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포션 45 고난의 은혜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8월 21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45 고난의 은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24)

고은 시인의 ‘그 꽃’이란 시가 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이게 시의 전부다. 우리 인생이 내려갈 때가 있다. 우리는 그 때를 고난의 시기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기에 우리 인생이 올라갈 때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의 인생이 내려갈 때 ‘그 꽃’을 볼 수만 있다면, 인생이 내려가는 것 그 자체는 저주가 아니다. 오히려 고난의 시기가 축복을 예비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로마제국에서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베드로의 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고난이 단지 나를 어렵게 하는 저주가 아니라 은혜의 통로가 되는 비결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벧전 2: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여기서 사환은 집안의 하인을 말한다. 당시 로마는 전쟁을 통해 제국을 이루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전쟁 포로들이 노예가 되었다. 로마제국에서 노예는 60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전체 인구 10%에 해당되는 수치다. 당시 노예 중에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생겼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에겐 고난의 시작이었다. 예수님을 자신들의 구주로 영접한 노예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했다. 노예 신분으로 로마제국과 주인의 종교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박해와 고난을 감당해야 하는 선택이었다. 베드로는 이러한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고난에 직면해 있는 노예들을 격려하기 위해 편지를 쓴 것이다.

베드로는 가정의 주인을 섬기는 노예들에게 그들의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주인 위에 세우신 권위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내 위에 권위자를 하나님이 세우셨다면 우리는 그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베드로는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순종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주인을 두려워하라는 말이 아니다. 두려워하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표현하는 말이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하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어서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덧붙인다. 여기서 ‘까다로운’은 공동번역에서 ‘고약한’으로 번역한다. 주인 중에는 물론 선하고 관용적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약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잘해주는 상사에게 순종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고약한 상사에게 순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좋은 주인이든 고약한 주인이든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는 순종이 주인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던 사람이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어서 말한다. 벧전 2: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내가 잘못한 것이 있을 때 당하는 고난은 우리가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다면 우린 참기 힘들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한 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말은 헬라어로 ‘카리스’, ‘은혜’라는 말이다. 하나님 때문에 고난을 참으면 그것이 은혜라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누가 나에게 고약하게 구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고난 당하고 있는 현재의 환경과 나를 괴롭히는 상사만 본다면 우리는 그 상황을 참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부당한 고난을 참을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요셉만큼 부당하게 고난 받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았다. 그는 그의 인생이 내려갈 때 하나님을 주목했고, 그 결과 그의 인생이 다시 올라가는 때를 맞이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의 인생이 내려가든, 올라가든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과 동행 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의 때에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을 수 있다는 것은 은혜 중의 은혜인 것이다.

베드로는 이어서 말한다. 벧전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는 것,’ 이것은 자발적인 것이다. 고난 받을 것을 알고도 그 고난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성도의 고난은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고난 당할 것을 알고도 그것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렇게 당하는 성도의 고난을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고난이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성도의 부르심이라고 말한다.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지금 세상은 물질 숭배로 가득하다. 교회 역시 물질 만능과 성공지상이라는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고난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불필요한 것이 된다. 세속 사회에서 고난은 그저 우리 인생을 가로막는 걸림돌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 역시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난을 위해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한다. 고난이 성도의 소명이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본’이란 헬라어로 ‘휘포그람모스’다. 이것은 글씨를 베껴 쓰기 위한 사본을 말한다. 예수님의 본을 따라 그 고난의 자취를 그대로 베껴 쓰는 삶이 바로 성도가 가야할 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십자가를 지셨다. 부당한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그 부당한 고난에 순종하셨다. 오늘 본문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벧전 2:22-23,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우리는 고난에 대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 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난 당하신 게 아니다. 부당하게 고난 당하신 것이다. 그는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다. 고난을 당하시되 그 고난에 복수하겠다고 위협하지 않으셨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판단을 넘기셨다. 고난의 때에 우리는 예민해진다. 그 고난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따진다. 그리고 그 고난의 원인 제공자에게 앙갚음하고 싶어하는 심판자가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심판의 권한을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넘기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허락된 고난을 피하지 않으셨다. 그 고난을 선택했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십자가를 감당하셨다. 그것이 은혜였다. 우리 역시 고난을 감당할 때 ‘은혜’라는 개념이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고난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그 은혜가 있을 때 우리 역시 고난을 넉넉히 견뎌내며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이 결국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말한다. 벧전 2:24-25,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우리를 의인으로 살리려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우리를 낫게 하려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신 것이다. 길 잃은 우리들을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 되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나무에 달리신 것이다.

여기 25절의 말씀은 이번 주 토라포션인 신명기 말씀을 염두에 둔 것이다. 21:22-23,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날에 장사하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처형 당해 이미 죽은 사람을 나무 위에 달아둔 것은 죽은 자에게 모욕과 수치를 더하기 위함이다. 또한 여러 사람들에게 죄의 대가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기 위함이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상징했다. 그래서 나무 위에 달려 죽는 것은 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수치스런 죽음이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기꺼이 그러한 고난과 죽음을 선택하셨다. 예수님은 고난을 피하지 않으셨다. 십자가를 지는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한 것이다. 고난을 선택한 예수님의 순종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고난을 극복했기에 그것이 은혜의 통로가 된 것이다.

여러분의 삶이 지금 어떠한 고난 가운데 있다면 그 고난을 대하는 여러분의 태도를 점검하기 바란다. 고난으로 인해 여러분의 인생이 내려갈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려간 자리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그 고난을 참을 수 있다면, 여러분에게 허락된 고난은 더이상 저주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저주에서 구원하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르셨다. 하나님의 저주가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나무에 달려 모든 모욕과 수치를 받으셨다. 그리고 우리가 지불해야 할 모든 죄와 저주에 대한 대가를 대신 지불하셨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은 것이다.

성경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실제라고 말한다. 그것이 영원한 것이라고 말한다. 고후 4:17-18,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세계가 전부 인줄 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에서 물질을 얻고 성공하는데 온 관심을 기울인다. 보이는 세계에서 복을 누리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이 영원한 것이다.

혹 여러분이 지금 보이는 세계에서 고난 가운데 있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붙들라는 하나님의 초대이다.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자 되신 하나님 앞에서 그 고난의 시간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길 바란다. 바라기는 그 고난을 기꺼이 감당함으로 우리 삶에 하나님의 은혜의 문을 여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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