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8월 7일 설교 이익환 목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 3:13-14)
우리 삶에는 축복과 저주라는 두 개의 원리가 작동한다. 우리 중에 축복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는 축복된 삶을 살기 원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저주의 굴레를 벋어나지 못한 채 불행한 인생을 운명으로 여기며 살아 간다. 축복은 저주를 벗어나야 시작된다. 우리는 어떻게 저주를 벗어나 축복된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인 우리도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며 살기 원하셨다. 아브라함의 복이 뭘까? 성경은 아브라함의 복을 이렇게 말한다.창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아브라함의 복은 무엇을 받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복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으로 인해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복이 되는 약속을 받은 사람, 그 사람은 생각도, 행동도 다를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복’이라는 자존감으로 어디든 갈 것이다. 그 사람이 가는 곳에서 사람들은 그를 축복한다. 혹 그를 시기하며 그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뒷 일을 알아서 처리해주시기 때문에 누구를 원망하거나 원수를 갚는데 마음을 빼앗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저 나 자신은 복이 되는 존재로 살아가는데 전념하면 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아브라함의 복은 그의 후손인 유대인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이 밝히는 것은 아브라함의 복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혁명적인 발언이다.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아브라함의 복의 상속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해당된다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근거가 뭘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본질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바울은 구약 성경에 정통했던 랍비였다. 그런데 그는 창세기의 아브라함 언약에서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창 22:17-18,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다. 그런데 여기서 ‘네 씨(זרעך)’는 복수가 아닌 단수로 씌였다.즉 여기서 ‘네 씨’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언약은 유대인들에게만 배타적으로 허락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이 바로 바울의 주장인 것이다. 즉,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복, 즉 존재가 복이 되는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도 복과 저주의 원리가 나온다. 신 11:26-28,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복과 저주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축복하셔야만 우리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복과 저주는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메카니즘으로 작동한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운명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운명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느냐, 우상을 따르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에 따라 축복을 받을 것인지, 저주를 받을 것인지의 여부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키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이라 당연히 기대했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고난을 당하며 유리 방황하는 시간이 많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율법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 자체를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죄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정죄하는 것이 율법의 기능이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율법 앞에서 정죄 받는다. 즉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갈 3:10-11,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유대인들은 율법에 그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다. 그러나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 역시 율법의 저주 아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저주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우리의 행위는 율법의 저주를 푸는 열쇠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율법 그 자체가 저주를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이 저주를 불러오는 것이다.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성경은 우리를 향한 저주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받으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주받으신 사건은 우리가 저주에서 해방되는 기초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저주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저주 받으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왜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으셨을까? 그것은 율법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시기 위함이다. 여기서 ‘속량’ 이란 ‘값을 치르고 사다, 되돌려 사다’란 뜻이다. 노예의 유일한 희망은 속량 받는 것이다. 누군가가 값을 치르고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주는 것이다. 노예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값비싼 옷을 입어도 근본적으로 행복하지 않다. 신분이 노예이기 때문이다. 노예에게 유일한 희망은 하루 속히 속량 받아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도 하루 속히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 받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받으시고, 죽음으로 죄의 값을 치루심으로 사람들이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 받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이다.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이다. 내가 받아야 할 수치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이다. 내가 내 죄로 인해 당해야 할 고난을 예수님께서 대신 당하신 것이다. 이사야는 그 사실을 이렇게 예언했다. 사 53:4-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 인생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 소망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타락하여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소망이 없다. 끊임없이 죄를 짓고, 죄에 종 노릇 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그 결과 우리는 때로 자기 스스로를 정죄하는 고통에 시달린다. 그렇게 시달리다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사람이 한 번 죽은 것은 정해지 것이고,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저주 받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절망스러울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모든 죄의 세력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가 잘한 것이 없을 지라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의지하고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저주 받으신 이유를 오늘 본문은 또한 이렇게 말한다.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으심으로 이방인인 우리도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되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 베드로는 이렇게 설교했다. 행 2:38-39,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본문은 우리가 누리는 궁극적 복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 복을 온전히 누리려면 우리는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그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성령은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다. 죄와 저주로 상처받기 쉬운 이 세상에서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고 회복하시는 치료의 영이시다. 이러한 성령님과 동행하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다.
코로나로 인해 삶이, 환경이 축복이라는 생각을 좀처럼 갖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의 존재 자체가 축복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처럼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복이 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복이라는 사실을 훼손하려 한다. 그 전략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존재가 거절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지난 날의 상처 때문에 거절감 속에 갇혀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또한 시대가 주는 어려움 때문에 내가 복이라는 존재감을 갖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수록 성경의 진리를 붙들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저주받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저주를 이미 끊으셨다.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심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상속 받는 특권이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이미 주어졌다.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복’임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존재 자체가 복인 자들이 되었다. 사람이, 환경이, 사탄이 우리의 존재적인 부르심을 흔들 수 없다. 바라기는 여러분으로 인해 여러분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되길 소망한다. 내가 어디에 있든 그 곳에서 나 자신이 복이 되는 은혜를 날마다 누리고 나눌 수 있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