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9월 18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49 자족의 유익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전 6:6-8)
93세의 할아버지가 코로나에 걸려 입원했다가 간신히 살아났다. 병원에서 퇴원할 때 그는 매우 큰 액수의 청구서를 받았다. 그 중 일부는 그가 하루 동안 착용한 인공호흡기 이용료였다. 지불해야 할 금액을 보고 나서 노인은 울기 시작했다. 병원 직원은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여기며 말했다. “할아버지 너무 걱정마세요.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내야 할 돈 때문에 우는 게 아닙니다. 감사하게도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어요. 난 다른 이유 때문에 우는 거예요. 내가 이 땅에서 보낸 세월이 93년입니다. 그동안 나는 하나님이 주신 공기를 마셨지만 그 값을 치러야 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우는 거랍니다. 병원에서 인공호흡기를 사용하려면 하루에 500 유로가 넘네요. 나는 하나님께 얼마나 빚지고 있는걸까요? 당연하게 여겼던 이 기적 같은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 나는 왜 평생 그분께 진정으로 감사하지 못했을까요?” 노인의 이 말이 그곳에 있던 병원 직원들을 울게 만들었다고 한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의 일상이 멈추고 나니 우리가 그동안 당연히 누려왔던 것들이 얼마나 기적같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습관처럼 우리에게 없는 것, 부족한 것에 대해 불평하지, 하나님의 값없는 축복에 대해서는 좀처럼 감사하지 않는다. 20세기 미국의 철학자 에릭 호퍼는 이런 말을 했다. “The hardest arithmetic to master is that which enables us to count our blessings. 터득하기 가장 어려운 산수는 우리가 받은 축복을 셀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가장 어려운 산수를 마스터 해보고자 한다. 우리가 받은 축복을 셀 수 있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딤전 6: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손해보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이 일이 나에게 득이 될 것이지, 해가 될 것이지를 따져가면서 철저히 이득이 될 일만 하려고 한다.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경건이 큰 이익이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경건’이 뭘까? 경건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을 말한다. 과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일까? 그런데 바울에 의하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자족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족하는 마음은 뭘까?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경건한 삶을 이렇게 표현한다. “It is the rich simplicity of being yourself before God.” 한국어 번역은 이렇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대 자신이 됨으로써, 단순한 삶 가운데서 누리는 넉넉함입니다.” 이 표현에 의하면 자족하는 마음은 단순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단순함보다는 삶이 복잡해지더라도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삶을 살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 마주하는 광고와 주변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 내가 받은 복을 세기 보다는 내가 받아야 할 축복의 목록을 작성하기 바쁜 것이다.
바울은 이어서 자족해야 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딤전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 인생이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뜻이다.알렉산더 대왕이 죽기 직전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내가 죽으면 들어갈 관의 양쪽 옆에 구멍을 내라. 그리고 내 양손을 관 바깥쪽으로 내밀어라” 세계를 정복했던 제왕도 죽을 때는 빈 손임을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왕으로 모든 것을 누려봤던 솔로몬의 인생 결론도 이렇다. 전 5:15,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경건을 추구했던 내 영혼 뿐이다. 우리가 경건을 뒷전으로 하고 내 욕심만 추구하며 살았다면 하나님 앞에서 남는 것은 부끄러운 구원일 뿐이다.
바울은 그저 부를 멀리하고 가난하게 살아야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물질에 휘둘리지 말고 자족하는 삶을 살아야 그것이 경건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자족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그 속에서 만족하는 것을 말한다. 자족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것으로 인해 남과 나를 비교하거나 스스로 절망하지 않는다. 자족할 수 있는 사람은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 한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빌 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어떻게 이러한 삶이 가능할까?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말하고 있다.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모든 일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배고프고 궁핍할 때도 ‘자족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가 아니다. 자기 절제와 수양을 통해 도달하는 경지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삶의 만족은 무소유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을 주님 안에서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일도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을 불만족스럽게 사는 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닌 것이다.
바울은 이어서 자족하는 삶을 위한 실제적인 조언을 한다.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바울은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라고 말한다. 요즘같은 세상에서 여러분이라면 단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최신 스마트폰이 없어도 만족할 수 있을까? 남들이 가진 좋은 집과 자동차가 없어도 만족할 수 있을까? 그것은 요즘같은 물질만능 사회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다. 모세도 힘든 광야 시절을 끝내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신 8:11-14,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성경은 풍요가 잘못된 것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풍요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모세는 다만 풍요에 취해 풍요가 우선순위가 되어선 안된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풍요가 우상이 되어선 안되고, 하나님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해 염려하는 삶이 되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삶의 우선순위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될 때 우리는 나의 풍요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경건한 삶을 살게 된다. 이처럼 경건한 삶이 목표가 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 그래서 경건은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사실은 큰 유익이 되는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묘사하는 장면이 있다. 신 32:10-12,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강하게 훈련시키셨다. 어미 독수리가 아직 날 수 없는 새끼 독수리를 둥지에서 떨어뜨리는 것은 그들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던지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뚝 서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힘들어할 때 그들을 업어 인도하셨고, 위험한 광야에서도 그들을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다. 하나님은 여러분도 광야로 인도하실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광야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외면하는 장소가 아니라 여러분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주시는 장소인 것이다.
이제 월요일이면 초막절이 시작된다. 유대인들은 해마다 초막절에 수카를 짓고 거기서 일주일 동안 지낸다. 그들 조상들의 광야생활을 기억하는 것이다. 광야에서 그들은 소유를 위한 삶을 살 수 없었다. 그들이 유일하게 가진 것이 있다면 초막 사이로 보이는 불기둥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가나안으로 이끄실 것이라는 소망 하나였다. 그들은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며 그 막막한 광야를 통과했던 것이다.
우리는 한 해를 살면서 기쁨보다는 슬픔이라는 감정에 더 자주 사로잡힌다.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불만을 만들어내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남들이 소유하는 것을 내가 소유하지 못할 때 슬픔을 느낀다. 그리고 너무도 쉽게 감사를 잃어버린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초막절은 불만과 슬픔의 장막을 거두고 기쁨의 장막에 살라는 초대다. 허름한 초막 안에 누우면 내가 남들보다 더 갖고 덜 갖은 게 중요하지 않다. 광야와 같은 시절도 이러한 장막을 치고 통과했음을 기억하게 된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함께 어디든 갈 수 있다는 희망을 다시 붙잡게 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초막절을 지키며 극심한 고난이 주는 슬픔을 잊었다. 광야와 같은 환경속에서도 결국 자신들을 인도해내실 하나님을 소망했다. 그래서 초막절은 그들에게 그들의 환경과 상황에 관계없이 가장 큰 기쁨의 절기가 된 것이다.
초막은 한 자리에 눌러 살기 위해 짓는 집이 아니다. 임시로 거주하기 위해 짓는 것이다. 하나님이 움직이라고 하시면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언제든지 재배치할 수 있는 게 초막이다. 초막에서 우리의 인본주의는 발동될 수 없다. 하나님의 절대 기준, 신본주의만 남게 된다. 초막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내가 움직이겠다’는 절대 신뢰의 상징이다. 초막에서 우리는 이 세상이 본질적으로 나그네 길 임을 알게 된다. 잠시 텐트치고 지나가는 곳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초막에서 우리가 돌아갈 영원한 본향집이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도 허름해 보이는 초막은 사실 ‘영원(eternity)’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여러분의 삶이 소유하고, 쌓아 놓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삶이 되길 바란다. 많은 것을 쌓아 놓고도 정작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삶이 아니라, 여러분이 사는 곳이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시는 초막이 되길 바란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하나님 한 분보다 내게 번영과 성공을 가져다 주는 것에 눈이 돌아가는 시대다. 그러나 풍요롭고 안정된 삶, 그 자체는 우리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을 추구하다가 정작 하나님을 놓치고, 다른 것이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버린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에 감사를 잃어버리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내 삶에 감사를 회복하는 것은 한 가지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세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 하나님 안에서 자족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자들이 아니다. 잠시 빈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장차 완성될 영원한 하나님 나라 도성을 바라보며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다. 바라기는 초막절을 통해 우리 삶의 장막에서 ‘주님 한 분이면 족하다’는 고백이 회복되길 원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경건이 가장 큰 유익이 되는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