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8 야곱의 변화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11월 20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8 야곱의 변화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35:1)

‘사람은 변한다. 아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 다른 사람이 변화되기를 바라지만 좀처럼 변화되지 않을 때 우리가 내뱉는 말이 있다. ‘저 인간은 죽어도 안 변해’ 변화를 갈망하지만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도 우리는 종종 실망하기도 한다. 야곱은 변화될 수 있는 순간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 이후에도 우리는 그에게서 이전과 똑같은 모습을 발견한다. ‘도대체 야곱은 변할 수 있는 인간인가?’ 오늘은 이러한 주제를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다. 벧엘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약속을 주신 곳이고, 야곱은 다시 이곳에 돌아와 하나님의 집을 세울 것을 맹세한다. 인생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사람이 좀 변해야 한다. 그런데, 야곱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는 삼촌 라반을 속이기도 하고, 또 그에게 속임을 당하기도 하면서 20년의 세월을 지낸다. 창세기 32장에서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를 만난다. 그리고 그와 씨름하여 이긴다. 천사는 그의 이름이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불려질 것이라고 말해준다. 이름이 변했다는 것은 그의 정체성의 변화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는 장면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적이고 계산적인 야곱을 보게 된다. 형의 마음을 풀기 위해 그는 많은 가축을 선물로 보내는데, 그것을 떼로 나누고 시간차를 두어 보낸다. 하나님이 자기를 만나주셨음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꾀를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다행히 형과 화해를 이루고 이들은 각자 자신의 길을 간다. 33:16-17, “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숙곳은 요단 동편에 있다. 야곱은 아직 요단강을 건너지 않았다. 야곱은 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직행하지 않았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요단강 동편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가나안 동쪽 땅에 남겠다고 요청한 것을 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많은 목축 떼를 가졌고, 그 땅이 목축하기에 좋았기 때문이었다. 야곱에게도 라반에게서 탈취한 많은 가축이 있었다. 숙곳에 이르렀을 때 야곱의 계산기는 분주하게 돌아갔을 것이다. 그는 약속의 땅에 속히 돌아가기 보다 그곳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 그만큼 그는 보이는 것과 인간적인 욕심에 이끌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짓는다. 이처럼 그의 소유는 야곱을 그곳에 머물게 했다. 그의 발을 약속의 지점으로 옮기지 못하게 만들었다. 소유에 마음을 빼앗기면 약속을 놓치는 것이다. 야곱은 20년 전 벧엘에서 하나님께 한 약속을 잊었다. 28:21-22,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돌이 하나님의 집이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그는 자신이 베고 잤던 돌기둥으로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고 맹세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자신의 집을 짓기에 바빴던 것이다.

숙곳은 히브리어로 ‘수콧’이다. 임시 거처를 뜻하는 ‘수카’의 복수형이다. 그러나 야곱은 이 임시 거주지에서 임시로 살지 않았다. 그의 딸 레아가 밧단 아람을 떠나올 때의 나이가 여섯 살 정도였는데, 그들이 세겜에 이르렀을 때 디나는 결혼적령기의 여인으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숙곳에서 최소 10년은 머물렀을 것으로 보인다. 야곱은 이후 다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 세겜으로 이동한다. 33:18-20,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세겜 성읍에 이르러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그가 장막을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크시타에 샀으며 거기에 제단을 쌓고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평안한 게 문제였다. 야곱은 세겜이란 도시에 또 매혹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하나님께 약속했던 장소로 가지 않고, 또 다시 그 땅에서 밭을 산다.  그는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란 뜻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종교적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그가 돌아가기로 맹세했던 벧엘, 하나님의 집이 아니었다. 이 세겜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도시 구경을 나갔다가 강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왜 이런 불행한 사건이 야곱에게 일어난 것일까?

하나님이 야곱에게 기대하시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집을 짓고, 장막터를 넓히고, 소유를 늘이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야곱을 통해 바라시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야곱이 서원한 대로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집, 벧엘을 세우기 원하셨다. 세겜 땅이 야곱의 눈에는 좋아보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았다. 야곱이 세겜에 끌려 밭을 사고 그곳에 정착하려 했을 때 그에게 불행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디나는 레아가 낳은 딸이다. 그녀가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 당했을 때 레아의 아들이었던 시므온과 레위가 나선다. 그들은 디나와 결혼하려면 세겜 남자들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들이 할례 받고 괴로워하는 사이에 세겜 남자들을 모조리 죽인다. 이 때 야곱의 반응을 보자. 34: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집이 멸망하리라 야곱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딸 디나가 더럽혀진 것보다는 여전히 자기 집과 그가 그 땅에서 누릴 수 있었던 평안이 깨어진 것에 대해 연연하고 있었다. 이 때 하나님이 야곱의 인생에 다시 개입하신다.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한글 성경에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영어성경은 ‘then’, 히브리어 성경은 ‘그리고’라는 접속사로 문장이 시작된다. 즉 이 말씀은 디나의 사건과 곧바로 연결되는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세겜에서의 모든 사건은 그가 벧엘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야곱이 평안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모든 길을 예비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그의 삼촌 라반을 꿈에서 만나 ‘야곱을 죽이면 너 죽는다’라고 겁을 주셨다. 그리고 형 에서의 마음도 풀리도록 인도하셨다. 야곱은 빨리 벧엘로 갔어야 했다. 야곱이 숙곳에서 자기 집을 짓고, 세겜에서 밭을 살 때가 아니었다. 야곱은 복이 되는 것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야곱을 잘 아셨다. 야곱의 본능을 잠재우기 위해, 그리고 그 안에 하나님의 비전을 보이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의 환경을 흔드셔야 했다.

우리 역시 야곱과 같을 때가 있다. 어려울 때 우리는 하나님께 매달리며 서원한다. 그러나 좀 살 만하면 우리는 숙곳에 머물며 자신의 집을 짓느라 바쁘다. 세겜에 머물며 어디 좋은 땅이 있는지, 어떻게 하면 재산을 늘일 수 있는지 살피느라 바쁘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목적을 놓치고, 우리의 본능이 만족하는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본능을 흔드는 사건들은 그러한 때 일어난다. 꼭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것이다. 나도 주변에서 ‘교회 가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내가 하는 것에 바빠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교 1학년 때 학교 방송국 신고식을 하다가 뺨을 맞았는데 고막이 터졌다. 고막이 나간 뒤 뒤에야 나는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되었다. 일어나 하나님의 집, 교회로 올라가 다시 예배하는 삶을 시작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구체적으로 ‘벧엘’을 언급하셨을 때 야곱은 그가 놓치고 있었던 서원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야곱의 변화는 이 때부터 시작된다.

35:2-3,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야곱은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명령한다. ‘이방 신상을 버리라,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그리고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고 함께 예배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동안 야곱은 그의 집안 사람들에게 한번도 이런 제안을 한 적이 없었다. 이것은 야곱의 놀라운 변화다. 야곱은 라헬이 가져온 드라빔을 묻게 했다. 드라빔은 사람 모양으로 만든 작은 수호신이다. 이것이 있는 사람은 아버지의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기 전 드라빔을 묻으라고 명령한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집, 벧엘이 회복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드라빔을 묻어야 한다. 하나님보다 앞세워 우리가 섬기는 것들이 있다. 공부, 학점, 진급, 명예… 그것이 하나님보다 앞세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묻어야 할 드라빔인 것이다. 야곱의 모든 집안 사람들은 드라빔과 귀고리를 세겜의 상수리 나무 아래 묻는다. 그리고 그들의 의복을 갈아 입는다. 그들의 변화는 그들 주변 원수들을 두렵게 했다. 35: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결단과 변화 자체가 원수를 두렵게 만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세우고 예배하기 위하여 우리의 옷을 바꿔 입을 때 원수는 두려워하는 것이다.

35:6-7, “야곱과 그와 함께 모든 사람이 가나안 루스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드디어 야곱과 그가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은 벧엘에 이르러 함께 예배 한다. 야곱은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다. ‘벧엘의 하나님’인데,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기에 ‘엘벧엘’은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이란 뜻이다.왜 ‘엘벧엘’일까? 하나님의 집이 세워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임을 야곱이 깨달았던 것일까?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의 소원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장막을 같이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은 그들과 거처를 함께 하셨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여전히 성막에서 그들과 함께 하셨고, 솔로몬 때 하나님의 집, 성전이 세워진다.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성전이 무너지기 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요한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인 교회를 세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6:18). 교회는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집인 것이다. 사도 요한은 장차 하나님의 집이 새 예루살렘에서 완성될 것을 말한다.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지나갔음이러라 이처럼 하나님의 집의 회복은 창조 이후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성경 전체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인 것이다. 야곱이 이 ‘엘벧엘’의 비전을 다시 회복하고나서야 그의 인생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땅에서의 그의 삶이 재산을 늘리며 그의 육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의 인생은 이제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 되었다. 그는 이제 야곱이라는 개인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을 예배했다. 그의 온 권속들이 하나님의 집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다. 요즘 ‘가나안’ 성도들이 많은데, 교회는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세운 하나님의 집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예배하며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물리적인 공간으로서 하나님의 집이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으로서 교회 안에서 경험하는 ‘엘벧엘’의 하나님을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엘벧엘’의 비전을 회복한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35: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은 야곱을 야곱으로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로 불러주신다. 변화되지 않는 야곱을 오랫동안 기다려주시고, 그를 변화된 이스라엘로 여겨 주시며 기다리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야곱의 변화를 주도하셨다. 하나님은 이제 그를 이렇게 축복하신다. 35: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허리에서 나오리라 하나님은 이제 그가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축복하셨다. 백성들의 총회가 그에게서 나오고, 왕들이 그의 허리에서 나올 것을 축복하셨다. 하나님은 그가 야곱이었을 때는 이런 축복을 하지 않았다. 인간적이고 악착같은 야곱이 생육하고 번성하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야곱이 변화되어 이스라엘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의 번성을 위해 축복하신 것이다. 우리 역시 변화되어야 약속을 받는 것이다. 변화는 우리가 하루아침에 착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목적으로 우리의 관심이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집’의 비전을 회복하는 사람들에게 번성을 약속하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을 세우기보다 자기 집을 세우는 목적에 머무른다. 교회 사역을 하면서도 내 사역, 나의 영향력을 확장하는데 관심을 둔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집을 세우기 위해 벧엘로 올라가지 않는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자기 집을 짓기 위해 숙곳에 머물고 있지는 않는가? 땅을 사기 위해 세겜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벧엘로 올라가야 한다. 거기서 엘벧엘,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이 땅 위에 세운 이 교회에서 함께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영혼들과 열방에 하나님의 집이 세워지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의 집’에 번성을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변화된 이스라엘에게 축복을 허락하신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비전 안에서 변화되기를 축원한다.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의 집이 되길 축원한다. 우리가 이 교회에서 ‘엘벧엘’의 하나님을 함께 경험하길 소원한다. 우리가 처음 했던 질문, ‘사람이 변할 수 있는가?’ 결론은 ‘비전이 회복되면 사람은 변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변화된 이스라엘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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