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18 계명의 준행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1월 29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8 계명의 준행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24:7-8)

토라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온다. ‘나아쎄 베니쉬마(נעשה ונשמע)’라는 표현이다. 이 구절은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로 번역되었는데, 원문은 ‘우리가 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들을 것입니다’라는 두 개의 동사가 사용되었다. 듣는 것보다 행동하는 것을 앞세운 표현이다. 유대인들에 의하면 이 표현이 자신들의 신앙을 잘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 표현에 대해 상당히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오늘은 이 표현이 왜 중요한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유대인의 경전 미드라쉬에는 가끔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미드라쉬 축복서 2권에 따르면 하나님은 토라를 70개의 열방에도 똑같이 제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열방의 사람들은 토라가 무슨 내용인지 물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몇 가지 계명을 설명하시자 그들은 다 우리가 지키기 어렵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오셨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들을 것입니다!” 그래서 토라가 유대민족에게 주어진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나아쎄 베니쉬마’는 어떤 의미가 있는 표현일까? 랍비 아바는 몇 가지로 그 의미를 설명한다. 먼저 그것은 우리가 토라의 계명을 지킬 때 확신과 안정감을 느낄 때 뿐만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나아쎄)’는 그들의 약속이 ‘율법에 대한 이해(니쉬마)’보다 앞서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율법이 우리에게 합리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니까 따르겠다는 의미이다. 둘째, 이 표현은 “명령을 받기 전에도 행하겠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종은 보통 주인의 명령이 있을 때만 행동한다. 그러나 아이가 부모를 신뢰하고 사랑한다면 그 아이는 말하지 않아도 부모의 뜻대로 행하고 싶어 한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명령을 받기 이전에 이미 행할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생각을 통해 우리 역시 배울 점이 있다. 그것은 ‘믿음은 이해하는 과정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것이다.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행함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는 민족이 되었다. 믿음은 그 대상을 신뢰하기 때문에 하루 하루 내딛는 도약이라 할 수 있다. 그 도약은 믿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도약이 의심과 합리적인 판단 끝에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더이상 믿음의 도약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지난 주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졌던 놀라운 비전을 살펴봤다. 그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비전을 받았다. 그리고 이번 주 토라포션에서는 ‘제사장 나라’라는 그들의 비전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에 관한 세세한 규정들이 나온다. 히브리어로는 ‘미슈파팀’이다. ‘율법, 법령들’이란 뜻이다. 토라에 나오는613개의 계명 중 53개가 이번주 파라샤에 나온다. 전체 계명 중 11.5%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주 파라샤는 언약의 책, ‘세펠 하브리트’라는 별칭이 있다. 여기에 우리가 잘 아는 계명들이 나온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출 23:19) 맥도날드에 치즈 버거가 없는 이유가 이 구절 때문이다.

모세는 이 언약들을 온 백성 앞에 낭독하여 듣게 한다. 그러자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말한다. 모세는 이에 짐승의 피를 백성에게 뿌리며,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라고 선포한다. 그들이 한 언약은 피 언약이었던 것이다. 지키지 못하면 피 흘려 죽겠다는 맹세였다. 유대인들은 이 613개의 계명들을 얼마나 잘 지켰을까? 오늘 미슈파팀 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계명을 어떻게 지켰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21:2,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 종에 관한 규례다. 히브리인이 종이 되는 경우는 두 가지다. 도둑질하다가 걸려서 배상할 능력이 없을 때 종이 된다 (출 22:3). 또한 가난하게 되어 먹고 살 길이 막혔을 때 자발적으로 종이 된다 (레 25:39). 그런 면에서 그들은 servant이지 slave가 아니다. 그리고 히브리 민족의 종의 제도는 본문 말씀처럼 영구적인 것이 아니다. 6년 동안 종으로 일하지만 7년 째는 아무 조건 없이 자유의 몸으로 풀어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 민족의 종의 제도는 새로운 삶을 위한 준비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살다가 갑자기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 그러한 때에 종이 되어 먹고 살면서, 일을 통해 빚을 갚고 다시 재기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인 것이다. 이러한 제도 때문에 히브리 민족은 가난과 신분이 대물림 되지 않는다. 히브리 민족의 종의 제도는 결국 영원한 속박을 위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유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인 것이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했을 때 이 제도가 잘 지켜졌을까? 약 9백년 가량은 지켜진 듯 하다. 그러나 남유다가 멸망하는 시점에서 그렇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34:8-10, “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한 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고 자유를 선포한 후에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그 계약은 사람마다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고 그의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 이 계약에 가담한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롭게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하여 놓았더니당시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노비를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그것은 바벨론을 통한 심판의 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심판이 두려워 순순히 계명을 따랐던 것이다. 자 그런데 그 이후의 상황을 보자. 34:11,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그들의 마음이 왜 변했을까?바벨론이 애굽 원군에 대응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철수하자, 그들의 마음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약을 위반하고 풀어주었던 히브리 종들을 다시 노비로 삼는다.뜻이 변했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과 자신들의 조상이 선언했던 언약을 잊었다는 말이다. 그들은 어쩌면 ‘우리가 행하겠나이다’보다 ‘우리가 듣겠나이다’를 앞세우기 시작했을지 모른다. 하나님의 계명을 들어보고, 자신의 합리적인 판단을 앞세우다 보니까 노비를 풀어주는게 너무도 아까웠던 것이다.

세상 나라에서는 종이 많아야 부자요 권력자였다. 돈과 권력의 힘을 맛본 부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쉽게 내어 놓지 못한다. 그들에게 종을 풀어주는 것은 힘든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한 때는 종이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되어 하나님의 구속과 자유를 함께 맛본 공동체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누구의 소유물로,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서로가 막아줄 책임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를 자유인으로 세워줘야 할 책임을 공유한 공동체였던 것이다. 그것이 종의 제도였다. 이것은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목숨을 걸고 맹세한 언약이었다.

이에 하나님의 선포가 따랐다. 34:17,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그들이 힘 없는 형제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준 것이다.결국  미슈파팀의 작은 법령을 지키지 않은 것이 그들이 멸망을 선고 받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다.이 계약은 쪼개진 짐승 사이를 지나가면서 맺은 피 언약이었다. 지키지 않으면 그 짐승처럼 쪼개져 피 흘려도 좋다는 맹세였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을 어김으로 피를 흘리며 바벨론의 종으로 끌려가고 만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5:17-18, 20,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율법의 계명은 결코 구약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613개의 계명을 정통 유대인들처럼 문자 그대로 다 지켜야 하는 것도 아니다. 유대인이나 이방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오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계명을 지키며 나의 의로움을 앞세우고 있다면 우리는 바리새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비록 손해볼지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라면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21절 말씀은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한 말씀이었다.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20살 때주님을 경험해보고 싶었던 나는 성경을 읽다가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라는 조건이었다. 나는 그 조건을 따라보고 싶었다. 그래서 노트 한 권을 사서 내가 적용해야 할 계명들을 신약부터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지켜 보길 시도했다.계명들을 지키면서 손해를 본다고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계명을 지켜나가면서 나는 주님의 마음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아쎄 뵈니쉬마.’ 유대인들처럼 계명을 먼저 행했더니 주님을 더 알게 된 것이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종에 대한 규례를 현대를 사는 우리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이야기를 안다. 어떤 임금이 만 달란트 빚진 자를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준다. 그는 평생 벌어도 갚을 수 없는 액수를 탕감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난다. 그리고 그 동료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독촉한다. 그가 갚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를 그냥 옥에 가둬버린다. 이 일이 임금의 귀에 들어 간다. 18:32-35,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용서 받은 자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우리가 죄 아래 팔려 죄의 노예가 되었지만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우리가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죄의 대가를 갚을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죄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심으로 우리가 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값없이 용서받은 것처럼 값없이 서로를 용서해주라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실천하며 살아야 할 법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남들이 우리에게 잘못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쉽게 용서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나에게 행한 모든 잘못은 그 사람이 나에게 갚아야 할 빚으로 생각한다. 그 빚을 받아낼 때까지 상대방을 마음의 옥에 가두어 둔다. 그리고 우리는 좀처럼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갚아야 할 죄의 대가를 탕감 받은 사람들이다. 값없이 구원을 경험한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며, 자유케 하며, 서로를 살려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형제를 자유케 하지 못할 때 우리는 탐욕과 이기심과 분노의 종이 되고 만다. 그것은 스스로 멸망하는 길이다.

세상은 점점 공동체가 사라지고 있다. 승자들이 독식하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코로나로 비대면 사회에 접어들면서 세상의 변화는 엄청난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그 중심에는 하나님께 반하는 인본주의가 깊이 깔려 있다. 세상의 환경이 바뀌었다고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바꿔선 안 된다. 우리의 이해 타산을 계산해 보고 순종의 여부를 결정해선 안 된다. 손해를 보더라도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계명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합리적이지도 않고 손해 보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천국의 계산법은 다르다. 여러분도 옆의 사람들 때문에 분명 손해 보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진 빚이 얼마나 되는지 셈하지 말고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은 분명 위대한 비전이다. 그러나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작은 계명들 하나 하나를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더더욱 소중한 일이다. 바라기는 세상은 변해가도 서로를 자유롭게 하며, 하나님의 자유를 이 땅에 흐르게 하는 교회로, 공동체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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