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2월 5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9 은혜의 보좌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 25:22)
오늘부터 출애굽기 마지막 40장까지 성막이야기가 나온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였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그 조그만 공간에 임재하신 이유가 뭘까? 왜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약속하셨을까? 오늘은 그 이유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성막은 히브리어로 ‘미쉬칸(משכן)’이다. 동사 ‘샤칸(שכן)’은 ‘거주하다’라는 뜻이다. 명사 ‘샤켄(שכן)’은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 즉 ‘이웃’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웃이 되어 함께 사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든 최초의 물건이다. 하나님은 이 성막을 위해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다. 출 25: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성막을 직접 만들어 주시지 않았다. 그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가져와 성막을 스스로 만들도록 하셨다.
이것은 출애굽 이야기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셨다.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의 몸으로 애굽을 나올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셨고, 그 백성이 마른 땅으로 건너가게 하셨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로 그들을 먹이셨고, 반석을 쳐서 물을 마시게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감동한 것은 너무도 잠깐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평했다. 이제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지시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 대신에 이제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하도록 지시하신 것이다. 이것이 어떤 차이를 가져왔을까? 사실 우리는 유대 사회의 내부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어떤 차이를 가져왔는지 관심이 없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번주 토라포션을 상당히 중요한 전환점으로 생각한다. 즉 그들이 성막을 건축한 것은 그들이 매번 하나님께 받기만 하다가 하나님께 받은 것을 돌려드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랍비 조나단 삭스는 이렇게 말한다. “The mishkan became the home of the Divine presence because God specified that it be built only out of voluntary contributions. Giving creates a gracious society by enabling each of us to make our contribution to the public good. That is why the building of the sanctuary was the cure for the sin of the golden calf. A people that only received but could not give was trapped in dependency and lack of self-respect. God allowed the people to come close to Him, and He to them, by giving them the chance to give. 성막은 하나님께서 자발적인 기부로만 건축하도록 지정하셨기 때문에 신성한 임재의 집이 되었습니다. 기부는 우리 각자가 공익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은혜로운 사회를 만듭니다. 그래서 성막을 건축하는 것은 금송아지의 죄를 치유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받기만 하고 줄 수 없는 사람들은 의존과 자존감의 결여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허락하셨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줄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소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해 자원하여 예물을 가져왔다. 나중에 너무 많이 가져오자 모세는 그만 가져오라고 명령을 내려야 할 정도였다. 성막이 완성되어 봉헌할 때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은 그 완성된 성막에 충만했다. 이번 주 토라포션의 제목은 ‘테루마(תרומה)’이다. 테루마는 ‘올려 바친 예물’이란 뜻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자원해서 드린 예물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나타났고, 그 결과 자신들의 존재가 들어올려졌다고 믿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드린 것 때문에 오히려 자신들이 존엄을 얻었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기부를 장려할 때 이번 주 파라샤의 내용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드리는 자원의 예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의 공간을 만들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말씀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에서 분명 배울 점이 있다. 하나님의 임재의 공간을 위해 자원하여 준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더 본질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오늘날도 우리에게 성막이 필요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성막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정말 만나시기 원하시는 분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면 어떻게 될까?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신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성막이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성막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했던 실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속죄소는 히브리어로 ‘하카포레트’다. ‘카파르’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다. ‘카파르’는 ‘덮다, 속죄하다’는 뜻이 있다. 속죄소는 영어로는 ‘mercy seat, 은혜의 보좌’라고 한다. 이 속죄소는 구약시대에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다. 욤키푸르는 일년에 한번 죄를 덮는 날이었다. 그런데 이 속죄소가 언약궤 위에 놓여져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출 25:21-22,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증거궤 안에는 율법을 상징하는 십계명 돌판이 놓여 있다. 누구든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면 사망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증거궤 위에 속죄소, 은혜의 보좌가 있는 것이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 이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 위에 희생 제물의 피를 뿌렸다.자, 피가 뿌려진 속죄소는 단순히 증거궤를 덮고 있는 것이 아니다. 증거궤는 율법을 범하면 죽을 수밖에 없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율법의 저주 위에 속죄의 은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속죄소 위에서 우리 인간을 만나시는 것이다. 율법의 기준이 아니라 그 위에 뿌려진 속죄의 피를 보시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속죄소는 하나님의 긍휼이 심판을 이기는 것을 보여주는 모형인 것이다.
우리는 속죄소를 통하여 우리를 무한히 용서하시며 우리를 만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히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구약시대 은혜의 보좌 앞에는 일년에 한번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약시대 우리는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은혜의 보좌 앞에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보좌 앞에 나아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는 것이다.
구약시대 지성소는 자기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던 곳이다. 구약시대 지성소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었던 곳이다.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그 하나님의 뜻에 헌신할 수 있는 민족이 된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지성소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분이 성막 가운데 이스라엘 공동체의 중심이 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 되는 백성을 일으키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삶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자원함으로 구하는 당신의 백성을 만나시기 원하신다. 그들을 당신의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시기 원하신다. 성막이 없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금송아지 우상에게로 이끌렸다. 이 시대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디로 이끌릴까? 그들 역시 하나님이 아닌 시대의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나주시는 성막이 있는가? 여러분의 죄와 허물이 덮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되는 지성소가 있는가? 하나님의 임재의 장막을 자원함으로 준비하는 여러분이 되길 원한다. 그곳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이 예수님의 보혈로 덮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 안에 우리의 삶이 세워지는 은혜가 있길 소원한다. 은혜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가 행할 일을 말씀해주실 때 우리 삶에 소망이 있는 것이다. 바라기는 그 은혜의 보좌 앞에 오늘도 담대히 나아가 이 시대의 우상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 앞에 온전히 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