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9월 11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48 믿음의 동역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히 11:11-12)
유대인들이 새해 첫날 읽는 성경구절이 있다. 하나는 사라가 이삭을 낳은 이야기다. 다른 하나는 한나가 사무엘을 낳은 이야기다. 유대인들은 새해 첫날 우주의 창조가 아니라 한 아이의 탄생에 대해 읽는다. 이 두 탄생 이야기의 공통점이 뭘까? 그것은 불임의 여인이 오랜 기다림과 믿음의 기도 끝에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실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돌보시고 기억하셨기 때문에 이 아이들의 탄생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 두 본문을 읽는 목적이다. 잠시 그 본문들을 살펴보겠다. 창 21: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여기 ‘사라를 돌보셨다’는 표현에서 ‘돌보셨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파카드(פקד)’다. ‘방문하다’는 뜻이다. 불임이었던 사라가 기적적으로 아이를 가지게 된 데는 하나님의 방문, 즉 하나님의 믿음의 행위가 먼저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사무엘의 탄생 이야기도 보겠다.삼상 1:19-20,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여기 ‘여호와께서 한나를 생각하신지라’에서 ‘생각하다’는 히브리어로 ‘자카르(זכר)’다. ‘기억하다’라는 뜻이다. 불임이었던 한나가 기적적으로 아이를 출산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먼저 그녀를 기억하셨기 때문인 것이다. 모든 존재의 탄생은 이렇게 하나님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다. 하나님이 기억해 주셔야 인생은 의미가 있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를 맞이하지만 하나님이 기억해주시는 인생이 되어야 새 해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억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탄생은 기적이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의 존재가 기적인 것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라를 어떻게 돌보셨는지, 그래서 어떻게 사라가 믿음의 사람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사라를 믿음의 사람으로 소개한다. 히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것은 사라라는 한 여인의 인생 결론이다.사라는 후세대 성경 기자에 의해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우리가 아는 사라는 믿음의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사라는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남편과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난다.물론 우리는 이것을 믿음의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큰 민족을 이루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사라가 가나안 땅에 온지 14년이 지나도 이루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이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라는 자신이 출산하지 못하자 하갈을 남편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준다. 이것은 믿음이 없는 행위였다. 그로부터 또 13년이 지난다. 이번엔 하나님의 사자가 사라를 방문한다. ‘내년 이맘 때 아들이 있을 것이다’란 그의 말을 장막 문 뒤에서 듣고 사라는 웃는다. 사라는 여전히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불신하고 있었다. 불신할 만 하다. 이 당시 사라의 나이가 90세였기 때문이다. 사라는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창세기 21장에서 사라는 임신하게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기록한다. 단산은 늙어서 아이를 못 낳는 것이 아니다. 젊었을 때에도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말이다. 도저히 출산이 불가능했던 사라는 어떻게 해서 자신이 임신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 도대체 창세기 21장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창세기 19장에서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창 19: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셨다’에서 ‘생각하다’는 히브리어로 ‘자카르(זכר)’다. ‘기억하다’라는 뜻이다. 도시가 멸망해도 하나님이 기억해주시면 살아남는 것이다. 사라는 심판 중에도 생명을 주관하시고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다음으로 창세기 20장에서는 아비멜렉 사건이 벌어진다. 하나님이 사라를 보호하시기 위해 아비멜렉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다가 다시 출산하게 하시는 일이 있었다. 창 20:17-18,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사라의 믿음은 이 일 뒤에 생긴 것 같다. 즉 사라는 하나님이 태를 닫으실 수도 있고, 열 수도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경험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사라가 잉태할 수 있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은 그녀가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미쁘다’는 것은 ‘신실하다’는 말이다. 신실함은 말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사라의 삶을 통해 하나님은 그분이 하신 약속에 책임을 지신 분이었다. 의심 많았던 사라는 결국 이 신실하신 하나님께 설득되어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결국 믿음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이시다. 한 인간이 하나님이 갖고 계신 믿음에 눈 떠가는 과정이 바로 믿음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사라는 분명 믿음이 있어서 아들에 대한 약속을 받은 것이 아니다. 믿음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왜 하필 불임이라는 인간적으로 소망이 없는 가정을 선택하셨을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상식과 셈법을 뛰어넘어 오직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창 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정을 통해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시려고 그들을 택하셨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어가시기 위해 그들을 틈틈이 방문하여 약속을 주시며 그들의 믿음을 일으키신 것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을 위해 달려간 삶이었다. 그들은 믿음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들의 장막으로 사람들을 환대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며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와 공도를 세워갔다. 세상은 이런 아브라함과 사라가 필요했다. 세상은 지금도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하나님의 의와 공도를 세워갈 믿음의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유대 문헌 미쉬나에 의하면 하나님은 매해 로쉬 하샤나에 세 권의 책을 펼친다고 한다. 각 사람의 행실에 따라 세 권의 책에 각 사람의 이름을 기록한다고 한다. 의인은 즉시 생명책에 적혀 ‘영원히 살 것’이라고 기록된다. 악인은 즉시 사망자 명단에 기록된다. 의인도 악인도 아닌, 중간에 속한 사람에겐 대속죄일까지 열흘 간의 유예기간이 주어진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 중간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 생명책에 기록되기 위해 이 기간 동안 본격적으로 참회한다. 서로 용서를 구하고 구제 헌금도 많이 낸다. 이 열흘 간의 기간이 바로 야밈 노라임, 즉 ‘경외의 날들’이다. 유대인들에게 이 열흘은 자신의 미래 운명이 달렸기에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올해의 사망자 명단에 기록된다면 그에겐 다음 로쉬 하샤나가 없는 것이다.
히브리 성경에서 유대인 신년은 ‘욤 테루아(יום תרועה)’라고 표현되어 있다. ‘나팔을 부는 날’이란 뜻이다. 그리고 14일뒤인 욤 키푸르, 대속죄일은 생명책이 닫히고,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는 날이다. 의인은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고, 악인은 영원한 사망으로 나아가는 날이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께서 나팔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재림하실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예수님이 흰 보좌에 앉아 최후 심판하실 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지키는 이 가을 절기는 이처럼 장차 우리가 듣게 될 재림 나팔소리와 우리가 맞이 할 최후 심판에 대해 미리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절기를 통해 하나님의 시간표를 읽어야 한다. 유월절 오순절과 같은 봄절기의 의미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성취되었다. 그런데 가을 절기의 의미는 이제 장차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성취 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한다. 사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계시는 분인데,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는 과연 언제일까? 랍비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씨름했다. 그들의 결론은 이 열흘 간의 경외의 날들이 바로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그를 찾고, 그를 불러야 할 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신다. 시간과 공간의 굴레 안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그 방법은 바로 ‘믿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믿음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서 태초부터 계셨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성경은 말한다. 요일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코로나 때문에 불안을 느끼는 지금 우리는 그보다 더 근원적인 불안을 느껴야 한다. 즉 과연 나는 이 영원한 생명이 소유하고 있는지, 만약 없다면 그 사실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다.
불안한 시대를 우리는 지금 통과하고 있다. 생존에 대한 염려로 불안한 하루 하루를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다. 죽음의 무덤을 열고 거기서 우리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의 생명과 사망을 결정하는 분도 바로 하나님이시다. 한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했다. 삼상 2:6-7,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한나 역시 아이를 갖지 못해 괴로웠던 여인이었다.그러나 한나는 그의 괴로운 일상을 다른 것으로 보상 받으려 하지 않았다.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 자신이 가장 괴로웠던 문제인 불임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아들을 주시면 그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다. 한나의 간절한 기도는 결국 하나님이 한나를 위해 일하시기 위한 도구였다. 이 기도가 없었다면 한나의 일상은 운명에 지배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나는 불가능 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 기도는 한나를 둘러 싼 운명의 그늘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기도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 그녀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한나를 기억하셨고, 때가 되어 아들 사무엘을 출산케 하셨다. 결국 한나는 믿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동역했던 것이다. 즉, 아들 사무엘을 낳음으로 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영적으로 새롭게 하는 역사를 열었던 것이다.
다음 주 15일 욤키푸르 때까지 아직 ‘경외의 날들’이 남아 있다. 이 기간에 우리도 기도하며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감각을 깨우길 원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믿음의 세계로 초대하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믿음에 반응하여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와 공도를 세워갈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우리는 사라처럼 여전히 의심 많은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이 아니어도 우리를 믿음의 세계로 이끌기 원하신다. 이 믿음의 초대에 응하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의 믿음에 설득되는 것이 복이다. 믿음의 사람만이 갈 바를 알지 못해도 걸음을 옮길 수 있다. 믿음의 사람만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믿음의 사람만이 모두가 불안한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워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상식과 우리의 셈법을 뛰어 넘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결국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에 동역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