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25 희생의 소명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3월 19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25 희생의 소명

모세가 또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끌어오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속죄제의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매 모세가 잡고 그 피를 가져다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제단의 네 귀퉁이 뿔에 발라 제단을 깨끗하게 하고 그 피는 제단 밑에 쏟아 제단을 속하여 거룩하게 하고” (8:14-15)

犧牲. ‘희생’이란 한자어다. 희생의 희(犧) 자는 소 우(⽜)와 양 양(⽺)과 빼어 날 수(秀), 그리고 창 과(⼽)로 이루어져 있다. 제사를 지낼 때 소(⽜)나 양(⽺) 중에서도 빼어난(秀) 놈을 창(⼽)으로 잡아 제단에 바친다는 뜻이다. 희생의 생(牲) 자는 희생 제물의 대표격인 소 우(⽜)와 날 생(⽣)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삶이 복이 있기 위해서는 희생 제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 글자가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희생이라는 가치는 얼마나 될까? 경쟁과 성공이라는 가치가 중요시되는 현대 사회에서 희생이라는 가치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 가치인 듯하다. 요즘 MZ세대는 장기적인 전망을 바라보며 자신의 현재를 희생하는 세대가 아니다. 그들은 회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지금 들어간 회사에서 정년을 맞이할 거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더 나은 곳이 있다면 언제든지 이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와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희생이란 가치가 많이 사라졌다. 결혼하는 청년들이 줄고, 결혼한 커플의 절반 가량이 이혼으로 끝나는 것을 보게 된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한 남자가 그의 첫번째 아내와 이혼할 때 제단이 눈물을 흘린다.” “When a man divorces his first wife, the altar sheds tears.” 여기서 제단과 결혼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제단과 결혼은 둘 다 희생에 관한 것이다. 결혼 생활도 꾸준한 희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배우자가 서로를 위해 희생을 원하지 않을 때 결혼 생활은 힘들어지고 결국 실패하게 된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지난 주에 이어 희생 제사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소개한다. 그리고 희생 제사를 관장할 제사장을 위임하는 장면이 나온다. 왜 희생 제사일까? 왜 하나님은 죄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희생 제물을 요구하셨을까? 오늘은 그 이유를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희생 제물은 히브리어로 ‘제바흐(זבח)’다. 이것은 ‘가축을 죽여서 드리는 제물’을 뜻한다. 이 희생 제물의 특징은 자신의 소유 중 가장 가치 있고 흠 없는 것을 드리는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사람들의 소유는 주로 가축이나 곡식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기르는 가축 중에 가장 흠 없는 것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기꺼이 희생할 때 가능한 것이다. 희생 제물의 또 하나의 특징은 피로 상징되는 가축의 생명이 피를 쏟으며 죽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인의 생명 대신 죽음에 내어줄 생명을 통해 죄인의 죄를 사하고 용서하시겠다는 것이다. 제물의 희생을 통해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첫 언약과 관련된 모든 것에 피가 뿌려져야 했음을 강조한다. 9:18-21,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오늘 본문에도 제사장 위임식을 하면서 제단 뿔에 피를 바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은 속죄의 모든 은혜가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한다.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것은 가축의 희생이 결국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직접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셨다.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피의 효력을 이렇게 말한다. 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는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한 속죄의 피다.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에, 피를 흘려 죽을 생명을 구원한다는 원칙을 하나님 스스로 지키신 것이다. 이처럼 구약의 희생 제물은 사실 우리의 생명을 위해 하나님께서 스스로 준비하신 제물을 예표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희생 제물은 결국 하나님 자신의 죽음과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처럼 구약의 희생 제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의 통로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마련하신 희생의 은혜를 얻는 통로이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희생할 수 있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하는 희생을 힘들어하지 않는다. 하늘의 별도 따다가 주고 싶은 열정이 있다. 행복한 부부는 끊임없이 서로를 위해 희생한다. 부모들 역시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한다. 우리는 또한 사명이 있을 때 희생할 수 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성공해서 돈도 많이 받을 수 있는 경력을 희생한다. 대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거나 약자를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한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희생한다. 희생이 가져오는 결과는 무엇일까? 그것은 깊은 결속이다. 먼저 우리가 아낌 없이 하나님께 우리의 소유와 시간을 드릴 때 하나님과의 깊은 결속이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가 기꺼이 서로에게 희생할 때 부부 안에, 가족 안에, 그리고 공동체 안에 깊은 결속이 일어난다. 구약 시대 하나님이 희생 제물을 요구하신 것은 인간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깊은 결속을 위해서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 인간이 생명의 능력을 얻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살펴봤듯이 레위기에서 소개 하는 다섯 가지 희생 제물인 코르바놋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레하크리브) 도구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희생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내 소유, 내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대가없이 내어준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희생하는 것을 싫어한다. 세상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을 위해 산다. 남을 위해 희생하기 보다는 내가 살려고 오히려 희생 제물을 찾는다. 이런 세상에서 자발적으로 희생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고, 손해 보는 삶으로 여겨진다. 희생이라는 가치를 발견하고 거기에 동의하기까지 희생의 삶을 사는 건 어려운 일이다. 지금 세상에서는 ‘편안한 삶’이 우리 시대를 뒤덮고 있는 가치다. 편안한 삶을 보장받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모든 것을 투자한다. 그러나 자신이 희생해야 하는 자리에는 좀처럼 있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희생하는 것이 정말 손해보는 삶일까?

성경은 우리에게 희생적인 사랑을 하라고 권면한다.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여기서 희생제물은 헬라어로 ‘뒤시안(θυσιαν)’이다. 히브리어로 ‘제바흐’와 같은 표현이다.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산 제물’ 역시 헬라어 ‘뒤시안’으로 표현되어 있다. 제물은 죽임 당해 피 흘리는 것인데, 산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희생하는 삶을 감당하라는 의미로 적용할 수 있다. 희생은 결속을 위한 것이다. 희생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결속을 이룬다. 점점 개인주의화되는 사회 속에서도 희생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공동체는 깊은 결속을 이룰 수 있게 된다. 구약 시대 하나님은 ‘희생’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제사장을 위임하여 세우셨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에도 희생이라는 가치를 실현해 낼 제사장들을 세우기 원하신다. 그것은 희생이 하나님과의 결속을 이루고, 사람들 사이의 깊은 결속을 이루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는 권면에 이어 또 이렇게 권면한다.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우리는 시대의 조류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려야 하는 시간을 앞두고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셨다. 죄인의 대표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처형되는 것은 피하고 싶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신다.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기도를 통해 분별하시고, 기꺼이 희생의 십자가를 선택하셨다. 결국 예수님의 희생은 그 피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깊은 결속을 이루게 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희생은 그 피로 구원받은 자들이 원수까지도 용서함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더 깊은 결속을 이루게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셨다.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희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러나 희생은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들이 정작 원하는 행복을 얻지 못하고 스스로를 불행하게 여기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과의 깊은 결속, 사람들과의 깊은 결속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결속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희생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희생이라는 가치를 발견하고 거기에 헌신한 사람은 행복하다.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그 사랑에 헌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희생의 비밀을 알기 때문이다. 희생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희생을 희생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희생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가장 높은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 여호수아서를 배우는데 교수님의 강의 중 이런 내용이 있었다. 여호수아서 1장 1절에서 모세는 ‘여호와의 종’으로 소개된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종자’로 소개된다. 여호수아는 오랜 시간 동안 모세의 수종자로 자신의 삶을 드렸다. 모세가 회막을 떠나 진으로 돌아왔어도 그는 회막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모세를 수종드는 희생적인 삶을 습관처럼 감당했다. 그런데 그가 죽을 때 성경은 여호수아를 모세처럼 ‘여호와의 종’이라고 표현한다. 교수님은 ‘여호와의 종, 하나님의 노예’라는 호칭이 하나님의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존귀한 호칭이라고 말하셨다. 종은 주인을 위해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희생하는 존재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 16:27)고 말씀하셨다. 자기 십자가라는 희생은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영광스러운 사명이자 부르심인 것이다. 바라기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그리스도의 노예로 우리의 가정에서, 교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희생의 소명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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