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6 왜 야곱인가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11월 6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6 왜 야곱인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5:23)

장자권을 파는 에서 (Esau Selling His Birthright)
헨드릭 테르 브루겐 (Hendrick Ter Brugghen), 1627

그림 하나 보겠다. 1627년 네덜란드 화가 헨드릭 테르 브루겐(Hendrick Ter Brugghen)이 그린 그림이다. ‘장자권을 파는 에서’ (Esau Selling His Birthright)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왼쪽이 야곱이고 오른쪽이 에서다. 사냥에서 막 돌아온 에서는 배가 고팠다. 야곱은 팥죽을 끓여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서는 참을 수 없었다. ‘나 좀 줘’ 그런데 야곱은 ‘먹고 싶으면 형의 장자권을 나에게 줘’라고 말한다. 아직 팥죽은 야곱의 손에 들려 있다. 엄마 리브가는 떡을 들고 서 있다. 이 거래의 중요한 증인이다. 에서와 대척 되는 위치에 있다. 에서의 뒤에는 아버지 이삭이 찌그러져 있다.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 집에서 아버지 이삭의 존재감이 어떤지 느껴진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야곱과 엄마 리브가가 한 편인 것을 알 수 있다. 배가 고팠던 에서는 결국 팥죽 한 그릇 먹기 위해 자신의 장자권을 포기한다. 주도 면밀한 야곱은 그 포기에 대한 맹세까지 받아낸다. 하나님은 왜 이런 야곱을 약속의 자녀로 삼으셨을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이삭은 40이라는 나이에 결혼했다. 그런데 20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었다. 이삭은 하나님께 기도했고, 결국 아내 리브가는 쌍둥이를 임신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이 아이들이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 것이었다. 리브가는 괴로운 나머지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합니까’라고 묻는다.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국민이 태중에 있구나 민족이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족속이 족속보다 강하겠고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 25:23). 리브가는 결국 기도를 통해 자신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데스티니를 듣게 된다. 여기서 ‘큰 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라브(רב)’다. ‘많은, 위대한’이란 뜻의 형용사인데, 명사로 쓰이면, ‘연장자, 높은 사람’이란 뜻이다. ‘어린 자’는 히브리어로 ‘짜이르(צעיר)’다. ‘적은, 미약한, 어린’이란 뜻이다. 세상의 질서는 수가 적고 미약한 어린 자, ‘짜이르’가 수가 많고 힘이 있는 큰 자, ‘라브’를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질서를 뒤집으신다. 왜 일까?

에서는 큰 자였다. 그는 큰 자로서 당연히 장자의 명분을 누릴 수 있었다. 에서가 판 ‘장자의 명분’은 뭘까?장자의 명분은 히브리어로 ‘베코라(בכרה)’이다. ‘태를 열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어미의 첫 태를 연 자가 갖게 되는 특권을 말한다. 장자의 특권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두 배의 재산을 상속받는 것이다. 그리고 가정을 다스리는 아버지의 명예와 권위를 이어 받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의 뒤를 잇는 장자에게는 또 다른 중요한 특권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 즉 언약적 축복을 이어받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적 축복이 뭘까? 크게 두 가지다. “자손을 많게 하겠다”와 “가나안 온 땅을 주겠다”는 것이다. 자손과 땅, 이 두 가지가 바로 언약적 축복의 내용이다. 에서는 이 언약적 축복을 가볍게 여긴 것이다. 그는 지금 당장 먹을 것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이 언약적 축복을 이어받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던 것이다.

에서와 야곱은 분명 다 같은 이삭의 자녀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은 야곱에게만 주어졌다. 왜 야곱일까? 그것은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리브가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예언을 들었다. 리브가는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야곱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그래서 야곱이 장자인 에서로 변장하여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아내도록 일을 꾸민다. 야곱은 아버지가 알아채고 오히려 저주를 퍼부을까봐 두려워한다. 그 때 엄마 리브가가 말한다.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릴거야. 너는 내 말만 들어.” 리브가는 자신이 저주를 받을지라도 오직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길 원했던 것이다.

후에 장자의 축복을 뺏겨버린 에서는 분노한다. 야곱은 자신을 죽이려는 에서를 피해 도망쳐야 했다. 야곱이 하란으로 떠나던 날 아버지 이삭은 야곱을 위해 축복 기도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28:3-4) 이 기도에는 자손에 대한 축복과 땅에 대한 축복의 내용이 담겨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통해 장자가 받는 언약적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야곱 이후 장자의 명분은 누가 이어갔을까?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열 한 번째 아들인 요셉이다. 성경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대상 5:1-2,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요셉 이후 장자의 명분은 누가 이어갔을까?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 중 차남인 에브라임이 이어갔다. 야곱이 죽기 전 손자들을 축복할 때, 그는 차남인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한다. 요셉이 축복하는 아버지의 손의 위치를 바꾸려 하자, 그는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라고 말한다.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이 누구에게 향하고 있었는지 알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출애굽 이후 에브라임 지파는 다른 모든 지파를 이끄는 장자 역할을 한다.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지파였고, 성막도 에브라임 지파의 땅인 실로에 세워지게 된다. 이후 실로는 가나안 정착 이후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가 된다. 해마다 절기가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실로에 올라와 여호와의 절기를 지켰다. 그런데 이 실로의 시대는 300년 만에 막을 내린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에브라임 지파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고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런 에브라임지파를 이렇게 평가한다.  78:9-11,“에브라임 자손은 무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율법 준행을 거절하며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그의 기이한 일을 잊었도다 장자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에브라임 지파의 시대는 이것으로 마감하게 된다. 실로에 있던 언약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겼고, 실로는 폐허가 되고 만다.

에브라임 지파 이후 장자의 명분은 누구에게로 돌아갔을까? 유다 지파다.  78:67-69,“ 요셉의 장막을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 그의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영원히 두신  같이 지으셨도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이어갈 장자로 유다 지파를 택하신다. 그리고 유다 지파인 다윗을 통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게 하신다. 하나님의 임재는 이제 예루살렘에 나타났고, 예루살렘은 성전이 세워지며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정치 종교의 중심지가 된다.

유다 지파는 장자의 사명을 잘 감당했을까? 그들의 시대는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예루살렘의 운명을 선포하신다.  7:12-15,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이름을  처소 실로에 가서  백성 이스라엘의 악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너희가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신뢰하는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곳에 행하겠고 내가 너희 모든 형제  에브라임  자손을 쫓아낸  같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유다지파를 통한 예루살렘의 시대는 약 400년만에 막을 내린다.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은 무너지고 남유다는 멸망한다. 하나님은 괴로우셨을 것이다. 언약적 축복을 이어가기 위해 세운 장자들이 결국은 그 사명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장자들의 실패로 하나님의 언약도 실패로 돌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장자를 일으키셨다. 언약을 이어갈 장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이어갈 장자로 예수님을 세우셨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에게 처음 주셨던 언약적 축복은 이제 예수님과 예수님 이후, 그를 믿는 자들을 통해 이어지게 하셨다. 성경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3:14, 29,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따라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 언약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만 받고 끝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적 축복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믿는 자들을 통해 이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릴 거야.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할거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될거야”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존재 자체가 복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이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장자의 명분은 육신의 순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당연히 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하나님께서 그것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알았던 사람들이 그 장자의 명분을 이어받았다. 그런데 장자의 명분을 받았던 자들이 그 사명을 망각하고 ‘큰 자’가 되어 힘을 추구했을 때, 그 장자의 명분은 ‘미약한 자, 작은 자’ 그러나 언약을 소중히 여기는 자에게로 옮겨갔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9:12-16,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하나님의 선택은 선택된 자만을 일방적으로 편애하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이 약속의 자녀를 선택하신 것은 그 약속의 자녀만 사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적 축복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거되고, 결국 많은 사람들이 복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은 불공평한 것이 아니다. 모두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와 긍휼인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이 있었기에 이제 우리도 약속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바울은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8)고 말한다. 약속의 자녀는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약속의 자녀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리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약속의 자녀는 자신의 힘만 믿고 하나님 없이도 사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작고 미약하기에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작고 미약한 자에게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허락하신다. 결국 약속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축복 안에서 강한 자로 세워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열방에 나누는 자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것을 세상에 힘 있는 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작고 미약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소중히 여기는 자들을 통해서 이루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린 야곱을 택하신 이유는 이러한 하나님의 질서를 보여주기 위함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속의 자녀가 되길 원하신다.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이어가는 장자가 되길 원하신다. 육신의 욕구를 앞세우다 보면 우리도 에서처럼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길 수 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많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소중히 여기는 약속의 자녀가 되야 한다. 장자의 축복은 장자의 유산을 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장자의 책임을 다하는 데 있다. 장자의 책임을 다할 때 장자의 몫은 따라오는 것이다. 교회인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믿음의 후손이 된 것에 안주해선 안된다.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다음 세대와 열방에 전달하는 사명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약속의 자녀가 된 것은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교회가 세워진 것도 이 장자의 사명을 이루기 위함이다. 숫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명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야곱처럼 당연히 장자의 명분을 누릴 수 없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어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이어가는 장자가 된 것이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그분의 언약적 축복을 다음 세대와 열방에 전달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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