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11월 27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0 기억의 치유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창 42:21)
데이빗 씨맨즈는 ‘기억의 치유’라는 그의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기억의 치유는 과거 상처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기억은 하되 다른 각도에서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사건들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 사건의 의미와 현재 생활방식에 끼치는 영향력은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의 기억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세월이 흐른다고 치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삐걱거리는 결혼 생활, 관계의 문제, 낮은 자존감 등 치유되지 않은 기억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의 가장 근원적인 원인이 될 수 있다. 요셉은 기억의 치유가 필요했다. 형들의 증오와 자신을 죽이려다가 팔아버린 배신 행위는 요셉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요셉은 이 아픈 기억을 어떻게 치유했을까? 우리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먼저 창세기의 큰 그림을 그려보고자 한다. 창세기는 창조, 타락, 구속에 관한 이야기다. 1-2장에서는 창조, 3-11장에서는 타락, 12-50장에서는 구속의 이야기가 나온다. 타락의 이야기에서는 죄의 근본이 되는 두가지 사건이 나온다. 하나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인이 아벨을 살해 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이 있었다. 그들이 그 욕망을 선택했을 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실상이었다.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다. 하나님과의 관계 상실로 인해 방황하는 인간이 그 다음으로 저지른 죄악이 바로 형제 살해이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의 하나님의 질문에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발뺌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인류는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온전한 연합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파괴된 관계를 회복할 사람을 기다리셨다. 불순종을 끊고 순종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사람, 형제들과의 분열을 끊고 온전한 연합을 이뤄낼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과 요셉이었다. 그래서 창세기 12장에서부터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37장에서 마지막 50장까지는 요셉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세우시는 목적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깨어진 관계를 연결하고, 진정한 구원과 회복의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함이다. 다윗은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3)라고 노래했다. 온전한 연합을 통해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과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와 생명을 누리는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누가 이 저주스러운 흐름을 끊을 것인가’ 그것이 인류에게 주어진 과제라 할 수 있다.
요셉은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하다가 결국 형들에 의해 팔려간다. 형들은 요셉을 팔아치우면서 아버지의 편애에 대한 분노를 해소하려 했다. 형들 때문에 요셉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다. 그는 그의 꽃다운 청춘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받으면 곧바로 인간적인 목적이 생긴다. 그것은 복수다. 요셉은 영화 제목처럼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외칠 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요셉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감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요셉은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던 기회를 한번 놓쳤었다. 술관원장이 그를 잊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섬기던 바로 왕이 꿈 때문에 괴로워하자 술관원장은 자신의 꿈을 해석해 주었던 요셉의 존재를 기억해 낸다. 그 바람에 요셉은 바로 왕 앞에 바로 불려가게 된다. 그리고 그의 꿈을 해석해준 결과 요셉은 하루아침에 애굽의 총리가 된다. 잊혀졌던 요셉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정확히 기억된 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게 요셉의 삶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벌어진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총리가 되고서 그는 자신의 권력으로 형들을 잡아오거나 자신이 살아있음을 아버지에게 알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길 기다렸다. 복수는 더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복수보다 더 큰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길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때가 왔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임하자 그의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애굽으로 온 것이다. 요셉은 그들을 22년 만에 만난다. 17세에 노예로 팔려가 30세에 총리가 되고, 풍년의 세월 7년, 흉년의 세월 2년을 지나 39세의 나이에 형들을 다시 만난 것이다. 형들은 요셉 앞에 나와 땅에 엎드려 절한다. 요셉은 자신에게 절하는 형들을 보며 그의 첫번째 꿈이 현실에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때부터 자신이 준비해 온 일들을 진행시킨다. 그는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먼저 그는 형들을 스파이로 누명을 씌어 삼일간 감옥에 가둔다. 그들 중 시므온을 볼모로 놔두고 나머지는 풀어주면서 막내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한다. 그것으로 그들의 진실함을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이 때 형들은 과거 자신들이 요셉에게 했던 일이 죄였음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창 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기 때문에 그들은 요셉이 자신들의 말을 알아듣는 줄 몰랐다. 그러나 요셉은 다 듣고 있었다. 요셉은 그들이 자신에게 행했던 죄를 후회하고 있음을 듣게 된다. 형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요셉은 과거 상처받았던 기억과 서러움이 복받쳐온다. 그래서 잠시 그들을 떠나 울고 다시 돌아온다. 그 후 요셉은 시므온을 끌어내어 결박하고 나머지는 풀어준다. 왜 시므온을 붙잡아 뒀을까? 랍비 라시는 시므온이 요셉을 죽이려는 계획을 시작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요셉은 시므온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를 결박했을까? 그러나 유대인의 경전 미드라쉬를 보면 요셉은 형들이 간 뒤 시므온을 바로 풀어준다. 그리고 그에게 음식과 음료를 제공하며, 그를 개인적으로 정성껏 돌본다. 유대인 랍비들은 이러한 요셉의 모습을 보면서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 단순히 그를 용서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가해자에게 친절을 베풀기까지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둘 사이의 좋은 감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나쁜 행동을 좋은 행동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요셉이 시므온을 남겨두면서 과거에 있었던 나쁜 관계와 기억을 적극적으로 치유하고 있는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나머지 형들은 가나안으로 가던 중 곡식 자루에 자신들이 지불했던 돈이 그대로 들어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들은 말한다. 창 42:28,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그들은 이제 돈을 훔친 죄인으로 몰릴 상황이 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이 자신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한번 더 자신들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후에 형들은 결국 베냐민을 요셉에게로 데려 온다. 이 때 요셉은 자신이 준비한 두번째 단계의 일을 진행한다. 베냐민의 자루에 자신의 은잔을 넣어두고 그를 도둑으로 몰아간 것이다. 요셉이 몰래카메라를 했으면 이경규보다 잘했을 것 같다.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들이 같은 어머니 라헬의 자식인 베냐민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알기 원했던 것 같다. 다른 형들이 만약 베냐민을 싫어했다면 그가 어떻게 되든 그들은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에게는 베냐민이 애굽 총리의 잔을 훔치다가 걸려서 애굽에 잡혀있다고 보고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형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유다가 나서서 이렇게 호소했다. 창 44:30-31,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유다는 진정으로 아버지와 베냐민에 대해 염려했다. 그리고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해서 종이 되고, 그를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 요셉은 형들의 마음을 확인했다. 드디어 온전한 연합을 위한 때가 무르익었다. 요셉은 더이상 지체하지 않고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창 45:4-5,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그러면서 요셉은 또 이렇게 말한다. 창 45:7-8,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은 자신이 형들에게 받은 상처만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 상처 너머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을 보고 깨달았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의 과거의 기억을 치유하고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셉은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끌어 안고 울었다. 베냐민도 울었다. 요셉은 형들과도 입맞추며 안고 울었다. 형들도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며 지난 날의 회포를 풀었다.
요셉은 자신의 상처 때문에, 자신의 감정 때문에 하나님의 큰 구원 계획을 거스를 수 없었다. 하나님의 계획은 형들의 후손을 이 세상에 두는 것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을 애굽에 보내어 총리가 되게 하신 것이 형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임을 알았다. 결국 요셉은 가인이 범했던 죄, 형제 살인이라는 저주를 끊고, 형제들 안에 온전한 연합을 이루게 된다. 이 열 두 명 아들들의 용서와 화해를 통해 이스라엘은 12지파의 민족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후에 온전히 연합한 한 민족이 되어 출애굽을 하게 된다. 이처럼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복종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생명과 연합의 역사를 이뤄가신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역사는 중단 없이 이 땅에서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이스라엘 땅에 구원자로 오셨다. 예수님은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십자가에 내어주었다. 우리는 형제들에게 배신 당했던 요셉이 같은 동족에게 배신 당한 예수님의 모형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 역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백성들에게 복수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런 예언을 했다. 슥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랍비들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한다.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오기 전에 요셉의 자손 메시아가 올 것이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속하는 죽임을 당하고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오는 길을 예비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찌른 메시아 때문에 통곡하게 된다는 예언의 말씀이다.요셉의 형제들은 결국 요셉을 알아보고 통곡했다. 그들이 배신하고 죽음에 넘겼던 요셉이 사실은 그들의 구원자였던 것을 그들은 깨달았던 것이다. 요셉처럼 동족들에게 버림받았던 예수님은 사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요셉의 자손 메시아’인 것이다. 그분은 장차 ‘다윗의 자손 메시아’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유대인들이 결국 이 사실을 깨닫고, 통곡하게 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수전절, 즉 하누카 때 성전을 거니시다가 유대인들에게 둘러싸여 질문을 받으신다. “당신이 메시아이면 밝히 말하소서” 그 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요 10:25-28,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이제 하누카가 내일이면 끝난다. 하누카는 ‘봉헌’이란 뜻이다. 이 하누카의 절기에 주님의 뜻을 알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은혜가 회복되길 바란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뜻을 알 때 과거의 상처가 해석된다. 과거의 기억이 치유되어야 우리는 정결한 제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봉헌할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온전한 연합이라는 하나님의 더 큰 뜻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서로 원수 되었던 두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사람이 되어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그 두 사람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은 형제 살인이라는 저주를 끊고 온전한 연합을 위해 일어날 사람들을 오늘도 기다리고 계신다.
여러분 중에 혹 관계 속에서 상처받았던 과거의 기억이 있는가? 여러분은 그 고통스러운 시간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더 큰 목적이 있었음을 발견했는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길 소원한다. 그리하여 단순히 나의 원수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연합과 생명의 은혜를 누리는 더 큰 목적을 붙잡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한 것으로 그들을 향한 내 감정의 태도를 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고 그것을 내 마음의 태도로 정해야 한다. 바라기는 오늘도 증오가 끊이지 않는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 임하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