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3월 5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23 영광의 무게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출 40:34-35)
우리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이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이런 선포를 하셨다. 사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셨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은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다. 그러나 죄 때문에 우리 인간은 그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다. 단지 에덴이란 물리적 장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그분과의 동행을 잃어버린 것이다.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인간은 다른 것으로 그 영광의 자리를 대체하려 한다. 그것이 소유이고, 권력이고, 명예다. 그러나 그것으로 결코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를 채울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에서 더 멀어질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잃어버린 당신의 영광을 되찾아 주시기 원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였다. 오늘 우리는 출애굽기 마지막 토라포션을 살펴보고자 한다. 성막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어떻게 회복되었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출 40:33, “그는 또 성막과 제단 주위 뜰에 포장을 치고 뜰 문에 휘장을 다니라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한 지 딱 일년 만에 성막을 완공한다. 유월절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첫번째 시작이라면, 성막의 완성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거처를 함께 하시는 두번째 시작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받아주심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는 원어로 “봐예칼 모세 에트 하멜라카(ויכל משה את המלאכה)”이다. 그런데 이 표현은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완성하셨다는 것과 똑같은 표현이다.창 2: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마치시니” “봐예칼 엘로힘 멜라크토” (ויכל אלהים מלאכתו). 하나님은 이 땅에 당신의 영광을 보이시기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제 죄로 타락한 이 세상에 다시 한번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모세를 통해 성막을 짓게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성막의 창조는 천지창조에 버금가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출 40: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이 성막에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했다. 히브리어로 영광은 ‘카보드(כבוד)’다. 카보드는 ‘무겁다’는 뜻의 동사 ‘카베드(כבד)’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무게가 있는 것이다. 이 성막에는 엄중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출 29:45)” 이 하나님의 약속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취소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처럼 이스라엘의 죄보다 컸다. 그러나 이 성막에는 또한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다’는 하나님의 공의가 담겨져 있다. 그래서 반드시 죄에 대한 대가로 희생제물이 성막의 번제단에서 피 흘려 죽어야 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반역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기로 결정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언약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 이동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광야의 여정이 나그네 삶임을 보여준다. 성막은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 위로 구름이 떠오르면 언제든지 성막을 해체하여 이동해야 했다. 그들이 머물렀던 장막은 어디까지나 임시거주지였다. 그들은 그 임시거주지를 위해 살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성막의 영광을 따라 움직였다. 출 40:36,38,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여기서 ‘행진하는 길’은 히브리어로 ‘마싸(מסע)’다. ‘장막 말뚝을 잡아 뽑다’라는 뜻의 동사 ‘나싸(נסע)’의 명사형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막을 쳤던 곳은 그들이 다시 새로운 여정을 향해 출발하는 출발지가 되었다. 그래서 히브리어 ‘마싸’에는 ‘출발지, 여행’이란 뜻이 있다.
랍비 조나단 삭스는 유대인의 정체성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To be a Jew is to travel.”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여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이처럼 그들의 의식 속에 ‘나그네’라는 정체성이 있다. 성막을 따라 이동했던 조상들처럼 그들은 포로로 머물러 있는 곳에서도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산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도 그 나라의 지배적인 신앙으로 개종하지 않았다. 그 나라의 지배적인 문화에도 동화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임시로 머무는 곳을 최종 목적지로 착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막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영광은 솔로몬 왕이 성전을 완공했을 때 또 다시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왕상 8:11,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로 인해 성전에 나타났던 영광이 떠나게 된다. 그 과정이 에스겔서에 묘사되어 있다. 성전을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은 언제 회복되는가? 우리는 그것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회복됨을 보게 된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거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스케노센(ἐσκήνωσεν)’인데, 이는 ‘장막을 치다, 거주하다’란 뜻의 ‘스케노오(σκηνόω)’란 단어에서 온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거처를 함께 하시기 위해 육신으로 오셨고, 우리는 그를 통해 다시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롬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우리 인간의 죄보다 컸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거처를 함께 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하나님의 경륜을 이렇게 말한다. 히 1:1-2,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성막이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였다면, 예수님은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는 통로였다.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구약 시대 성막이 죄를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통로였다면, 신약 시대 예수님은 죄를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통로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 이동하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보게 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 이동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광야와 같은 인생에서 늘 길 위에 선 존재들이다. 우리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임시 처소일 뿐이며, 우리는 본향을 찾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이 그러한 삶을 살았다. 히 11:13-14,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이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이 약속하는 영광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 영광이 하나님이 약속하는 영광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다. 히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C. S루이스는 ‘영광의 무게’라는 그의 책에서 천국에 대한 성경의 약속을 다섯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다.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될 것이다. 셋째, 우리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넷째,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잘 먹거나, 대접을 받거나,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다섯째, 우리는 우주에서 일종의 공식적인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우리가 천국에서 얻게 될 영광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인간적인 명예와 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그 영광이 “우리 같은 피조물들이 부여하는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명예”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알아주시고 자녀로 받아주시는 것은 너무도 영광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피 흘리심으로 나의 죄가 사해졌음을 믿을 때 우리 삶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성막을 따라 이동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두번째 구원의 여정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C. S. 루이스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릴 영광이 무엇인지에 그치지 않고, 그 영광에 대한 무게, 즉 영광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가 말하는 영광의 무게는 다름 아니라 ‘이웃의 영광’이다.내게 영광이 주어질 수 있듯 내 이웃에게도 그런 영광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이들이 그저 죽어서 사라질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불멸의 소름 끼치는 존재가 되거나 영원한 광채가 될’ 사람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 이웃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안에는 그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이자 영광을 받으시는 분, 그리스도께서 내주해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 산다는 것은 무거운 일이다. 바울은 말한다. 고후 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영광의 무거운 것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는 환난을 통과해야 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의 무게에 비해 가벼운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자녀이면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 8:17)”고 권면한다.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권한다. 약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이 말씀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며 이웃의 영광을 생각할 때 반드시 감당해야 할 삶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광은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 이웃의 영원을 생각하는 것,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 살며 감당해야 할 영광의 무게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는 영원한 것을 위해 사는 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주목하며, 이 땅에서 자신의 영광을 위한 성을 쌓느라 삶을 낭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언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 삶을 재배치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러야 우리의 삶에 치유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러야 우리는 우상을 만들며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러야 우리는 이웃을 위해 십자가를 질 수 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 그 영광의 무게를 감당하는 자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