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2월 19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21 우상의 역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출 32:7-8)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죄 중 가장 큰 죄가 뭘까? 그것은 이번 주 토라포션에 나오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것이다. 하나님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지시하신다. 그 지시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40일 동안 있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실제 성막의 제작은 이 금송아지 사건이 벌어진 이후 출애굽기 35장에서 시작됨을 알 수 있다. 왜 성막에 대한 이야기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반역 사건이 기록된 것일까? 오늘은 그 이유를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백성들은 모세가 나타나지 않자 초초했다. 그들은 그들을 인도할 지도자 없이 광야에 남겨진 현실에 대해 두려웠다. 랍비 라시는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모세는 40일을 채우고 41일 아침에 돌아올 의도를 가지고 시내산에 올랐는데, 백성들은 그 40일을 계산할 때 모세가 올라간 날을 포함해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담무즈 16일 아침에 모세가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모세가 도착한 날은 담무즈 17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예정했던 시간에 돌아오지 않자 불안했다. 우리도 그렇다. 우리가 예정했던 시간에 기대했던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안해 한다. 그런데 바로 이 불안에서 죄가 잉태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두려움 가운데 뭔가라도 해보려는 인간적인 시도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안해 하면서 모였고, 서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목소리 큰 사람의 의견이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거기서 하나님 뜻에 맞는 결론이 나올 리 만무했다. 그들은 아론을 찾아가 그들의 결론을 말한다. 출 32:1,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모세는 하루 아침에 ‘이 모세’가 되었다.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이란 표현에는 그들이 광야에 불안하게 남겨진 상황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하다. 그것이 다 모세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다가 죽었을지 모른다고 결론을 내린 것 같다.
그들은 결국 불안한 자신들을 위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다. 금송아지는 히브리어로 ‘에겔 하자하브 (הַזָהָב עֵגֶל)’이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코아흐 하메다메(כֹחַ הַמֶדָמֵה)’라고 한다. ‘상상의 힘’이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상상을 통해 뭔가를 개념화하고 형상화한다. 그런데 금송아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신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망상이었다. 실제가 아닌 것을 실제로 여기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망상 속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내었고, 그것이 애굽에서 자신들을 인도하여 낸 ‘우리의 신’이라고 여겼다. 사람이 망상에 빠지면 자신이 생각한 것을 실제로 여긴다. 그리고 그것을 경배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우상이고, 그것은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왜 금송아지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신이 되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었을 때, 그들은 아피스(Apis) 황소를 신성시하며 숭배했다. 아피스 황소는 애굽의 태양신인 프타신(ptah)의 형상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금송아지 신상은 소의 두 뿔 사이에 태양이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송아지는 ‘힘과 재물과 다산(多産)’의 상징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안 속에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그들이 익숙했던 신을 찾았던 것이다. 힘과 번영을 약속하는 금송아지 형상 앞에 다시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이러한 우상 숭배의 역사는 약 400년 뒤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왕에 의해 반복된다. 왕상 12: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아론의 대사와 똑같다. 이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욕망에 맞춰 재구성한다. 이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자신들에게 안전과 번영을 가져다 주는 존재였다. 그들에게 금송아지는 우상 숭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자신들이 원하는 하나님’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망상이었다. 그들이 만든 금송아지는 지키기 힘든 계명에 순종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협박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욕망을 방해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나서 여호와의 절일을 지켰다. 그 앞에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다. 여기서 ‘뛰놀았다’는 것은 이교 제사에서 볼 수 있는 행위였다. 이것을 집단 성행위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자신들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신을 섬긴 결과는 결국 방종과 부도덕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을 보시고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부패하였다’는 히브리어로 ‘쉬헤트(שחת)’이다. 이것은 홍수 심판 전 인류가 부패했던 상황을 묘사한 단어다. 멸망하기 직전의 상태를 말한다. 우상을 만든 결과 그들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나아진 것이 아니라, 부패와 타락의 길로 가게 된 것이다. 이것이 우상 숭배의 역설이다. 우상이 약속하는 풍요는 망상일 뿐이며, 결국 우리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더욱 멀리 가도록 타락시킬 뿐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만들어 내는 우상들이 무엇인가? 자유주의 신학도 그 중 하나다. 자유주의 신학은 세상에 어필하기 위해 기독교의 초자연적 요소를 제거한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이렇게 해석한다. 어린아이가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자, 그 모습을 보고 부끄러워 숨겨두었던 자신들의 도시락을 꺼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다 같이 나눠먹고 12바구니가 남게 되었다 것이다. 리처드 니버 (Richard Niebuhr)는 자유주의 신학이 만들어낸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한다. “진노 없는 하나님이 죄 없는 인간을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심판 없는 나라로 인도하셨다.” 이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어 낸 하나님과 별반 차이가 없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입맛에 맞는 하나님을 만들어 낸다. 나의 삶에 간섭하지 않고, 어려운 순종을 요구하지 않고, 공의가 아니라 사랑만 많은 하나님을 사람들은 원한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신의 뜻에 따를 수 있는 하나님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어낸 금송아지 우상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우상의 속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시 115:4-8,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우상은 신적 능력이 있기는 커녕, 보고 듣는 능력조차 없는 것이다. 우상 숭배의 비극은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우상과 같아진다는 것이다. 즉,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제대로 듣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상의 역설인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어서 말한다. 시 115:10,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시편 기자는 우상 숭배에 빠졌던 아론을 꼭 집어 말한다. 우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이다.
이 금송아지 사건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건설하는 장면이 나온다. 성막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하는 도구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함을 아셨다. 이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어도 하나님은 이들이 본질적으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아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모세를 부르셔서 성막을 지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성막은 모든 죄인이 속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이다. 히브리서는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히 8:5-6,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그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시다. 성막은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죄를 처리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죄를 짓기 이전에 이미 그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성막을 지을 것을 지시하신 것이다. 결국 성막은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금송아지 에피소드 중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그것은 회막이 있었다는 것이다. 출 33: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여기 나오는 회막은 성막과 다른 것이다. 성막은 회막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회막은 이스라엘 진영 밖에 있었던 것이고, 성막은 이스라엘 의 진영 한 가운데 배치된 것이다. 모세는 이 회막에서 하나님과 각별한 관계를 누렸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중보하며, 그 위기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던 모든 순간들이 이 회막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이 회막에서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 모세의 사역은 바로 이 친밀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친밀감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깨어지지 않고 다시 이어질 수 있도록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회막은 모세 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회막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또한 우리는 11절에서 그 회막에 가장 오래 남아 있었던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출 33:11,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여호수아가 회막을 지키며 남아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 세대의 소망을 본다. 이스라엘이 죄로 무너진 뒤에 모세 한 사람 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앙망하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몇 명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상으로 부패하여 멸망할 수 있었던 위기의 순간에 기도하며 하나님의 회막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멸망하지 않고 가나안으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으로 여기며 섬기는 시대에 유일한 희망은 바로 회막으로 나아가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만나러 나아가는 자들이다. 회막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을 위하여 많은 우상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망상의 힘을 깨뜨리고 하나님 한 분 만을 의지하는 결단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 시대에 우상을 만들고 그것에 의지하며, 결국 우상과 똑같아 지는 역설에 빠지지 않는 비결인 것이다.
오늘도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 주는 우상들을 만들어 낸다. 많은 사람들이 분별 없이 그 우상들을 ‘우리를 위한 하나님’으로 여기며 그 우상들에게 절한다. 그러나 그것은 망상이다. 우상은 결국 우리를 부패하게 하고 망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상이 우리를 위할 거라는 망상을 깨고, 오직 성경의 하나님을 붙들어야 한다. 각자의 삶의 공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회막을 만들고, 거기서 하나님을 앙망하며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다음 단계의 비전을 주시는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 주변에 세워진 우상들을 분별해 내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