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4 사랑의 도약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10월 23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 사랑의 도약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아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복을 주고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씨가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 22:15-18)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 화제가 되었다. 내용은 이렇다. “가게 주인이 저를 알아보는 것 같아요. 이제 다른 데로 가야겠어요.” 혼자 동네 식당에 갔었는데, 이제 가게 주인이 자신을 알아보니까, 그곳에 다시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동네 가게 주인이 나를 알아주는 것이 부담스럽고, 내가 정한 관계의 선을 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트렌드 코리아 2022』에 나오는 내용인데, 저자는 이러한 우리 사회를 ‘나노사회’라고 정의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더이상 공동체가 아니라 나노 원자처럼 개개인으로 파편화된 사회라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 일부를 잠시 읽어보겠다. 산업화 이후 지속적으로 개인화 되는 메가트렌드에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국 사회의 원자화에 결정타를 날렸다. 직장도, 모임도, 심지어 가족도 결속력을 현저하게 잃어가는 가운데,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개개인은 홀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과제를 오롯이 혼자 짊어지게 됐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귀결하는 결론이 돈을 벌어야 한다 절박함이다.” 이러한 시대에서는 하나님도 일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마치 나를 알아보는 동네 가게 주인처럼 선을 넘은 행위일 수 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한 관심사로 촉각이 곤두서 있다. 신앙인들도 생존과 먹고 사는 문제 앞에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은 이제 내 사전에서 지워버린 목록이 되진 않았는지 염려가 된다. 오늘은 창세기 22장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아브라함이 미래의 불확실함을 뚫고 어떻게 독자 이삭을 드렸는지 살펴보며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22: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단 나무 위에 결박한다.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아케다(עקדה)’라고 표현한다. ‘아케다’는 ‘결박(the binding)’이라는 뜻이다. 그냥 아무 것이나 묶는 것이 아니라 ‘희생 제물로 드리기 위해 묶는 것’을 말한다.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은 아버지의 손에 순순히 결박 당하는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다른 랍비들의 글을 보면 이삭은 자신이 희생될 것을 미리 알았지만 기꺼이 아버지의 손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영웅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심지어 이삭은 자신이 본능적으로 저항할 수 없도록 자신의 손을 묶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삭은 아브라함이 백 세 때 얻은 너무도 소중한 아들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21:12)”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모든 언약이 이삭 한 사람에게 달려있었다. 그런데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면 어떻게 될까?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도 불타 없어지게 된다.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된다는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그의 미래의 축복도 사라지게 된다. 이삭이 사라지면 아브라함의 가정에 웃음도 사라지고, 그의 인생은 한없는 불확실성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런 시험을 아브라함에게 하셨을까? 그리고 아브라함은 어떻게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창세기 3장에는 여자의 후손에 대한 예언이 나온다.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머리를 상하게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것이니라하나님이 뱀에게 하신 말씀이다.인류에게 주어진 저주를 역전시킬 ‘여자의 후손’이 나올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다. 여기서 후손은 히브리어로 ‘제라(זרע)’다. ‘씨’라는 뜻이다.아브라함은 셈의 계보를 잇는 자였기에 그의 씨를 통해 하와의 후손이 이어지고, 결국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자손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 사실을 알았을까?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성경은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보고 기뻐하였다고 말한다.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통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의 때를 보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은 이삭의 목숨이었을까? 아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은 아브라함 그 자신이었다. 그가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다 드릴 수 있는지 하나님은 그것을 확인하기 원하신 것이다. 포기해야 열리는 것이 있다. 헌신해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순종해야 시작되는 일들이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에게 가장 소중했던 아들, 이삭에 대한 소유권마저 포기하고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그에게 보여주기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갖고 계신 믿음과 사랑을 담아낼 수 있는 통로가 되라는 것이었다. 여자의 후손이 오기까지 하나님은 전적으로 그분께 동의하며 믿음으로 순종할 동역자들이 필요하셨다. 아브라함은 그리하여 또 한 차례 믿음과 사랑의 도약이 필요했다.

이삭을 갖기 전 그는 자신의 몸과 사라의 태로는 더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음을 알았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근거가 더이상 자신들로부터는 가능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기적처럼 약속의 자녀, 이삭을 낳게 되었다. 이삭을 갖게 된 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사랑을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이끌기 원하셨다.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죽여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결박하며 자신의 관심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까지 결박해야 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자신의 삶을 걸어야 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런 독백을 하셨을 것만 같다. 아들을 나무 위에 묶는 너의 심정이 어떠니? 그것은 장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내가 하게 일이란다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의 헌신을 이렇게 묘사한다. 히 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이 죽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다. 죽은 태를 열고 생명을 주셨던 하나님이,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그의 믿음은 이제 이삭을 드린 사건으로 인해 더 큰 믿음으로 확장된다. 자신을 지금까지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생각할 때, ‘인간의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시험에도 뜻이 있을 거야’라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더 큰 믿음의 그릇으로 만들어 가셨다. 믿음의 사람만이 세상의 상식을 뒤엎고,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이 땅에서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사야서 41장 8절에서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오하비(אברהם אהבי), 나의 벗 아브라함’이라고 부른다. ‘오하비’는 ‘나를 사랑하는 자’라는 뜻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헌신할 수 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나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것이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네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 모순된 것이다.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러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다. 자신의 미래가 통째로 사라질 것 같은 불확실함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사람들은 확실한 것 위에 자신의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불확실 해도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도약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도약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신다. 22:16-18, “네가 이같이 행하여 아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복을 주고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씨가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을 결박하고, 사랑의 도약을 이룬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약속을 주신다. 씨가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성취된다.

이삭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희생제물이 되야 했던 예수님의 완벽한 표상이었다. 이삭과 예수님, 둘 다 독자였다. 둘 다 잉태가 불가능했던 여자의 몸에서 기적적으로 탄생했다. 둘 다 자신이 묶이게 될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에 올랐다. 둘 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희생제물로 결박 당했다.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예수님은 결국 죽음의 두려움에 자신을 결박시킨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거룩하신 뜻에 자신을 결박시킨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순종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그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 그리고 그의 사랑의 헌신을 통해 온 인류가 죄사함을 얻고 생명을 얻는 길을 여셨다. 이 역사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결박하셔야 했던 것이다. 요한복음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말한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하나님은 아브라함처럼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것이다. 우리는 결국 이삭의 결박, 이삭의 아케다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는 것이다.

아케다의 궁극적 메세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약속된 씨의 결박과 희생을 통해 인류에게 구원과 생명이 왔다는 것이다. 약속된 씨로 말미암아 사탄의 머리가 깨졌다는 것이다. 약속된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어 의롭다고 선언되었다. 이처럼 우리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이를 믿을 때 의롭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사랑의 헌신이 있었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의 유업을 잇는 자가 된 것이다.

22:14, “아브라함이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이삭이 결박되었던 곳은 모리아산이었다. ‘모리아(מריה)’는 ‘보다’라는 뜻의 ‘라아(ראה)’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모리아는 ‘여호와께 보여진 곳’이란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 후 모리아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יראה יהוה)’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보신다’라는 뜻이다. 이처럼 모리아는 하나님의 비전이 있는 곳이었다. 하나님은 이 모리아 땅에서 아브라함의 사랑의 도약을 보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순히 결박 당했던 이삭의 순종을 보셨다. 이후 이 모리아 땅에는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다. 성전은 많은 사람들의 죄가 사해지고, 다시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사랑의 도약을 했던 곳이다. 그리고 같은 모리아 산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결박 당한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된다’는 말을 직역하면 ‘여호와의 산에서 보게 된다’는 말이다. 인류는 이 모리아산에서 인류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된 것이다. 모리아는 가장 거룩한 사랑의 도약이 이루어진 곳이다. 인류는 그곳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 사랑에 감사하여 자신의 삶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도약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미리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길을 잃은 곳에서 나아갈 길을 미리 보고 계시는 분이다. 모리아에서 이삭의 결박과 아들의 결박을 보셨던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스런 현재와 불확실한 미래도 미리 보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늘도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믿음과 사랑으로 순종하는 동역자를 찾으신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묶여 있는가? 불안한 내일의 염려에 묶여 있는가? 자녀에 대한 근심에 묶여 있는가? 돈과 일과 학점과 진로에 대한 걱정에 묶여 있는가? 우리가 묶여 있는 대상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끌려가게 된다. 우리는 그것이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결박을 풀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아브라함이 결박한 이삭처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제물로 다시 결박해야 한다 하나님께 나를 드린다는 것은 불확실함으로 나아가는 용기다. 나의 미래, 나의 계획을 내 뜻대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기에 그분 앞에 가장 큰 사랑으로 내딛는 발걸음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믿음과 사랑으로 헌신한 자에게 그가 준비하신 어린 양을 내어 주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벗이 되어 헌신한 자들의 삶을 당신의 영원한 언약으로 이끄신다.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축복인 것이다. 지금 여러분의 이삭은 무엇인가? 여러분이 오래 기다려서 얻은 것, 그러나 그것을 잃을까 봐 가장 마음을 졸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는가? 바라기는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도약이 여러분 안에 일어나기를 축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하여 담대히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는 하나님의 벗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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