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1월 15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6 백성의 탄생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출 16:12)
이름은 한 사람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한 평생을 살면서 내 이름이라는 굴레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시켜가는 일을 한다. 출애굽기의 히브리 성경 이름은 ‘쉬모트(שמות)’이다. ‘이름들’이란 뜻이다. 출애굽기 1장에는 애굽에 내려간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이 나온다. 그러나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은 애굽에 430년간 살면서 이름 없는 사람들이 된다. 그들은 바로가 만든 애굽의 시스템에서 부속품처럼 노역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노예였던 그들이 이름으로 불려졌을 리 만무하다. 오늘은 노예였던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가진 자들로 거듭났는지 그 과정을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출 16: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이스라엘 백성은 첫째 달 십오일에 출애굽을 했다. 둘째 달 십오일은 그들이 애굽에서 나온지 딱 한 달이 되는 때였다. 출애굽의 환희를 노래했던 그들의 입에서 이제 원망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한 달 만에 먹을 것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가도 가도 끝없는 광야에서 모두 다 굶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애굽에서 자기 집 문기둥에 양의 피를 바를 때만 해도 그들에겐 믿음이 있었다. 홍해를 건너면서 그들에겐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환호와 감격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과 감격은 광야 생활 한 달 만에 바닥이 난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끄실 미래를 믿음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과거 애굽 시절을 동경하기 시작한다.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가 좋았는데…’ ‘거기서 떡을 배불리 먹던 때가 좋았는데…’ 그들은 그렇게 과거를 미화하고 있었다. 애굽에서 노예로 지내면서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던 때를 그새 잊은 것이다. 그 노예생활에서 꺼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당장 현실에서 부딪히는 배고픔에 주목한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어떻게 좀 해보라고 난리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인 출애굽기 16장에는 원망이란 단어가 여섯 번 나온다. 원망은 히브리어로 ‘텔루나(תלונה)’이다. 이 단어의 어근은 ‘룬(לון)’인데 ‘원망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유숙하다, 머물다’란 뜻도 있다. 광야에서 오랜 기간 유숙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주 원망에 빠지게 되었음을 연결해 볼 수 있는 단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여 광야에 나왔지만 그들의 사고와 삶의 방식은 여전히 애굽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출애굽의 기적을 맛보았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단 광야라는 현실 속에서 쉽게 원망에 빠진다. 원망은 이렇게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향점은 분명 가나안이라는 미래였다. 그러나 그들은 힘든 광야를 만나자 원망했고, 애굽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출 16: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제 막 구원의 걸음마를 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아셨다. 그래서 원망하는 그들을 야단치시기보다는 양식을 주시겠다고 친절하게 약속하신다. 그래서 주신 양식이 ‘만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만나를 주신 목적이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하나님은 백성이 나가서 하루 먹을 만나를 날마다 거두게 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시험하기 원하셨다.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신 것은 단순히 그들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목적은 배고플 때마다 쉽게 원망하는 백성들을 만나의 규례를 지키게 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자들로 만들기 원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면서 가르치기 원하셨던 것은 무엇일까? 첫째는, 광야에서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출 16: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광야는 양식을 기대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먹이셨다. 그러면서 그들의 원망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바꾸어지길 원하셨다.
둘째,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이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삶을 가르치기 원했다. 출 16: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매일 각 사람의 수효대로 만나를 거두게 하셨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매일 매일 의지하고 기대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게 하셨다. 완전한 양식의 배분, 부의 배분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이 가르치시려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은 생존을 위해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내일 일을 위해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다음 날 아침까지 만나를 남겨두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내일을 위해 만나를 남겨둔 사람들이 있었다. 만나를 남겨두었다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그들의 불안을 보여주는 행위였다. 남겨둔 만나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나? 결국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못 먹게 되었다. 하나님은 왜 각 사람이 먹을 만큼만 만나를 거두라고 하셨을까? 만나를 많이 거두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두어도 모자라지 않았다는 것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가 먹을 만큼만 거두고 함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사는 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라는 것이다.
세째,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 안식일을 지키는 삶을 가르치기 원했다. 출 16:22-23,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하나님은 여섯째 날에 두 배의 만나를 거두게 하셨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는 만나를 거두러 나가도 허탕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동안 이런 방식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을 받았다. 하나님은 왜 그토록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을 하셨을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인가? 그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6일 간의 창조를 마치셨다. 첫 번째 안식일에 세상은 완전 했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세상은 더이상 바꾸거나 개선할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모든 것이 존재했고, 모든 것은 제자리에 놓여졌다. 하나님은 이 일곱 째 날 안식일에 쉬셨다. 지쳐서 쉬신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완전 했기에 쉬신 것이다.
안식일은 히브리어로 샤밧(שבת)이다. 동사로 쓰일 때는 ‘그치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안식일에 일을 그치는 이유는 단지 휴식을 누리고 재충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안식일에 우리의 일을 그치는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완전한 것을 인정하는 믿음의 행위다. 우리가 이 날 일하며 세상을 통제하지 않아도 우주는 조화롭게 존재하며 움직인다. 우리가 안식일에 일을 멈추는 것은 내가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임을 인정하는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그러한 믿음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과 어떻게 다를까? 하나님은 하나님이 쉬셨던 일곱번 째 날을 거룩하고 복되게 하셨다. 따라서 안식일을 지킨 사람은 그 거룩하고 복된 시간 안에서 하나님이 누리셨던 처음 안식을 똑같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안식일에 우리는 더 이상 고용주도 고용인도 아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아니다. 그저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세우신 하나님의 백성일 뿐이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킬 때 우리는 이 분주한 세상속에서도 하늘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과 경쟁하느라 초조해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안식일이라는 시간에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축복에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날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믿음의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고 누리기 위한 것이다.
아직 세상의 모든 나라를 다 가보진 않았지만 이스라엘만큼 창의력이 넘치고 활력이 넘치는 나라를 보지 못했다. 19세기에 아하드 하암(Ahad Ha’am)이란 사상가는 “유대인들이 샤밧을 지켰다기 보다도 샤밧이 유대인들을 지켰다(More than Jews have kept the Sabbath, the Sabbath has kept the Jews.)”라고 말했다. 물론 유대인들이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샤밧을 지키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들이 오늘날까지 믿음으로 지킨 샤밧이 이들을 복되게 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한 노역에 시달렸다. 그들은 안식일도 없이 쉬지 않고 일을 했을 것이다. 애굽의 주인 바로가 만든 세상 시스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였다. 그들은 바로의 제국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창조의 영광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안식일을 지키게 하신 것이다.
모세는 신명기서에서 하나님이 만나를 주신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나 지금이나 우리 인간에게 먹고 사는 문제는 중요하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점점 더 소비하는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더 많이 벌어서 더 좋은 물건을 소비하는 게 많은 사람들의 목표가 되고 있다. 그런 사회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점점 더 소비적인 자아가 된다. 그런데 소비적 자아는 탐욕의 자아다. 끊임없이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달려가는 자아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 한병철 씨는 지금의 우리 사회가 ‘피로사회’이며 자기가 자기를 착취하는 사회라고 진단한다. 예나 지금이나 풍요를 추구하게 하는 것이 바로 바알 신앙이자 맘몬 신앙이다. 세상 시스템은 더 많이 소유한 자가 쉼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더 많이 소유하기까지 사람들은 좀처럼 쉴 수 없는 게 세상 시스템의 아이러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빵 때문에, 소유 때문에 떠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떡으로만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들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만나를 통해 가르치기 원하신 교훈이었다.
예수님은 만나와 관련하여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요 6:48-51,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생명의 양식이다. 많이 받은 자나, 적게 받은 자나 모두가 모자라지 않게 예수님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만나를 통해 보여주기 원하셨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분이 우리 생명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생명의 양식으로 취할 때 우리는 이 세상 시스템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만나를 거두고 그것을 먹으면서 그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세워지길 원하셨다. 그들은 결국 40년간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며 안식일을 지키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거듭난다. 실로 만나는 이름도 없이 제국의 소모품으로 살아가던 히브리 노예들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만들어 간 하늘의 양식이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으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세워진다. 우리는 세상의 시스템 속에서 끊임없는 노동에 시달리며 소모품처럼 살아가야 하는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이 제공하는 양식과 그들이 약속하는 부로 결코 배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으로 사는 자들이다. 광야의 시간이 헛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과거라는 애굽을 탈출해야 한다.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머물러 있으면 원망 밖에 나올 게 없다. 광야가 힘든 곳이지만 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거듭 나야 한다. 광야는 마지 못해 끌려가는 곳이 아니다. 광야는 세상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탄생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인 것이다. 바라기는 이 광야에서 원망하는 노예 근성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굳건히 세우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