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2월 12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20 상한 심령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출 27:20-21)
이번 주 토라포션 파라샤의 제목은 ‘테짜붸(תצוה)’이다. ‘너는 명령하라”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 아니라 반드시 복종해야 하는 강력한 명령을 나타낼 때에 사용되는 단어다. 지난 주에도 모세는 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성전에 쓰일 예물인 테루마를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때는 히브리 단어 ‘다바르(דבר)’가 사용되었다(출 25:2). ‘가져오라고 말하라’는 정도였다. 강제성이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자원하는 예물을 가져왔다. 물론 안 가져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사용된 단어는 ‘짜바(צוה)’다. 군대 상관이나 왕이 명령을 내릴 때 사용하는 단어다. 강제성이 있는 명령이다.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라’ 하나님은 왜 이 명령을 강제성을 띤 명령으로 주셨을까? 다른 예물들은 성막을 짓기 위해 단회적으로 필요했던 것들이다. 그런데 감람유는 그렇지 않다. 성소의 메노라를 계속해서 밝혀야 했기에 이 명령은 강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 즉 하나님은 성소의 기름을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할 책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아론과 제사장들은 그들이 가져온 기름으로 메노라를 밝혀 그것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타오르도록 해야 했다. 오늘은 성소 안 메노라를 밝히기 위해 백성들이 가져와야 했던 기름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메노라는 성소를 밝히는 유일한 빛이었다. 메노라는 일곱 개의 가지가 선형으로 배열되어 있다. 가운데 네번째 가지는 ‘쉐메쉬’라고 불린다. ‘쉐메쉬’는 태양이란 뜻인데, 태양은 네번째 날에 창조되었다. 다른 여섯 개의 가지는 여섯 째 날 창조된 인간을 상징한다고 한다. 가운데 네번째 등불은 ‘서번트 램프’라고도 불렸다. 이 램프가 다른 여섯 개의 등불의 심지를 다듬고 다시 불을 붙일 때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막의 도구들은 그것이 상징하는 것이 있다. 유대인 랍비들은 이 쉐메쉬 램프가 메시아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세상의 빛’(요 8:12)이라고 말씀하셨다. 메노라의 쉐메쉬 램프처럼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 불을 밝히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통해 빛을 전해 받고, 우리 역시 ‘세상의 빛’(마 5:14)이 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주님의 빛이 임할 때 세상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성소를 밝히는 메노라의 기름은 가장 순수한 기름이어야 했다. 그런데 이 순수한 기름은 올리브가 으깨어지면서 멍이 들 때 만들어졌다. 히브리어로 ‘카티트(כתית)’란 형용사가 사용되었다. ‘두들겨 낸, 타박상을 입힌, 찧어낸’이란 뜻이다. 성소의 기름은 아무 기름이나 사용할 수 없었다. 이렇게 찧고 깨뜨려져서 나온 가장 순수한 기름을 사용했던 것이다. 랍비 여호수아 벤 레비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스라엘을 올리브에 비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이렇게 답을 한다. “올리브 열매가 처음에는 쓰고 나중에는 달게 되는 것 같이, 이스라엘이 현재는 고난을 받으나 장차 그들을 위하여 큰 복이 쌓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올리브가 부서져야만 기름이 나오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고난의 의해 으깨어질 때 토라 안에서 모든 잠재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이 랍비는 고난이 많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으깨어진 올리브에 비유했다. 고난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상한 심령이 될 때, 그것은 성소의 빛을 밝히는 순전한 기름으로 준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라’ 이 명령을 우리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라’고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상한 심령이 뭘까? 우리는 언제 심령이 상하는가? 원치 않은 고난이 찾아 올 때 심령이 상한다. 다른 사람이 내 자존심을 긁을 때 심령이 상한다. 나의 연약함이나 무능력이 드러날 때 우리는 마음이 상한다.
다윗 앞에 나단 선지자가 찾아왔을 때 다윗의 죄가 만천하에 드러난다. 그러면서 왕으로서 어쩌면 당연히 누릴 수 있었던 그의 삶의 방식이 철저히 꺾여 버린다. 그의 명예는 바닥에 떨어지고, 그의 자존심도 으깨어진다. 그런데 다윗은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죄와 무능함을 그분 앞에 고백한다. 그리고 이렇게 간구한다.시 51:10-11,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그는 또한 이렇게 고백한다. 시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그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그의 굳어진 양심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상한 마음으로 가장 순전한 심령이 되어 하나님 앞에 통회하며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 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통회한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다카(דכא)’다. ‘부숴진 마음, 상처난 마음, 죄를 깊이 뉘우치는 마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죄를 뉘우치는 자의 마음을 다시 일으키시는 분이시다. 그렇게 순전한 심령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다시 타오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로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이었고, 하나는 세리였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바리새인은 마치 으깨어지지 않은 올리브처럼 성소를 밝히는 메노라의 기름으로 사용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기름과도 같았다. 반면에 세리는 이렇게 기도했다. 그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으로 세리는 엎드렸다. 그는 순전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그의 깨진 마음을 올려드렸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하시며 이렇게 결론을 말씀하셨다. 눅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예레미야는 이렇게 탄식했다.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우리는 부패한 우리의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지 않고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산다. 그러나 죄로 부패한 마음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러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죄로 딱딱해진 마음을 깨뜨려야 한다. 깨어진 마음, 상한 심령이 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타오를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때 우리가 하는 질문은 이렇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가?’란 질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좋은 질문이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습니다. 이 일로 나의 마음이 상합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가 이렇게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질문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로 조명하실 것이다. 그 때 우리의 영혼은 진리로 불 붙게 되며, 고통으로 으깨어진 우리의 삶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삶의 어두운 곳을 밝히는 등불로 순전히 타오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자가 올리브 열매를 으깨어 가장 순도 높은 기름을 성소로 가져왔다. 그것은 그들이 반복적으로 해야 했던 강제성을 띤 명령이었다. 그들은 성소의 등불을 끊이지 않고 밝히기 위하여 반복적으로 기름을 준비하여 제사장에게 가져와야 했다. 제사장은 그 기름을 받아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등불이 켜져 있도록 점검해야 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우리의 예배에 적용하길 원한다. 으깨어진 올리브 열매처럼, 늘 상한 심령을 준비하여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원한다. 계시록에서 주님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며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명령하셨다. 주님은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너희가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교회로서 상한 심령을 회복해야 한다. 통회하는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그렇게 세상의 빛이 되는 사명을 회복할 때 주님은 그 교회의 촛대를 옮기시지 않고 계속해서 타오르게 하시는 것이다. 바라기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준비함으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