이 내는지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들에게 전해지는 우리의 사랑을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 지를 평가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는 율법교사처럼 내가 정한 범위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스스로 자부하며 살아온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이번에 남산 한 번 간 걸 두고 두고 좋았다고 얘기하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그동안 교회 일 한다고 가까이서 더 섬겨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사랑은 힘들고도 어렵다. 늘 해도 모자란 게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도전이다. 바울은 말한다.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바울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하기가 더 쉽지 않은 세상을 우린 살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를 상징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각자도생 (各自圖生)’이다. 각자 살 길을 스스로 도모한다는 뜻이다. 코로나로 내일이 불안한 일상 속에서 이제 각자도생은 본인만 살겠다는 이기적인 선택이 아닌, 필연적 흐름이 된 느낌이다. 점점 내가 사랑할 이웃의 범위가 축소되고 있다. 점점 이웃을 사랑하지 않아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 시대가 되고 있다. 그러나 사랑은 영생으로 가는 길이다. 사랑은 성도의 책임이자 특권이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은 요한일서 말씀을 함께 낭송함으로 말씀을 맺고자 한다.

요일 4:7-1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완성하는 우리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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