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1월 22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7 백성의 조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 19:5-6)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될 때 인간은 살아남는 것, 그 자체에 온통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살아 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어떠한 존재로 살아가는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힘든 삶을 살았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노예로서의 힘든 삶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의 기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살아서 광야로 나왔다. 광야로 나온 그들에게 또 다른 명제가 주어졌다. 그것은 그들이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오늘은 이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시내 광야에 이른다. ‘삼 개월이 되던 날’은 ‘삼 개월 후’가 아니라 ‘세번 째 달이 되던 날’을 말한다. 그들은유대력으로 세번 째 달인 시반월에 시내산에 도착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가나안으로 가는 지름길을 놔두고 시내산까지 와야 했을까? 그것은 출애굽의 목적이 단순히 이 민족을 애굽에서 가나안 땅까지 지리적으로 재배치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애굽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제 바로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들은 이 새로운 정체성에 맞는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가진 존재로 세워져야 했다. 그래서 이들은 가나안에 이르기 전 하나님의 언약에 눈을 뜨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시내산은 하나님께서 염두에 두신 장소였다. 출 3: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여기서 ‘이 산’이 바로 시내산이다.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난 곳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던 그 거룩한 땅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세우고 싶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다시 시내산에 이른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출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떠한 존재로 보시는지 알 수 있다. 첫번째는 ‘하나님의 소유’이고, 두번째는 ‘제사장 나라’이며, 세번째는 ‘거룩한 백성’이다. ‘소유’는 히브리어로 ‘세굴라(סגלה)’다. 세굴라는 ‘특별한 보물’이란 뜻이다. 특별한 보물을 아무에게나 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아끼시는 특별한 존재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우상에게 눈을 돌려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 것이다. ‘제사장 나라’는 히브리어로 ‘맘레켓 코하님(ממלכת כהנים)’이다. 여기서 ‘맘라카(ממלכה)’는 왕의 통치를 받는 왕국을 말한다. 당시 제국의 왕들은 어떠한 존재였나? 그들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힘의 우위를 가지고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려는 자들이다. 그러나 제사장 나라는 제사장이 다스리는 나라를 말한다. 제사장이 하는 일은 정복이 아니라 축복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민족을 축복하는 사명을 가진 나라가 된 것이다. ‘거룩한 백성’은 히브리어로 ‘고이 카도쉬(גוי קדוש)’다. ‘거룩한’이란 형용사는 하나님께나 붙을 수 있는 수식어이다. 그런데 어떻게 일개 민족이 ‘거룩한 백성’이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닮은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자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셨다. 그런데 그들이 그러한 존재가 되기 위해선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의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반월 여섯 째 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과 그에 따른 언약들을 주신다. 이날은 유월절 출애굽 이후 50일 째 되던 날인 바로 오순절이다. 유대인들은 이 날을 ‘하그 마탄 토라 (חג מתן תורה)’라고 부른다. ‘토라를 주신 명절’이란 뜻이다. 유대인들은 이 날을 자신들이 하나님과 결혼한 날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이 날 받은 십계명을 결혼 언약 문서로 여기는 것이다. 유월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작되었던 출애굽 구원의 역사는 이처럼 오순절을 통해서 완성된다. 이들은 단지 해방된 노예가 아니라 오순절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언약 백성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존재하도록 하나님은 이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 율법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십계명이다.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겠다. 첫째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이다. 둘째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이다. 셋째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이다. 이 처음 세 가지 계명은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제 애굽의 신들이 이들이 주인이 될 수 없다. 가나안 땅의 바알이 이들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이들은 오직 하나님을 그들의 주권자로 따라야 하는 것이다. 넷째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이다. 다섯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이다. 여섯째는 ‘살인하지 말라’이다. 이 세 가지 계명은 모두 생명의 창조 원리에 관한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주인임을 기억하는 날이다. 이 안식일에 모든 인간은 노예도 아니고, 고용주도 아니다. 하나님이 생명 주신 창조물로 존재할 뿐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해서 이 세상에 존재한 것이 아니다. 부모님을 통해 우리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살인은 인간에 대한 범죄만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살인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범죄다. 따라서 이 세 가지 명령들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 출처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일곱째는 ‘간음하지 말라’이다. 여덟째는 ‘도둑질하지 말라’이다. 아홉째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이다. 이 세 가지는 사회를 온전히 유지하게 하기 위한 계명이다. 결혼은 인간 사이의 가장 신성한 언약이다. 이것이 잘 유지될 때 건강한 가정과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복과 존귀함을 파괴하는 것이다. 거짓 증거하지 않는 것은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는 전제 조건이다. 진실이 죽으면, 정의가 죽고, 한 사회의 자유와 존엄이 파괴되는 것이다. 마지막 열번째 계명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이다. 소유하려는 욕망을 억제하는 것은 모든 사회의 가장 큰 도전이다. 이웃의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할 때 시기나 폭력이 따른다. 그러한 시기와 폭력을 통해 관계는 파괴되고 거룩은 깨어지는 것이다.
이 십계명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거룩에 헌신하라는 것이다. 십계명은 다름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행동 지침이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국가가 되기 이전에 거룩함에 대한 헌신이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것을 지키는데 헌신해야 했다. 이들은 하나님이 거룩하게 지으신 다른 사람들의 거룩함을 지키는데 헌신해야 했다. 이들은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열방을 거룩하게 하는데 헌신해야 했다. 이처럼 거룩에 대한 헌신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시내산에 머물며 그들 마음에 새겨야 했던 개념이었다. 이러한 과정이 없이 그들에게 가나안이 주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우상이 가득한 땅에서 거룩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금새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들은 오순절, 시내산에서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보며 두려워 떨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를 온 민족이 함께 경험했기에 그들은 가나안 땅에 이르러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민족으로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1년의 시간을 머물게 된다. 이것은 그저 낭비되는 시간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준비되는 시간이었다. 이곳에서 레위기서 전체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이곳에서 일년간 성막을 준비한다. 이렇게 준비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천년을 버티지 못하고 멸망한다. 계속해서 거룩함에 헌신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 황폐함이 많아질 것에 대해 선포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그루터기로 남아있을 것에 대해 예언했다 (사 6:13). 그 거룩한 씨는 누구를 말하는 걸까? 이사야는 메시야 시대에 일어날 일들을 이렇게 예언하고 있다. 사 4:2-4,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이 말씀에 의하면 거룩한 씨는 메시아가 오셔서 예루살렘을 청결하게 하실 때 다시 거룩하다 칭함 받게 되는 자들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보낼 때까지 너희는 예루살렘에 머물라’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남기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에 머물며 기도했다. 함께 모인 자가 약 120명이었다.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오직 기도에 힘썼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오순절 날 그들은 성령을 받게 된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은 다름 아닌 성령이었다. 이로서 구약의 오순절이 토라를 받은 날이라면, 신약의 오순절은 성령을 받은 날이 된다. 구약의 오순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졌다면, 신약의 오순절에는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지게 된다. 이처럼 유월절에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구약과 신약 모두 오순절을 통해 완성된다.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의 삶이 바뀐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도 이 날 이후 완전히 달라진다. 이후 제자들은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들이 바로 장차 만방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거룩한 씨였던 것이다. 베드로는 신약의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선포한다. 벧전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던 정체성이 똑같이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 주어졌다.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데는 목적이 있다. 단지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허락하시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 열방을 축복하는 제사장으로 세우시기 위함이다.
베드로가 표현한 것처럼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전제가 있다. 그것은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거룩함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것을 지키는데 헌신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거룩하게 지으신 다른 사람들의 거룩함을 지키는데 헌신해야 한다. 우리는 거룩한 교회를 세우고 그것을 통해 열방을 거룩하게 하는데 헌신해야 한다. 어떻게 헌신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순절에 말씀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던 제자들처럼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자로, 제사장 나라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는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는 누가 맺을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소유된 자, 제사장의 삶을 사는 자, 거룩한 백성이 맺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오순절에 임했던 말씀과 성령의 계시가 반드시 필요하다. 말씀과 성령을 통해 우리의 성품과 삶의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 노예처럼 생존을 걱정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정체성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맺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팬데믹으로 정지한 듯한 시간을 2년째 살고 있다. 이 시간이 우리의 염려와 불안으로 낭비되는 시간이 되지 않길 바란다. 멈춘 듯한 이 시간에 오히려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을 이루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말씀과 성령을 통해 나의 옛 자아가 무너지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애굽의 습관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시간이 돼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나는 시간이 돼야 한다. 그래야 우리에게 가나안이 허락되었을 때 우리는 시대의 우상 앞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계속해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어려운 시대 단지 살아 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존재로 살아가는가이다. 바라기는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나의 생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맺는 자로 살아가는 왕같은 제사장과 거룩한 주의 백성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