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9월 25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50 말씀의 분별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15)
오늘은 신약포션 마지막 시간이다. 1년 간의 토라포션이 끝나고 새로운 토라포션이 시작되는 사이에 우리는 있다. 인간(人間)은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속에 사는 존재다. 공교롭게도 이 세 단어에는 모두 ‘사이 간(間)’자가 들어 있다. ‘사이 간(間)’ 자는 문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형상화 한 글자다. 시간과 시간 사이, 공간과 공간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이 사이에서 인생의 차이가 결정되는 것 같다. 오늘 본문인 디모데후서에는 바울과 디모데가 나온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분명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나는 삶을 살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오늘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때는 주후 67년경이었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혀 에베소에 있는디모데에게 편지한다. 바울은 생을 마감하고 있었고, 젊은 디모데는 바울의 뜻을 이어 사역의 전성기를 준비해야 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생(生)과 사(死)의 사이에서 유서처럼 디모데에게 남긴 편지인 것이다. 바울은 어떤 말을 가장 남기고 싶었을까? 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보자. 딤후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정확하게 깨닫고 가르치는 사람이 될 것을 부탁하고 있다. 그 이유가 뭘까? 그것은 디모데가 당시 교회를 흔들고 있던 거짓교사들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그 위험을 이렇게 지적한다. 딤후 2:16-18,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당시 에베소와 고린도 등에서 성장하고 있던 교회는 교회 안에 침투한 영지주의 이단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었다. 영지주의는 한마디로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이원론이다. 그들은 육신이 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왔다는 기독교의 진리를 거부한다. 당연히 그들은 그리스도의 육체적 죽음과 부활도 믿지 않는다.
사도 요한은 당시 영지주의의 영향으로 흔들리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편지했다. 요일 4:1-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성경은 결코 육체를 경시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여자의 몸에서 나셨다. 십자가 위에서 몸이 찢기는 아픔을 겪으셨다. 그리고 몸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장차 몸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몸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다. 몸의 부활도 함께 이루어지는 전인적인 구원인 것이다.
죽음을 앞둔 바울은 이제 더이상 직접 흔들리는 교회를 지켜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영적 아들 디모데가 이러한 상황에 맞서서 진리를 분별하고 가르치는 말씀의 지도자로 세워지기 원했다. 그리하여 교회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영지주의 이단을 막고 그 공간을 진리의 빛으로 가득 채우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디모데에게 거듭 당부한다. 딤후 3:13-15,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을 더욱 확실하게 배울 것을 주문한다. 이 권면에 따라 디모데는 바울이 떠난 시간 사이를 성경의 진리로 채웠다. 헬라 철학과 영지주의 이단으로 가득했던 에베소라는 공간에 진리의 빛을 비추었다. 그리하여 몸의 부활을 믿는 기독교의 진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전해지게 된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모세가 그의 생을 마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의 삶의 대부분은 광야였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그에게 허락된 공간이 아니었다. 모세는 광야와 가나안 사이에서 그의 마지막 사명을 완수한다. 그것은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우는 것이었다. 신 34: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여호수아는 이제 모세에게서 신적 권위를 넘겨받아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된다. 그는 모세의 안수로 백성들을 인도할 지혜의 영으로 충만하게 된다. 유대인 랍비들에 의하면 당시 갈렙의 아우 옷니엘과 비느하스가 여호수아보다 학문적으로 탁월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여호수아가 모세를 잇는 지도자가 되었을까? 유대인 랍비들은 그 이유를 출애굽기 33장에서 발견한다. 출 33: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여호수아는 결코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모세와 다른 제자들이 오기 전에 의자를 세팅하고 그들이 떠난 후에도 그곳에 남아 자리를 정리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비록 모세에게 더 재능 있는 추종자들이 있었지만, 여호수아가 하나님에 의해 모세의 후계자로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탁월함보다는 꾸준함, 그리고 스승 모세에게 헌신하며 삶으로 배웠다는 점이 다른 사람과 구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결코 평안할 때 지도자로 세워진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불안지수가 가장 높았을 때 세워진 지도자였다. 이제 그는 가나안 전쟁을 이끌어야 했다. 그의 전임자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났던 자였다. 그런 모세가 죽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평지에서 30일을 애곡했다. 그리고 이제 슬픔에 잠긴 250만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지도자로 여호수아가 세워진 것이다. 위대한 전임자의 뒤를 잇는 것 만큼 부담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여호수아는 두려웠다.
이러한 때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라”(수 1:2) 이어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희한한 주문을 하신다. 수 1: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하나님은 최고 군사지도자인 그에게 최신 병기를 들려주신 것이 아니라 토라를 지키라고 명령하신다. 토라를 다 지키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않으면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이다. 이것은 가나안 정복이 군사력의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말씀의 순종 여부, 즉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승리의 관건임을 말해준다. 가나안은 결코 빈 공간이 아니었다. 바알 숭배로 가득한 곳이었다. 물리적인 전쟁 이전에 치열한 영적 전쟁이 기다리고 있던 곳이었다. 바알 신앙은 풍요와 번영을 숭배하는 종교다. 가나안은 요즘으로 말하면 권력과 돈과 성의 유혹이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공간에서 필요한 지도자는 권력의 꼭대기에 오른 자가 아니었다. 말씀을 분별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주변의 세상이 우리를 흔들 때 요동하지 않고 달려갈 수 있는 능력은 오직 말씀에서 나온다.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말씀을 가까이 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기록된 말씀은 여호수아에게 능력이 되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수 1:8-9,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여호수아는 모세 이후 흔들렸던 시간을 말씀의 능력으로 채웠다. 바알 숭배로 가득했던 가나안이라는 공간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말씀을 따라 걸었다. 그리하여 그는 시간과 공간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다음 세대에도 전달할 수 있었다.
이번 추석에 ‘오징어게임’이란 드라마가 화제였다. 한국 드라마 최초로 넷플릭스 세계 1위를 차지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드라마 순위에 어떤 것들이 있나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제목과 타이틀만 봐도 자극적인 것들이 많았다. ‘여기가 가나안이구나.. 이제는 문화전쟁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교회와 기독교인에 대해 안 좋게 묘사한 장면이 꽤 있었다고 한다.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젊은 세대들은 교회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하게 되는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넷플릭스 가입자들이 전 세계적으로 엄청 늘었다. 집콕생활이 늘면서 사람들이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시청하는 시간들이 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현실세계보다 가상세계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울고 웃는다. 코로나 이후 이러한 사이버 공간이 우리 세대가 발을 들여 놓은 가나안 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호수아처럼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진리를 놓쳐버리고 시대의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는 영적 전쟁터라는 생각이 든다.
사이버 공간은 몸으로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 탈신체성이 특징이다. 몸을 중요시 여기지 않았던 영지주의가 부활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사이버 공간인 것이다. 여기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며 서로 신뢰하며 책임지는 관계로 자라갈 수 없다. 사이버 공간에서는 다양한 부캐릭터를 만들며 실제 나와는 다른 환상 속의 자아를 복제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만들 수는 없다. 여기에 교회의 위기가 있다. 교회는 모임을 통해 자라가는 유기적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요즘 언택트 사회가 앞으로 인류가 받아들여야 하는 뉴노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교회가 해체되기를 원하는 신영지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 교회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물론 바이러스의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교회의 모임은 제한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몸 안에서의 연합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비상 시기 동안에는 교회가 잠시 언택트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다시 몸으로 참여하여 성찬을 나누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단과 적그리스도의 영은 오늘도 인간(人間)과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의 틈을 노리고 있다. 바라기는 우리 손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져 그 틈 사이를 메울 수 있길 바란다. 비진리가 진리가 되어 협박하는 이 시대에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말씀의 사명자로 세워지길 바란다. 문화와 가치관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이 시대에도 성경 말씀을 우리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다음 세대에도 말씀과 신앙을 전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