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11월 13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7 야곱의 두 사람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창 29:25)
성시경의 ‘두 사람’이란 노래가 있다. 유창이가 좋아하고 아미르도 요즘 기타로 연습하고 있는 곡이다. 가사도 좋다. “서툴고 또 부족하지만/ 언제까지나 곁에 있을게/ 모진 바람 또 다시 불어와도/ 우리 두 사람 저 거친 세월을 지나가리”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거친 세월을 함께 지나가자고 다짐하는 내용이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은 얼마든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지 않는데 우린 때로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나가야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야곱은 인생 말년에 애굽 왕 바로 앞에 서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 나그네의 길의 세월이 백삼십년이니이다. 내가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야곱은 정말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 야곱이 험악한 세월을 보낸 것은 그가 만났던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런데 ‘야곱’이었던 그를 ‘이스라엘’이 되게 했던 사람은 누구일까? 그가 사랑했던 라헬도 그 중 하나 일 수 있다. 그러나 라헬 말고 다른 두 사람을 살펴보고자 한다. 라반과 레아다. 이 두 사람이 어떻게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었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야곱은 도망자였다. 형 에서를 피해서 그는 외삼촌이 있는 밧단 아람으로 도망한다. 한 우물가에서 야곱은 라헬을 만난다. 그리고 영화처럼 사랑에 빠진다. 그의 외삼촌이자 라헬의 아버지인 라반은 야곱이 자기 딸과 사랑에 빠진 것을 알았다. 고대 근동에서 예비 신랑은 신부값으로 돈을 신부의 아버지에게 줘야 했다. 야곱은 무일푼으로 집을 떠나온 지라 돈을 낼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외삼촌에게 라헬을 위해 7년을 일하겠다고 말한다. 신부값으로는 과한 제안이었다. 그래도 그는 라헬을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기며 일했다. 7년의 기한이 끝났을 때 야곱은 라반에게 이제 라헬과 첫날밤을 치르겠다고 말한다. 라반은 그를 위해 결혼 잔치를 베푼다. 그러나 라반은 야곱을 속이다. 라헬 대신 그녀의 언니 레아를 신혼 방에 가게 한다. 술에 취했는지 야곱은 그녀를 분간하지 못하고 첫날밤을 치르게 된다. 아침에 깨어보니 야곱 옆에는 레아가 누워있었다. 너무도 놀란 야곱은 라반에게 가서 따진다. “외삼촌,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나를 속이심이 어찌됨이니이까?” 라반은 간사한 인물이었다. 야곱도 속이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인데, 그는 야곱보다 한 수 위였다. 라반은 야곱에게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칠 일간의 결혼 잔치를 마치고 칠 년을 더 일하라고 제의한다. 결국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총 14년을 일하게 된다. 20년 후 야곱은 라반에게 이렇게 말한다. 창 31:41,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야곱은 그야말로 20년의 세월 동안 노동 착취를 당하며 험악한 세월을 보냈던 것이었다.
야곱에게 왜 이런 시간이 필요했을까? 야곱은 왜 라반이라는 사람을 만나야 했을까?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한다면 야곱의 인생은 그저 고통의 연속일 뿐이다. 그러나 이 20년이란 시간이 있었기에 야곱은 후에 열 두 지파가 되는 열 두 아들을 얻게 된다. 그 험악한 20년의 세월이 있었기에 야곱은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브니엘의 새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형도, 아버지도 속이며 악착같이 살아온 야곱을 길들이기 위해 하나님은 그보다 한 수 위의 사기꾼, 라반을 예비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야곱은 라반의 손에서 참교육을 당하게 된다. 라반은 다름 아니라 야곱의 변화를 위하여 하나님이 그에게 붙이신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후에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창 31:12)” 하나님은 알고 계셨다. 야곱은 라반이 자신을 얼마나 부당하게 대우했는지 원망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목하신 것은 라반의 압제가 아니었다. 야곱의 변화였다. 야곱은 결국 온 가족을 데리고 라반에게서 도망친다. 7일 길을 쫒아 온 라반이 야곱에게 이런 말을 한다. 창 31:29,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라반은 야곱의 변화를 위하여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 안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라반을 허락하신 이유는 결국 변화된 야곱을 얻기 위함이었다.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을 얻기 위함이었다.
우리 역시 살면서 라반과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나를 이용해 먹고, 부당하게 나를 대하는 사람을 우리는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억울함에 주목한다. 그 사람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내가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는지에 주목한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변화를 위하여 우리에게 ‘라반’을 붙이신다. 생각만 해도 행복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라반 너머로 ‘변화된 나’를 얻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열정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리브가는 라반이 야곱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먼 곳까지 아들을 보낸 것이다. 우리 역시 기대를 가지고 만난 사람이 오히려 나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일 수도 있다. 좋은 사람, 좋은 회사라고 들어간 곳에서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복병들을 만난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당한 수모가 상처로 남지 않는다. 그래야 우리가 당한 고통이 분노로 남지 않는다. 그래야 우리는 변화되고 성장하여 하나님이 얻으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야곱이 만났던 또 다른 한 사람은 레아다. 야곱이 레아를 만나고 나서 한 첫 대사는 이렇다. “히네 후 레아(הנה הוא לאה)” 한국말로 번역하면 ‘이런 레아잖아’, ‘여기 왜 레아가 있지’ 이런 뉘앙스다. 한 여자로서 레아는 이런 야곱을 보며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라헬을 기대했던 야곱으로서도 절망스러웠을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히네 후 레아(הנה הוא לאה)”라는 구절의 숫자 값이 108인데, 이것은 지옥을 뜻하는 ‘게헤놈(גיהנם)’과 같은 숫자 값이라는 것이다. 야곱은 신혼 다음 날 레아를 지옥처럼 경험한 것이다. 유대 신비주의인 카발라에서는 라헬과 레아는 한 사람의 두 가지 측면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외모가 아름다운 것으로 묘사된 라헬은 겉으로 드러난 세속적인 측면이고, 눈이 부드러운 것으로 묘사된 레아는 영적이고 가리워진 측면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예쁜 라헬과는 쉽게 사랑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더 영적이고 가려져 있는 레아에게서는 좀처럼 매력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어느 날 아침 우리는 배우자를 보고 야곱과 같은 대사를 속으로 외칠 수 있다. “히네 후 레아(הנה הוא לאה)” ‘뭐야 레아잖아, 라헬이 아니네…’ 우리는 속았다는 느낌과 함께 이 레아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레아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허락하신 첫번째 부인이었다. 레아는 세번째 아들을 낳고 이름을 ‘레위’라고 짓는다. 레위(לוי)는 ‘연합하다’란 뜻의 라바(לוה)에서 온 말이다. ‘내가 아들 셋을 낳았으니 이제 남편이 나와 연합하리로다.’ 이런 기대를 가지고 지은 이름이다. 이 레위는 후에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연결하는 제사장 지파가 된다. 레아는 또한 네번째 아들을 낳고 이름을 ‘유다’라고 짓는다. 유다(יהודה)는 ‘손을 사용하다’라는 뜻의 ‘야다(ידה)’에서 온 말인데, ‘손을 펴서 경배하다’는 뜻이 있다. 그녀는 네번째 아들 유다를 낳고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고백한다. 이 표현을 보면 레아가 남편에게서 받은 상처를 어느 정도 극복한 것 같다. 그녀는 더이상 인간적인 사랑에 연연하지 않는다. 이 유다의 자손으로 예수님이 탄생하게 된다. 막벨라 굴에 가면 야곱 옆에 묻힌 부인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다. 이처럼 여러 의미에서 볼 때 야곱의 진정한 짝은 레아였던 것이다.
나훔 이쉬 감조(נחום איש גמזו)라는 랍비가 있었다. 굳이 우리 말로 그의 이름을 해석하자면 “‘이 또한’의 사람 나훔”이라 할 수 있다. 1세기 때의 사람이었는데, 그가 이런 말을 했다. ‘감조 레토바(גם זו לטובה)’ “이 또한 선을 위한 것이다”란 뜻이다. 그야말로 그는 긍정의 아이콘이었다. 그는 모든 불행에 굴하지 않고 모든 일을 낙관적으로 반응했다. 그가 만약 야곱이었다면, 그가 레아를 보았을 때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감조 레토바(גם זו לטובה)’ “이 또한 선을 위한 것이다” 결국 야곱은 레아와 함께 평생을 살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이루게 된다.
이처럼 야곱은 그가 만나고 싶지 않았던 라반과 레아를 통해서 간사함이 없는 온전한 사람이 되어간다. 그리고 라반을 떠난 뒤 브니엘에서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얻게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란 뜻이다.야곱은 하나님께서 라반과 레아를 통해 준비하신 지옥과도 같은 환경에 굴하지 않았다. 결국 20년이란 연단의 시간을 통해 야비하고 간사했던 ‘야곱’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이스라엘’로 변화된 것이다.
자 그런데 야곱이 라반과 레아를 견뎌낼 수 있었던 궁극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약속이다. 야곱은 20년 전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꿈에서 그는 사다리가 땅 위에 있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 위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약속이 20년 전에 그의 가슴에 심어졌기에 그는 지옥과도 같은 환경 속에서도 돌아갈 날을 소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벧엘의 하나님을 경험할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삶을 꿰뚫고 계신 예수님을 만나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한다. 그 때 예수님은 그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요 1:51)”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야곱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이 하늘로 향한 ‘사다리’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이제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인자가 바로 하늘을 연결하는 사다리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라는 것이다. 야곱은 하늘로 난 사다리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했다. 오늘 날 우리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을 만나야 비로소 우리의 인생에 하늘 문이 열린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늘 아버지와 소통하는 인생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 하나님과의 만남과 약속의 말씀이 있어야 우리 역시 믿음의 여정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다. 지옥과도 같은 사람, 지옥과도 같은 환경을 만나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그 시간들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야곱과 같은 인생을 찾아오신 하나님이라면, 우리의 인생에도 하나님은 찾아 오신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안에 ‘야곱’이 사라지고, 우리를 ‘이스라엘’로 얻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간적인 간사함과 속임수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며 사는 참 이스라엘로 변화 되길 원하신다. 그 변화를 위해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라반을 붙이실 수 있다. 우리가 원했던 라헬이 아니라 레아를 평생의 동역자가 되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 또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선일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우리에게 붙이신 사람임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겨루게 되는 모든 씨름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사역이 아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성공과 번영이 아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를 얻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 위에 하늘 문이 열려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하늘과 소통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하늘이 열린 자만이 하늘의 뜻이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길 갈망하기 때문이다. 야곱은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두 사람, 라반과 레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졌다. 우리가 그런 사람을 만날지라도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않게 되길 축원한다. 바라기는 모든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얻기 원하시는 이스라엘로 거듭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