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12월 18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2 유업의 전달자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창 48:14)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말에 요셉은 급히 그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간다. 야곱은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한다. 그런데 야곱은 동생 에브라임을 형 므낫세보다 앞세워서 축복했다. 요셉은 그것이 기쁘지 않았다. 요셉은 아버지가 오른손을 장자에게 얹어 그를 먼저 축복하기를 원했다. 잘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자녀들은 부모의 성향과 단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요셉이 알고 있는 아버지 야곱은 어떤 사람일까? 아버지는 늘 큰 자보다 작은 자를 앞세웠던 사람이다. 동생이었던 아버지 야곱은 그의 형 에서의 장자권을 취했다. 그는 언니 레아보다 동생인 라헬을 더 사랑했다. 그는 또한 다른 형들보다 막내인 자신과 베냐민을 더 사랑했다. 이런 아버지의 성향이 비극을 낳았음을 요셉은 알고 있었다. 야곱과 에서와의 관계는 멀어졌다. 레아와 라헬의 관계는 질투와 긴장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 요셉 자신과 형제들 간에는 적대감이 가득했다. 그 결과 요셉은 상처를 입었다. 그의 인생은 구덩이에 던져졌고, 노예로 팔렸으며, 이후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야곱의 편애로 인해 요셉은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 그런 아버지 야곱이 이번에는 차남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뻗어 그를 장자로 축복하고 있는 것이다. 요셉은 기겁을 했다. ‘아버지 제발’이라고 외쳤을 것이다. 그는 이것이 형제간에 또 다른 불화를 낳지 않을지 염려했을 것이다. 야곱은 왜 므낫세보다 에브라임을 앞세웠을까? 그 이유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우리는 먼저 야곱이 왜 자신의 손자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야곱이 그의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기 전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창 46:3-4,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야곱은 자신의 가족이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을 그곳에 머물게 될 것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의 자녀 세대가 큰 민족을 이루었을 때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살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요셉의 자녀들이었다. 그들은 애굽에서 태어나 애굽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자랐다. 그들의 어머니는 ‘아스낫’이라는 애굽 여인이었다. 유대인들은 모계 혈통을 중시하는 민족이다. 아빠가 유대인이라도 엄마가 유대인이 아니면 그 자녀는 유대인이 아니다. 따라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다른 형제들의 자녀들과는 다른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야곱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애굽의 혈통이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서 다른 형제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자신의 후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피부색도, 언어도, 문화도 다른 그들을 다른 손자들이나 아들들이 곱게 받아줄 리 만무했다. 야곱은 여기서 ‘신의 한 수’를 생각해 낸다. 그것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자신의 아들이 되면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상속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라고 선언한다. 야곱은 자신의 유업을 상속할 자격이 없던 손자들에게 ‘너희는 내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들이 자신의 아들임을 선언한 것이다.
야곱이 이 선언을 할 때 그는 벧엘에서의 언약을 회상하며 그것을 요셉에게 말해준다. 창 48:3-4,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겠다,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이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언약을 야곱에게도 주셨고, 그를 통해 그 언약을 이어가게 하셨다. 야곱이 벧엘에서의 언약을 요셉에게 말해주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요셉과 그의 자녀 세대를 통해서도 계속 이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입적시키려 한다.창 48:5-6,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에게 르우벤과 시므온과 같은 아들의 지위를 보장한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유산 상속자임을 명백히 선언한다. 야곱이 손자들을 아들로 삼은 것은 그들에 대한 양육권을 갖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에게 아들이 가질 수 있는 상속권을 주기 위함이다. 이로써 야곱은 장자가 가질 수 있는 두 배의 상속권을 요셉에게 준 것이다. 즉 요셉을 장자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역대기의 기자는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대상 5:1-2,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야곱은 이어서 자녀들을 위한 축복 기도를 한다. 창 48:15-16,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야곱은 자신의 조상들이 이어온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이 자녀들을 통해서도 이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야곱은 ‘자신을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하나님’이 이 아이들에게도 복을 주실 것을 기도한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 때문에 많은 위기를 겪어야 했다. 야곱에게 일어났던 모든 위기는 언약을 받은 자로서 그가 치러야할 대가였다. 그것은 또한 결국에 그를 언약의 전달자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자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야곱이 축복할 때 그의 오른손을 차남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이다. 요셉은 아버지의 오른손을 들어 다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야곱은 이렇게 반응한다. 창 48:19:,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왜 에브라임이었을까?야곱은 그를 장자로 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던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순종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인간의 조건이나 상식에 매이지 않고, 이를 넘어서서 역사하실 때가 있다.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를 주목했고, 죽을 때조차 그 섭리를 따르기를 힘썼던 것이다. 이 야곱의 축복대로 에브라임은 출애굽 이후 장자지파가 된다. 여호수아가 이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고, 성막은 에브라임 지파 땅인 실로에 세워진다. 그리하여 에브라임 지파는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 과정에서 전체 이스라엘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유업을 이어가는 장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결국 야곱의 축복은 하나님의 섭리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에브라임이 그 조상들의 유업을 잇는 장자가 되었다는 것이 우리와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 바울은 말한다. 갈 3:26, 29,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한다.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유업을 잇는 상속자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우리 역시 자격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예정으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이다. ‘너는 내 것이다’라고 인 쳐주신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이 받은 유업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받은 유업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가나안 땅을 상속받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한다. 히 11:8-1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는 것이다. 베드로 역시 그 유업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벧전 1:3-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우리는 결국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우리를 위해 하늘에 간직하신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이어가는 상속자인 것이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 유업을 잇기 위해 대가를 지불 했다. 요셉은 야곱의 편애로 인해 형제들에게 버림 받았고 노예로 팔려갔다. 그것은 요셉에겐 상처였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조상들의 언약을 이어가는 자가 되었기에 상처가 상처로 남지 않고 축복이 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대가를 지불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부모님들 때문에 자녀인 내가 상처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상처가 상처로 남지 않기 위해 우린 하나님의 경륜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상처를 딛고 은혜의 유업을 이어가는 자가 되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언약을 위해 대가를 지불 하는 자가 될 때 우리는 언약의 계승자로 남게 되는 것이다.
‘므낫세(מנשה)’라는 이름은 ‘잊어버리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나싸(נשה)’에서 온 말이다.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라는 뜻으로 요셉은 장남의 이름을 지었다.요셉은 므낫세를 얻기까지 잊고 싶은 긴 상처의 시간들이 있었다. 요셉은 이어서 갖게 된 둘째 아들의 이름을 ‘에브라임(אפרים)’이라고 짓는다. ‘에프랏(אפרת)’은 ‘열매를 많이 맺음’이란 뜻이다. 에프라임(אפרים)은 히브리어 쌍수로 ‘두 배의 결실’이란 뜻이다.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뜻으로 요셉은 둘째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요셉이 번성한 것은 다른 곳이 아니라 그가 고난을 겪었던 땅에서였다. 요셉에게 있어서 에브라임의 형통은 고난의 시간이었던 ‘므낫세의 시간’이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의 삶에게도 부당하게 주어지는 시간들이 있다. 그래서 상처 받는 ‘므낫세의 시간들’이 있다. 원가족 내에서 우리는 부모님들로 인해 상처 받을 수 있다. 새로 들어간 직장에서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시기를 지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시간들을 감수하며 하나님과 동행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더 큰 목적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시는 섭리의 시간이 된다. 그래서 이 ‘므낫세의 시간’은 나를 연단하는 시간이다. 이 기간에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환경과 사람들은 어쩌면 나를 에브라임의 축복으로 인도하는 훈련 교관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야곱이나, 요셉의 삶에 일어났던 혹독한 고난의 시간은 결국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었다. 그들의 고난은 결국에 복을 주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던 시간이었다. 그리하여 언약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거대한 일부분을 살다 간 것이었다. 우리에게 다가온 고난이 비록 힘들지라도 우리 역시 하나님의 섭리의 일부를 지나고 있음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언약의 유업을 선택한 이유로 손해를 보고 고난을 당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데에는 반드시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이기에 우리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잇는 자로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말씀하셨다. 온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도 오직 하나님의 계획이 영원히 서게 될 것이다. 힘든 상황을 탓하거나, 나를 부당한 상황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원망하지 말고, 우리는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기대해야 한다. 우리는 내가 받았던 상처가 치유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상처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상처는 원죄 아래 태어나는 인간 조건이다. 중요한 것은 상처를 십자가의 영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도 용서해야 한다. 내 모든 고난의 일을 잊어버리는 ‘므낫세의 은혜’가 있어야,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는 ‘에브라임의 은혜’가 열리는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이어가는 삶이 되기를 축복한다. 므낫세의 고난의 시간을 지나 에브라임의 결실의 시간을 맞이 하게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 다음 세대에도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전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