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포션 46 기쁨의 기술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8월 28일 설교 이익환 목사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4:4-5)

김종삼 시인의 ‘어부(漁夫)’란 제목의 시 한 편 소개하겠다.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시는 희망적이다. 어부의 삶이 그렇다. 많은 출렁거림 속에 늘 부대끼는 삶이다. 시인은 노래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기적이다, 살아온 것이 기적이라면 살아갈 날도 기적이 될 것이다, 그렇게 살다 보면 많은 기쁨이 있을 것이다’라고 희망을 노래한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 우리가 가장 많이 빼앗긴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쁨’이다. 많은 분들이 기쁨 대신 ‘코로나 블루’를 경험하고 있다. 이전에 일상 속에서 누리던 작은 기쁨들을 지금은 누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좀더 사노라면 또다시 많은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오늘 본문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기쁨을 잃어버린 듯하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기뻐하라’고 명령한다. 바울은 왜 이런 명령을 빌립보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걸까? 우리도 바울의 기뻐하라는 명령을 따른다면 기쁨을 회복할 수 있을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빌립보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도 찬송했던 곳이다.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면서 놀란 간수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질문했던 곳이다. 그 때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선포했다. 빌립보 교회는 이런 과정을 통해 세워졌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바울은 그들이 주 안에 굳건히 서기를 원했다. 믿음 위에 온전히 서지 못하면 그들을 흔드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쉽게 기쁨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우리는 이 구절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기쁨을 빼앗긴 원인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사람이 서로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고 분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빌립보 교회의 핵심 인물로 여겨진다. 이 둘 사이가 갈라지면서 그들과 각각 친했던 사람들 역시 갈라졌을 것이다. 분열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자리 잡기는 힘든 것이다.

4:3, “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도우라’고 권한다. 바울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음을 강조한다. 서로 싸우고 있는 그들이지만 그들 역시 구원받은 백성임을 기억하고 그들을 도우라는 것이다.

4:4, “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바울은 여기서부터 직접적으로 기뻐하라고 명령한다. 감정을 명령한다는 게 좀 특이하다. ‘기뻐하라’는 명령을 따른다고 감정이 쉽게 달라질 수 있을까? 바울에 의하면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기쁨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기에 바울은 그것을 취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싸움에도 싸움의 기술이 있다. 바울의 편지를 잘 보면 기쁨을 회복하는데도 기술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바울이 전하는 기쁨의 기술, 첫번째는 기쁨의 원천을 찾으라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명령한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기쁨의 원천을 밖에서 찾는다. 돈, 명예, 외모 때문에 기뻐한다. 그런 것이 기쁨의 기초라면 그 기쁨은 외부 환경의 변화에 의해 쉽게 사라지고 만다. 돈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명예와 외모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가진 자를 보면 내가 그동안 누려왔던 기쁨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바울은 유대인이었다. 율법의 의로 흠이 없던 바리새인이었다.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었다. 그의 출신과 그가 쌓아 올린 명예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기뻐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겼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쌓아 온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기쁨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울은 주님 안에서 최고의 기쁨을 발견했던 것이다. 시편 기자도 노래한다. 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님 안에서 영원한 기쁨을 발견했다. 기쁨의 원천은 세상의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 안에 있는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기쁨의 기술, 두번째는 관계 속에서 기쁨을 찾으라는 것이다.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여기서 ‘관용’은 헬라어로 ‘에피에이케스’ (ἐπιεικὲς)이다. 그 뜻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에 대한 나쁜 감정을 절제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상대방을 너그럽게 받아주고 친절을 베푸는 행위’를 말한다. 상대방에게 이런 관용을 베풀 때 서로 같은 마음을 품게 되고, 상대방도 자신도 기쁨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관용은 말처럼 쉽지 않다. 우리는 관용보다는 판단과 정죄에 익숙하다. 특히 요즘 젊은 세대는 다른 사람에게 관용하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기쁨을 찾기보다는 자기가 몰입할 수 있는 게임과 오락에서 단발적인 기쁨을 찾는 것 같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 분위기가 경직되다 보니 서로에게 관용을 베푸는 모습을 더욱 찾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바울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명령한 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덧붙인다. 주님이 항상 우리 가까이 계심을 인식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은 분열과 대결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너그럽게 받아주고 나쁜 감정을 절제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기쁨의 기술, 세번째는 기도로 기쁨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우리 영혼은 무풍지대가 아니다. 순간 사이에 근심하고 염려할 일들이 밀려 온다.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우리는 근심과 염려 대신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기도는 우리 마음에 평강이 임할 때까지 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임해야 우리는 비로소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기도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내야 우리는 상황과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서도 ‘기뻐하라’는 명령이 나온다. 26:11,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여기서 기쁨이라는 히브리어 명사 ‘씸하(שמחה)’가 즐거워하라는 명령형 동사로 쓰였다. 다른 신명기 말씀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8:47-48,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것이니 그가 멍에를 목에 메워 마침내 너를 멸할 것이라 여기서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란 표현이 나온다. 히브리어 ‘씸하’가 ‘기쁨’이라는 명사로 사용되었다. 자 그런데 특이한 것은 ‘씸하’가 저주 계명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며, 그가 철 멍에로 너를 멸할 것이라’ 이 모든 저주가 일어나게 되는 이유는 바로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좀 황당하다. 기쁨 없이 사는 게 삶의 최선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기쁨을 잃고 산다고 그것이 저주받을 일이거나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과 즐거운 마음을 잃어버렸을 때 주리고, 헐벗고,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성경에서 ‘씸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씸하는 성경에서 ‘기쁨, 즐거움, 행복’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씸하는 번역으로 옮길 수 없는 미묘한 의미가 있다. 기쁨, 즐거움, 행복은 모두 개인이 홀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런데 씸하는 개인적인 감정만이 아니다. 그것은 ‘공유된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며 느끼게 되는 감정이 바로 ‘씸하’인 것이다. 신명기 본문에서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것은 첫 소산을 드리는 즐거움에 아무도 예외 되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 받은 백성들의 사회적 책임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을 개인적 차원에서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추구해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 이스라엘이 그 사명을 놓친다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강하게 경고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개인의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는 사회 속에서 산다. 그런데 행복과 번영을 추구할수록 우리는 자신의 행복과 번영을 확장하는데 더욱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덜 가진 사람들이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된다. 사회가 그러한 방향으로 간다면 그 사회에서 ‘씸하’는 사라지게 된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누리는 기쁨과 행복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 사회는 물질적으로 번영을 이루었을 지는 모르지만, 함께 망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신명기서는 그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씸하는 내가 얼마를 가졌는가에 따라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많이 벌어서 많이 쓰기 때문에 커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과 나눌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바로 ‘씸하’인 것이다.

교회인 우리는 나만의 행복과 기쁨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기쁨을 추구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세상과 함께 나누며 즐거워해야 할 사명이 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 사회 속에 기쁨이 사라지고 있음을 우리는 느끼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외적인 환경이 우리를 흔들지 못하도록 더욱 주안에서 굳건히 서야 한다.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가지며, 서로 돕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우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해야 한다. 전심의 기도를 통해 환경과 사람이 주는 염려로 인해 기쁨을 빼앗기지 않게 해야 한다. 바라기는 기쁨의 기술을 사용하여 나의 삶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 기쁨을 확산하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세상 속에서도 심어지고 열매 맺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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