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3월 12일 설교 이익환 목사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레 1:1-2)
오늘부터 토라포션 레위기가 시작된다. 레위기는 흔히 성경통독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호기롭게 성경통독을 시작했다가 레위기에 가서 그 의지가 사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상관없는 제사들이 장황하게 소개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 자녀들의 토라 교육은 창세기가 아니라, 레위기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데 중요한 원리들이 바로 레위기에 있기 때문이다. 레위기의 원래 제목은 ‘봐이크라(ויקרא)’이다. ‘그리고 그가 불렀다’란 뜻이다. ‘그리고’라는 접속사에서 레위기가 출애굽기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애굽기의 마지막은 성막이 완공되는 장면이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이 부르시기까지는 아무도 성막 안으로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그런데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성막에서 모세를 부르셨다. 그 때 모세는 비로소 성막 안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다. 하나님은 모세 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오도록 초대하시는 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레위기서는 우리를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초대하는 책이다. 오늘은 우리가 구약의 제사 제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회복시키시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말씀하셨다. 레 1: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제물을 드려야 했다. 죄 있는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면 죽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분노하시는 분이시다. 그것은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또한 죄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죄에 대해 경계하시고, 그 죄를 심판하셔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셨다. 불완전함이 우리 인간 조건임을 이해하셨다. 그래서 실수하고 죄를 반복하는 인간이 그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주셨다. 그것은 죄인인 인간을 대신해서 다른 짐승이 피 흘리며 죽게 하신 것이다. 그 속죄의 제사로 인해 사람들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였고, 은혜였다. 2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히브리어로 ‘코르반(קורבן)’이다. 그런데 이것은 ‘카라브(קרב)’라는 동사에서 온 단어다. 카라브는 ‘가까이 가다’는 뜻이다. 따라서 희생 예물인 코르반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수단인 것이다. 왜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우리의 잃어버린 영혼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 손상된 우리의 심령이 치유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또한 죄로 인해 파괴된 관계들이 다시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의 죄를 대신하는 희생 예물을 드리며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었던 것이 ‘구약의 예배’였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올 수 있는 길을 먼저 알려주시는 분이다. 그것이 바로 레위기에서 소개하는 다섯 가지 예물이다. 히브리어로 ‘코르바놋’이라고 하는 이 예물들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번제다. 번제는 히브리어로 ‘올라(עלה)’다. ‘올라간다’는 뜻이다. 불사르는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올라’라고 한다. 번제는 동물을 잡아 남김없이 다 태워드리는 것이기에 온전한 헌신을 상징한다. 레 1:4,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여기서 ‘그’는 죄로 인해 번제를 드리는 사람이다. 번제의 예물을 잡는 사람은 제사장이 아니다. 그것을 가져온 사람이다. 자신이 기른 가축 중에 살아있는 것을 가져와서 자신이 직접 잡는 것이다. 2절에 나오는 ‘가축’은 히브리어로 ‘베헤마(בהמה)’인데, 개역성경은 ‘생축’이라고 번역한다. ‘살아있는 가축’이란 뜻이다. 예배자는 먼저 그 생축의 머리에 안수한다. 히브리어로 ‘세미카’라는 의식인데, 이는 예배자와 번제 예물을 동일시하는 의식이다. 이어서 그는 ‘비두이’라는 고백을 한다. “나는 이 무고한 동물을 대신해 죽어야 마땅하지만, 주님은 나를 대신하여 이 무고한 자의 죽음을 자비롭게 받아들이십니다.” 이 고백 이후 예배자는 그 생축을 잡는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예배자는 소를 24조각으로, 양과 염소의 경우 12조각으로 각을 뜬다. 이 때 예배자는 가축의 머리를 내려치며 고백한다. “하나님 내 교만을 자릅니다” 가슴의 각을 뜨며 고백한다. “죄악을 품은 내 가슴을 도려냅니다” 다리를 자르며 고백한다. “악을 향해 달려갔던 내 다리를 자릅니다” 엉덩이의 각을 뜨며 고백한다. “불의와 교만의 자리에 앉았던 내 엉덩이를 자릅니다.” 내장을 물로 닦으며 고백한다. “내 속의 시기, 질투, 미움을 닦습니다” 이처럼 예배자는 생축을 잡는 과정을 통해 사실은 자신의 피를 흘리고, 자신을 죽이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희생 제물이 흘린 피와 그 제물이 태워져 올라가는 연기를 보시고서, 그 죄인을 용서하신다. 그가 드리는 예물에 그의 믿음과 테슈바, 즉, 회개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말한다.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개역성경은 ‘희생제물’을 ‘생축’으로 번역한다. 히브리어로는 베헤마, ‘산채로 드려진 제물’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위해 희생당하신 생축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생축이 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구약 백성들이 희생 예물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체험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체험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두번째로 소개되는 예물은 소제다. 히브리어로는 ‘민하(מנחה)’다. 곡식을 태워 드리는 제사다. 이것은 자신이 직접 땀 흘려 거둔 노동의 열매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예배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소제는 소산물에 대한 감사이자 자신의 소산에 계속 복 주실 것에 대한 기대가 담겨져 있는 예물이다.
세번째로 소개되는 예물은 화목제이다. ‘제바흐 슐라밈(זבח שלמים)’, 화평의 제사다. 화목제는 감사를 표현하거나 서원을 드릴 때 드렸다. 내장과 기름은 불로 태워 드리고, 고기는 가족과 그가 초대한 사람들, 그리고 제사를 담당한 제사장들과 함께 먹었다.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린 뒤 공동식사를 하며 이웃과의 화목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음은 속죄제이다. 속죄제는 히브리어로 ‘하타트(חטאת)’인데, ‘죄를 씻어 없애는 예물’을 의미한다. 기본 어근인 ‘하타(חטא)’는 ‘빗나가다’란 뜻인데, 모든 빗나간 죄에 대해 속죄하는 것이 바로 속죄 예물인 것이다. 속죄제는 알지 못하거나 실수로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예물이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의 제사가 상당히 치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지은 죄에 대해서도 속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모르고 지은 죄까지도 속죄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랍비 아브라바넬은 속죄제가 행한 일에 대한 형벌이라기보다는 장래의 죄에 대한 엄숙한 경고라고 주장한다. 속죄 예물을 드리려면 상당한 노력과 비용이 따른다. 그것은 한 개인이 모르고 지은 죄에도 책임이 따르며, 앞으로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었다. 랍비 나흐마니데스는 속죄제를 드리는 이유가 그 행위에 뒤따르는 결과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모든 죄가 영혼에 ‘얼룩’을 일으키고 그 안에 흠을 만들기 때문에 속죄 예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될 때 창조주께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속죄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속건제다. 속건제는 여호와의 성물이나 다른 사람의 물건에 피해를 입혔을 때 오분의 일을 더하여 보상하는 예물이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구약의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그분께로 더 가까이 오게 하신 장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예물들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바로 잡으며, 하나님의 공의에서 빗나가지 않는 백성으로 살도록 초대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데 실패한다. 그것은 그들이 예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과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의 본질을 망각하고 형식주의에 빠지게 된다. 점점 예배 따로, 삶 따로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살든 하나님께 예물만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사라지고, 대신 예물을 바치면 용서 받고 복을 받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삶에 대해 선지자들을 통해 꾸짖으셨다. 사 1:11-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하나님께서는 삶과 분리된 예배를 싫어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한다. 암 5:22, 24,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셨다.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기서인애는 헤세드다. 헤세드는 충성된 사랑이다. 상황과 환경, 조건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해 충성된 사랑을 하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풍요와 행복을 당장이라도 구현해줄 것 같았던 세상 신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들은 이웃에게 겸손히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귀찮아 했다. 희생을 선택하는 삶보다는 성공하는 삶을 원했다. 우리는 선지자들이 선포한 말씀을 통해 예배와 삶은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예배가 단순히 하나님께 희생 예물을 드리는 행위가 아님을 알게 된다. 결국 예배를 예배 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다. 삶의 예배가 없을 때 우리가 모여서 드리는 예배도 소용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의 풍요를 누려서 온전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높은 직위에 올라야 강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도 예배에 성공해야 한다. 우리 중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죄는 우리 영혼에 균열을 일으키고,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파괴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배를 통해 반드시 우리의 죄의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히 10:11-12, 14,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온전한 예물, 코르반이 되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한 희생 예물이 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우리 영혼에 균열을 일으켰던 죄를 씻어내야 한다. 코르반, 즉 희생 예물은 우리 인간의 영혼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우리 안에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창조 때 지으신 당신의 형상을 회복하기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나에게 더 가까이 오라’고 초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한 코르반, 온전한 예물로 준비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음을 기억하며,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 회개의 테슈바를 통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회개는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돌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회개해야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회복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눈먼 제사가 되지 않도록 삶의 예배에서도 승리해야 한다. 예배는 교회 안에서만 드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정의와 자비와 사랑을 이웃에게 행하는 것이 우리가 또한 드려야 하는 예배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성막 안으로 부르신 것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부르신다. 바라기는 우리의 예배를 통해 우리 영혼에 균열을 일으킨 죄를 씻어내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또한 삶의 예배를 통해 우리 이웃과의 친밀함도 회복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렇게 친밀함을 회복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샬롬, 이 목사님!
저는 인천에 있는 부평서부감리교회 원로목사, 홍순욱목사입니다.
레위기와 히브리서를 연결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눈동자같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어린양 메시아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앞에 가까이 오라고 부르시는 바
예배의 뜻을 되새기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유대교는 메시아 예수님을 증오하고,
기독교는 하나님의 눈동자, 이스라엘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고,
더구나 자기 교회 이기주의에 빠져 있으니 황당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푸틴의 자기가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의 기독교인이라고 강조하고,
젤렌스키는 자기가 확실한 유대인이라고 강조하니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손을 들어 주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