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1월 1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4 완전한 구원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출 6:6-7)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되는지 그 여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과정이 네 가지 동사로 표현되어 있다. ‘빼내다, 건지다, 속량하다, 삼다’이다. 오늘은 이 네 동사를 중심으로 성도의 구원에는 어떠한 과정이 필요한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애굽이라는 현실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200만 민족이 그곳을 빠져나오는 데는 엄청난 힘의 전환이 필요했다. 당대 최고의 제국과 제국의 권력자 바로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출애굽의 계획을 모세에게 알리신다. 출 6:1,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오랫동안 잠잠했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일하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여호와’라고 자신을 알리신다. ‘여호와’는 행동하시는 하나님, 성취하시는 하나님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은 약속을 주신 하나님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약속을 받았으나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하나님은 이제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모세에게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신다.
여호와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것을 이제 실행하시려는 하나님의 행동이 네 개의 동사로 나타난다. 첫번째 동사는 ‘빼내다’이다.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출6:6).’ ‘뵈호쩨티 에트켐 미타하트 씨블롯 미쯔라임 והוצאתי אתכם מתחת סבלת מצרים’ 호쩨티는 ‘야짜’(יצא)에서 온 말이다. 야짜는 ‘밖으로 나가다’란 뜻이다. 이 동사에 헤이(ה)가 붙으면 ‘나가게 하다’라는 뜻이 된다.어디서 나가게 하는가?‘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이다.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강성해지자 그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했다. 그들에게 바로 자신을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했다. 그들은 탄식하며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 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다. 기억하시는 하나님이 이제 행동하기 시작하셨다. 우리의 인생과 역사의 희망은 이처럼 기억하시는 하나님께 있다.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은 사람을 노예로 살게 하는 시스템을 상징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무거운 짐을 벗어나지 못한다. 노동의 짐, 죄의 짐 밑에서 그냥 신음하며 산다. 이런 시스템에 잘 적응하며 사는 사람들, 맷집이 강한 사람들이 문제다. 차라리 힘들다고 탄식하며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이 행동하실 텐데, 하나님 앞에서는 약한 게 은혜다.
하나님의 행동을 나타내는 두번째 동사는 ‘건지다’이다.‘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출 6:6).’ 지난 주 우리는 출애굽의 목적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세우는 것임을 살펴보았다. 이스라엘은 애굽에 머물며 바로의 압제 아래 고된 노동으로 신음해야 할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가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존재였다. 즉, 이스라엘은 노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예배하는 존재였다. ‘예배하는 자’,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세우고자 그들을 애굽의 상황에서 건져내셔야 했다.‘건지다’라는 동사 ‘호쩰티’는 ‘나짤’이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나짤(נצל)’은 ‘구출하다, 해방하다, 분리하다’라는 뜻이다. 역시 ‘헤이(ה)’가 붙어서 ‘분리시키다’라는 말이다. 애굽에서 꺼낸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애굽의 잔재들이 남아 있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분리해 내셔야 했다. 출애굽하여 광야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움이 올 때마다 애굽을 그리워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려 했다. 구원 받은 성도들도 힘든 일이 닥치면 옛 생활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구원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옛 생활의 잔재를 처리하지 못하여 옛 생활을 왔다 갔다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옛 생활에서 완전히 빠져 나와야 우리는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행동을 나타내는 세번째 동사는 ‘속량하다’이다.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출 6:6).’ 속량하다는 히브리어로 ‘가알티’다. 이는 ‘가알(גאל)’에서 온 말인데, ‘되사다, 기업을 무르다’란 뜻이다. 이것은 원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값을 치르는 것을 말한다. 보아스가 나오미의 기업을 되찾아 주기 위해 돈을 지불한 것이 바로 ‘가알’이라는 행위다. 이러한 행위를 한 보아스 같은 사람을 ‘고엘’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 ‘고엘’이 되셨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되돌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신 것이다.
하나님의 행동을 나타내는 네번째 동사는 ‘삼다’이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출 6:7).’ 영어로는 take, 히브리어로는 라카흐(לקח)다. 하나님이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소유된 백성으로 취하실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네 가지 동사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갈망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세상에서 구출해 내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당신의 백성을 온갖 사로잡힌 것에서 빼내어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어떠한 것에도 소유되지 않은 백성이 되기를 열망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자신의 열망을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셨다. 그런데 그 열망이 백성들에게 좀처럼 전달되지 않았다. 왜 일까? 출 6: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혹한 노역으로 인해 마음이 상해 있었다. 일상의 힘겨운 현실에 매몰되어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의 행동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직접 행동하기 시작하신다. 그것이 바로 열 가지 재앙이었다.
첫번째 재앙은 나일강을 피로 변하게 하신 것이다. 나일강은 애굽사람들에게는 생명의 근원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 강을 신으로 숭배했다. 에스겔서에 이런 말씀이 있다. 겔 29:3,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나일강은 다름 아닌 신격화된 바로의 소유이자 그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피로 변하게 하심으로 바로의 정체를 드러내셨다. 그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피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두번째 재앙은 개구리 재앙이었다. 나일강이 범람했을 때 생긴 웅덩이에서 개구리가 자랐다고 한다. 개구리의 등장은 곧 풍성한 수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애굽인들은 개구리 모습을 한 헤케트 신을 섬겼다. 그러나 나일강이 피로 변하자 개구리들이 애굽 땅으로 올라왔다. 바로의 침실과 백성들의 집안까지 들어와 온 애굽 사람을 괴롭혔다. 그들이 숭배했던 신이 그들을 괴롭히는 대상이 된 것이다. 두번째 재앙 역시 헛된 우상들을 숭배하며 살아가는 애굽의 실체를 폭로하는 것이었다.
세번째 재앙은 애굽 땅의 티끌이 이로 변하는 재앙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가 생겼을까? 이 이가 사람들과 가축에 달라붙어 물어 뜯었다. 바로의 요술사들도 마술로 이를 생기게 하려 했지만 하지 못했다. 그들은 바로에게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라고 보고한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재앙들은 분명 애굽 사람들을 벌하는 도구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재앙들이 애굽의 실체를 알게 하는 하나님의 계시였다. 하나님은 바로와 애굽의 실체를 드러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루라도 빨리 그곳을 빠져나오고 싶도록 만드셨다.
네번째 재앙은 애굽 사람들의 집에만 파리 떼가 가득하게 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고센 땅에는 파리가 없게 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으로 구별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알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더이상 애굽에 남는 것이 위기임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애굽과 분리되어 광야로 나가는 것이 오히려 안전한 것임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러한 반복적인 재앙들을 통해 이백만 가량의 이스라엘 민족은 이제 모세의 말을 듣고 움직여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도 아직 애굽을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애굽의 실체를 알지 못해서이다. 그리하여 애굽에서 누리던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한 채 애굽에서 누리던 생활을 지속하려 한다. 그들이 마시던 물이 피로 바뀌어야 그들은 자각하게 된다. 그들이 숭배했던 것이 그들을 괴롭히는 개구리로 변해야 그들은 세상에서 누렸던 풍요가 그들에게 참된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재앙은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그들을 점령했던 옛 생활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 재앙들은 애굽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반드시 옛 생활에서 출애굽 해야 함을 알게 하는 도구인 것이다.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더이상 애굽에 남아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애굽에서 나와 광야로 가야 한다. 거기서 철저히 애굽의 잔재들과 분리되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 한 분을 예배하는 백성을 얻으시는 것이다. 더이상 애굽 바로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로 변화된 사람을 얻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소유된 백성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렇게 선포한다. 사 43:19-21,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어야 우리의 삶 속에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기대 할 수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출애굽이 있었던 유월절을 기념하며 네 번의 포도주 잔을 마신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출애굽 과정에 있었던 네 번의 하나님의 행동을 기념하는 것이다. 첫번째는 그들을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에서 빼낸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것을 ‘The Cup of Sanctification, 구별의 잔’이라고 한다. 두번째는 그들을 애굽의 노역에서 건진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것을 ‘The Cup of Deliverance, 구원의 잔’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며 잔을 나누셨다.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눅 22:17). 예수님은 두번째 잔인 구원의 잔을 받으시고 나누신 것이다. 세번째는 그들을 속량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것을 ‘The Cup of Redemption, 구원의 잔’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저녁을 드신 뒤에 이 세번째 잔을 나누시며 말씀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19)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피로 대가를 지불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속량하는 고엘이 되어 제자들에게 세번째 잔을 나누어주신 것이다. 네번째 잔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것을 ‘The Cup of Restoration, 회복의 잔’이라고 한다. 그들이 다시 하나님 백성으로 회복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유월절 만찬은 이 네 번째 잔을 마심으로 종료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만찬에서 포도주 잔을 드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26: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는 그 날까지 그 잔을 미루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취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그 최종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애굽의 바로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의 소유된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을 때 우리는 장차 아버지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새 포도주의 잔을 들게 될 것이다. 오늘은 이런 소망을 가지고 성찬식을 하려고 한다. 이제 2022년 새 해가 밝았다. 하나님께서 올 한 해 새 일을 행하시도록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