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1월 8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5 믿음의 표적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출 12:13-14)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종착지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음의 천사를 통해 언제 죽을 것이라는 고지를 받는다면 그 때 우리의 기분이 어떨까?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네플릭스 드라마 ‘지옥’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의 출애굽 이야기다. 출애굽은 장자의 죽음이라는 마지막 재앙 이후에 가능했다. 하나님은 마지막 재앙으로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장자와 가축들의 죽음을 계획하셨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알리셨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내보내지 않았다. 왜 처음 난 것들의 죽음이 필요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이 죽음의 재앙을 피해서 출애굽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자의 죽음을 피할 방법에 대해 알려주셨다.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그들의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것이 표적이 되어 죽음의 천사가 그들을 넘어갈 것이라고 하셨다. 여러분이 당시 애굽에 있었다면 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피를 바르라고?’ ‘왠 피?’ 피를 바르려면 유월절 4일 전에 어린 양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혹 흠이라도 있는지 꼼꼼히 살펴야 한다. 그 후 니산월 14일 유월절, 해질 때 그 양을 잡고 그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야 한다. 이런 걸 피곤한 일로 여겼다면 그런 사람에게 출애굽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은 사냐 죽느냐가 달린 문제였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출 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가 너희를 위한 표적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표적은 히브리어로 ‘오트’다. ‘신호, 깃발, 표시’라는 뜻이다. 이 말은 ‘동의하다’라는 뜻의 ‘우트’라는 동사에서 온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행히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믿음을 나타내는 표적이 되었다.
바로는 아홉 번 째의 재앙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굴복 되지 않았다. 그의 강팍함이 장자의 죽음이라는 초강수 재앙을 오게 했다. 그리하여 니산월 14일 밤, 애굽 전역에 장자들의 죽음이 있었다. 장자의 죽음으로 이 날 애굽에서 큰 부르짖음이 있었다. 그 나라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은 집이 하나도 없었다. 반면 믿음으로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는 죽음의 권세가 유월(pass over)하는 은혜가 있었다. ‘넘을 유(逾)’에 ‘건널 월(越)’, 그래서 이 날이 ‘유월절(Passover)’인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어린 양을 잡아 피를 흘리게 했을까? 그것은 장자를 대신해서 죽어야 할 ‘대속 제물’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레위기서는 말한다. 레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하나님은 어린 양의 생명으로 이스라엘 장자들의 생명을 대신하게 한 것이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어린 양의 피가 이스라엘 장자들의 죄를 속하여 그들의 죽음을 면하게 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유월절 사건을 이렇게 기록한다.히 11: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여기서의 표현대로 유월절의 핵심은 피 뿌리는 예식에 있었다. 어린 양을 죽여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이었다. 장자를 죽이려고 온 죽음의 사자는 그 피가 뿌려진 집은 그냥 넘어갔다. 넘어가는 조건은 한 가지였다. 그 집에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지의 여부였다. 누가 착한 애고, 누가 나쁜 애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집에 믿음의 표적이 있는가 그것이 기준이었다.
이 어린 양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다. 지금도 사마리아에 가면 해마다 유월절에 양을 잡는다. 3500년 이어져 온 행사인데, 이 때 어린 양은 나무에 달려 물과 피를 쏟는다. 예수님도 유월절 어린 양처럼 나무에 달려 물과 피를 쏟으셨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처음 보았을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라고 외쳤다. 예수님은 출애굽 당시 양을 준비하던 날인 니산월 10일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슨 흠이라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빌라도 역시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아무 흠이 없는 유월절 희생 제물로 준비되셨고, 정확히 유월절 양 잡는 시각에 죽임을 당하셨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한다. 또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죄인인 우리가 죄의 대가를 지불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약속한다. 그러면 어떻게 죄인인 우리가 의인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을 통해 얻는 것이다. 한자어로 의(義)는 ‘양 양(羊)’과 ‘나 아(我)’가 결합된 단어다. 양(羊) 아래 내(我)가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나 아(我)’는 또 ‘손 수(手)’와 ‘창 과(戈)’가 결합된 단어다. 종합하면, 내 손에 든 창으로 양을 잡아 그 아래 있는 모습이 바로 ‘옳을 의(義)’자인 것이다. 즉, under the blood, 어린 양의 피 아래 있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는 방법인 것이다.
자 그런데, 피 흘림이 왜 필요한 것일까? 히브리서는 말한다. 히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를 대신한 누군가가 반드시 피 흘려 죽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죄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요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죄에 대한 대가를 스스로 치루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요 6:53-54,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시면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피 흘리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이다. 이처럼 우리의 죄를 대신해 예수님께서 피 흘리셨음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게 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게 되는 것이다.
출애굽 때 애굽에 있던 모든 장자에게 죽음이 고지되었던 것처럼 우리는 이미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죽음과 심판에 대해 고지를 받았다. 성경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어떻게 우리는 죽음 이후 이 최후 심판을 피하게 되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피 흘리셨다는 사실에 동의해야 한다. 그랬을 때 그 믿음이 표적이 되어 죽음의 사자가 나를 넘어가는 것이다. 그 때 죽음의 사자는 우리가 구원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오직 예수님의 피가 있는가, 그것을 보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이러한 생명과 죽음의 원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의 보혈에 동의하지 않고, 그들의 인생에서 그냥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길 바란다. 그들은 자신은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죽으면 좋은 세상에 갈 것이라고 희망한다. 출애굽 당시 애굽의 장자들도 어린 양의 피 없이 그냥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길 희망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희망과 달랐다. 출애굽 당시 문기둥에 발라진 어린 양의 피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주는 너무도 선명한 증거다. 오직 그 피에 동의할 때 그것이 표적이 되어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출애굽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동의할 때, 우리는 더이상 죄와 사망에 노예처럼 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나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지 못하도록 여러가지 타협안을 제시했다. ‘너희의 원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되 광야로 가지 말고 애굽 땅에서 드려라’ 모세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바로는 또 말한다. ‘그러면 너희가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적당히 믿으라는 것이다.바로가 고집을 부리자 하나님은 다시 재앙을 내리신다. 바로는 재앙으로 얻어 터지면서도 그 완고함을 거두지 않는다. 그는 다시 제안한다. ‘애들은 놔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겨라’ 이에 바로는 메뚜기 재앙과 흑암의 재앙을 겪게 된다. 그 뒤 그는 다시 타협안을 제시한다.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모세는 이 제안도 거절한다. 하나님 뜻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바로는 이렇게 말한다. 출 10:28,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
죽음이라는 권세 앞에 눌리지 않을 인생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싸울 때 제일 많이 하는 대사가 ‘너 죽을래?’이다. 바로와 같은 세상 권력자들도 너 죽지 않으려면 내 말 들으라고 위협한다. 그러한 바로의 위협을 꺾고, 출애굽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정말 죽고 사는 권세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천하의 바로도 마지막 열 번 째 재앙인 장자들의 죽음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는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사망 권세가 넘어갔음을 보게 되었다. 애굽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죽고 사는 권세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분명히 보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이상 바로를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역시 더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으로 위협하며 붙잡아 둘 수 없었다. 그래서 항복한다. 출 12:31-32,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결국 애굽 장자들의 죽음과 어린 양의 대속의 죽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이 가능했다.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로 죽음이 건너간 이 날을 유월절로 지키게 하셨다. 그리고 이 유월절을 한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고 하셨다.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출애굽 한 이 날을 새로운 출발로 삼으라는 것이었다.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유월절이 우리 인생의 첫 달이 되게 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인생의 출발점인 것이다.
그러나 사단은 바로처럼 우리를 사망 권세로 위협한다. 우리가 예수 믿고 인생의 출애굽을 하지 못하도록 여러가지 타협안으로 우리를 회유한다. 그리고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애굽의 흔적들을 가지고 우리를 참소한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다. 우리는 그 피 아래 머물러야 한다. 우리의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의 의로움을 붙잡아야 한다. 히브리서는 말한다. 히 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우리는 사단이 우리를 정죄하고 참소할 때마다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야 한다. 계시록에서 요한은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계12:11)” 사단을 이겼다고 기록한다.우리도 사단을 향해 선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모든 죄로부터 깨끗케 했다. 예수님이 내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셨다. 너는 십자가에서 이미 패배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의 선포를 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면한다. 히 10:19,2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우리는 평생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가는 데 승리해야 한다. 그렇게 이긴 성도들이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장차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을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고 정의 한다. 성도는 이처럼 어린 양을 따르는 자이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그러나 어린 양을 따르는 것은 이 세상에서 매력적인 것이 아니다. 어린 양이 한 것은 그저 묵묵히 희생의 피를 흘린 것이다. 남을 위해 자신은 정작 피를 흘리며 소멸하는 삶이었다.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자신을 드렸다. 그런데 그 피에, 그 희생과 순종에 능력이 있는 것이다. 사실 사단이 정말 무서워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힘을 가진 자가 아니다. 어린 양과 그 분이 흘리신 보혈을 믿고, 어린 양이 가신 길을 묵묵히 순종하며 따르는 자들이다. 의로우신 분이 순종하신 길을 피 흘리더라도 가는 자들을 사단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셨던 예수님은 이제 만 왕의 왕으로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이다. 바라기는 그 때까지 예수님의 보혈을 믿음의 표적으로, 믿음의 깃발로 흔들며, 변함없이 어린 양을 따르는 주의 백성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