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8월 14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44 혼자가 하나 되는 법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4-15)
혼자가 하나 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지난 주간 춘천으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말이 여행이지 거리두기 4단계라 숙소에서만 2박 3일을 보낸 집콕 여행이었다. 올 해 장인 어른이 팔순이었고, 장모님은 희수(77세 생신)를 맞이하셨다. 또한 올해가 두 분이 결혼하신 지 50주년 되는 해였다. 그래서 처남 가족과 함께 깜짝 금혼예식을 두 분 몰래 준비했다. 한복을 입고 결혼하느라 턱시도를 입어보지 못한 아버님을 위해 우리는 멋진 턱시도를 준비했다. 신부 단장을 마치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어머님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금혼서약을 하시며 아버님은 짧고 굵게 한 말씀 하셨다. ‘여보, 미안했소. 사랑하오’ 왈칵 눈물을 쏟으시며 고백하는 아버님의 말씀에 50년의 세월이 담겨져 있었다. 가족 모두 감사와 감동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두 분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의 가정에 사랑의 언약이 깊어지길 기도했다. 또한 매 50년 희년에 이스라엘 백성이 했던 것처럼 서로에게 마음에 빚진 것을 면제해주고 용서하는 다짐을 했다. 혼자였던 두 분이 하나되어 가정을 이루고, 이제 손자들까지 한 마음으로 예배했던 그 시간을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셨으리라 믿는다.
혼자 사는 게 익숙해진 시대이다. 특히 코로나 이후 거리두기로 인해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혼자 사는데 익숙해진 이 시대는 선교지향적인 삶을 사는데 위기의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혼자 사는 것과 하나로 사는 것은 다른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하나로 사는 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선교지향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왜 그런 것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하나님께 한 사람은 너무도 소중하다.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을 만드시고 너무도 기뻐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이 한 사람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 세상에 펼쳐 가기 원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느 날 이렇게 말씀하셨다.창 2:18,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그리하여 하와를 만드셨고, 아담과 하와, 이 둘이 하나 되어 살기 원하셨다. 그러나 사탄은 유혹을 통해 사람 안에 분열의 씨앗을 심었다. 아담과 하와는 그 분열의 씨앗으로 인해 타락한다. 서로 정죄하기 시작한다. ‘너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는 사랑의 고백은 ‘이 여자 때문에’라는 정죄로 바뀌었다. 이후 인간은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 온 세상으로 흩어지고 만다. 한 사람으로 시작되었던 인류는 더 이상 하나가 아니었다. 종족과 민족과 언어가 다른 개인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이처럼 불순종으로 타락한 옛 사람의 영향 아래, 인류는 나뉘고 흩어지는 분열의 역사를 반복해왔다.
세상에 많은 분열의 역사가 있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분열은 뭘까?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분열이다. 성경 역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하나되기 힘든 존재였다. 역사상 여러 이방 민족들이 유대 민족을 진멸하기 원했다. 페르시아의 하만이 그랬고, 독일의 히틀러가 그랬고, 지금도 세계에는 반유대주의 감정이 도처에 퍼져있다. 특히 유대인과 아랍인이 서로 화해한다는 것은 도저히 가능해보이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분열의 역사를 끝낼 비전을 바울을 통해 말씀해주셨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다. 엡 2:14-15,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여러 담들이 있었다. 그 중에 이방인들의 출입을 막는 담이 있었다. 이 담 벽에는 경고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 이 성전에 들어가면 죄값으로 죽임을 당하리라’ 이 막힌 담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생겼다. 사실 유대인이 선택 받은 것은 분열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구별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선민의식으로 인해 구별을 위한 담을 차별을 위한 분열의 담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중간의 막힌 담은 모든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이 분열의 씨앗은 지금도 ‘반유대주의’라는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 가운데 뿌려져 있다. 이 분열의 씨앗은 지금도 ‘인종차별’이라는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 마음에 뿌려져 있다. 이 분열의 씨앗은 또한 ‘계급, 종교,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뿌려져 있다. 그 분열의 씨앗이 자라나면 서로 하나될 수 없는 막힌 담이 생기는 것이다. 그 담 사이로 우리는 내 편과 네 편을 나눈다. ‘나라가 어디냐, 종교가 무엇이냐, 출신이 어디냐’를 물으며 서로를 나눈다. 이러한 분열의 담을 통해 우리는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원수 된 것, 중간에 막힌 담이 허물어질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 마음 속에서 서로를 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분열의 담이 무너질 수 있을까?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때 가능하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원수 된 것,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고 바울은 증거한다. 그동안 차별의 원인이 되었던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예수님께서 폐하셨다고 말한다.그래서 이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님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만들어져 서로 화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 새 사람’이란 표현이 참 독특하다. ‘한 새 사람’은 복수가 아니다. 단수다.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된 우리는 이제 예수님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이 된 것이다. 한 새 사람은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있었던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이었다. 이 한 새 사람 안에는 더이상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를 나누는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한 새 사람 안에는 중국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 아랍 사람이냐가 문제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 새 사람이 된 사람은 선교가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사랑이 모든 차별과 원수 된 것을 뛰어 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새 사람이 된 사람은 적대국에도 복음을 전하러 갈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엡 2:16-18,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서로 원수 되었던 두 그룹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이 가장 보기 원하시는 선교적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나는 텔아비브에서 있었던 한 기독교 집회에서 예수님을 믿는 이스라엘 청년들과 아랍 청년들이 서로 용서를 구하며 기도하는 장면을 보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예수님 안에서 한 새 사람인 것을 아는 것이다. 오늘날 흑인과 백인이 이 한 새 사람의 비전 안에 있다면, ‘Black Lives Matter’란 구호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될 것이다. 지금 미국과 유럽에 있는 사람들이 이 한 새 사람의 비전을 믿는다면 더 이상 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증오는 없게 될 것이다. 여러분에게 이 한 새 사람의 비전이 있다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차별과 분열을 넘어서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 하나 되어 살기를 힘쓰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이 한 새 사람의 비전이 이루어지도록 이천 년 전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 주셨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언어가 통일되었고, 마음이 하나 되는 일이 일어났다. 사람들의 모임은 교회가 되었고, 교회를 통해 사람들은 더 이상 분열된 개인, 혼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세워지기 시작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한다. 각각의 몸의 지체는 누가 더 쓸모 있고 쓸모 없는지, 그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 몸은 나누어지거나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펼쳐 가기 위한 ‘한 새 사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유대인이었다. 그는 유대인의 음식법을 철저히 지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자기 환상을 통해 그의 패러다임을 바꾸셨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 하시며 하나님은 이방인에 대한 베드로의 관점을 바꿔 주셨다. 그 일이 있었기에 유대인을 통해 본격적인 이방인 선교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매주 금요일 욥바교회에서는 샤밧디너를 한다. 우리가 한국에 나와 있는 동안에도 심현정 선생님이 샤밧디너 식탁을 이어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샤밧 저녁 식탁에는 여러 다양한 나라의 친구들이 모인다. 서로 종교도 다르다. 그런데 샤밧 디너는 혼자인 사람들이 하나 되는 시간이다.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 앞에 안식일과 음식 주심에 감사하며 함께 떡을 뗀다. 이 날은 누구도 혼자가 아닌 하나가 된다. 종교와 민족과 언어 때문에 서로 분리됨이나 차별이 없는 하나의 사람이 된다. 이 한 사람 안에는 샬롬과 헤세드로 가득하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쳐갈 한 사람을 찾으신다. 분열로 치닫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화평을 전할 한 새 사람을 찾으신다. 한 새 사람 안에 나란 사람은 없다. 너란 사람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우리가 있을 뿐이다. 오늘도 우리는 혼자 많은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한 새 사람이 된 우리는 더 이상 혼자 사는 자들이 아니다. 하나로 살아가는 자들인 것이다. 바라기는 혼자에서 한 새 사람으로 사는 비전이 여러분에게 회복되기를 바란다.
이 예배가 끝나면 우리 가족은 이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간다. 이번에 짧은 일정과 4단계 거리두기로 인해 많은 분들을 일일이 만나고 가지 못한 게 너무 아쉽다. 그러나 연로하신 우리 아버지와 장인 어른, 장모님과 더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감사했다. 또한 만날 수 있을까 싶었던 승구에게 휴가가 허락되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너무 감사했다. 한국에 와서 많은 제약이 있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채워주신 시간들이라 너무 감사하다. 격려해 주신 분들, 찾아와 주신 분들 너무 감사하다. 영원한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때에 또 다시 만나보게 될 것을 기다리겠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다만 영원을 준비하며 사는 자들이다. 바라기는 우리가 각자 있는 곳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과 함께 맞이 할 영원을 예비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