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3월 26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26 하나님의 믿음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제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되 여호와의 명령대로 하라” (레 9:7)
많은 직장인들이 ‘가면 증후군(Imposter Syndrome)’에 시달린다고 한다. 현재 하는 업무가 자신의 능력에 비해 과분하고 지금까지의 성과가 운이 좋아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밝혀지지 않을까 하는 초조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면 증후군’은 자신이 이룬 성공의 원인이 외부에 있다고 느끼며 스스로를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이룬 성과에 대해 주변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고 느끼는 불안 심리인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이러한 가면증후군에 시달렸을 듯한 한 사람이 나온다. 아론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드디어 성막이 완성되었다.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위임식을 거행하고 그들을 칠일 동안 회막에 머물며 ‘여호와께서 지키라고 하신 것을 지키라’고 명한다. 마침내8일 째 되던 날, 이제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 첫 제사를 집행하게 된다. 모세는 아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제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되 여호와의 명령대로 하라” (레 9:7). 여기서 ‘나아가’는 히브리어로 ‘카라브’라는 동사의 명령형이다. ‘가까이 가다’라는 뜻이다. 유대인 랍비들은 이 “가까이 가라”는 지시에 당황한다. 이것은 아론이 그때까지 제단과 거리를 두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 대해 랍비 라쉬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론은 제단에 가까이 가는 것이 부끄럽고 두려웠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부끄러워하느냐 이 일을 위하여 네가 택함을 입었느니라” 이처럼 아론이 제단 가까이 가는 것을 부끄러워 했던 이유를 우리는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우리는 금송아지 사건 때 아론이 했던 반응을 알고 있다. 그는 백성들이 광야에서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구할 때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장본인이었다. 후에 모세가 ‘당신이 어찌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라고 추궁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출 32:22,24) 아론은 어쩌면 금송아지 우상 숭배의 죄에 있어서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가 전체 이스라엘 백성을 속죄하기 위해 제단 가까이 나아가라는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아론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는 자신이 이 일에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절감했을 것이다. 자신도 죄인이면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 어쩌면 위선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랬기에 그가 제단에 가까이 가는 것이 부끄럽고 두려웠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때 모세는 아론에게 말한다. “너는 제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라”(레 9:7)는 것이다. 레위기서의 미드라쉬인 ‘토랏 코하님’에 의하면 이 때 모세가 아론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네가 어찌하여 부끄러워하느냐 이 일을 위하여 네가 택함을 입었느니라” 모세는 다름이 아니라 아론을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믿음을 전한 것이다. 그것은 ‘아론, 당신이 속죄하는 사명을 맡았다’는 것이다. 모세가 아론에게 전한 메시지는 이런 것이다. “그것이 당신이 선택된 이유다. 당신은 죄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당신은 누구보다 회개와 속죄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있다. 당신은 죄의 얼룩에서 깨끗해지고, 정화되고, 지워져야 한다는 당신의 영혼의 절규를 느꼈던 사람이다. 그래서 당신이 가장 큰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신이 감당하게 될 제사장 역할에 있어서 가장 큰 강점이 될 것이다.”
모세가 어떻게 아론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까? 그것은 그도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라고 그를 부르셨을 때 그는 이렇게 반응했다.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출 4:10).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과 바로에게 전해야 하는데 그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웅변가가 아니었다. 자신이 그 사명에는 자격이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런데 그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은 있다. 그것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믿음이었다. 하나님은 사실 그가 말에 자신이 없었기에 그를 택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탁월한 능력으로 군중을 설득할 수 있는 웅변가를 선택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비록 더듬거릴지라도 하나님의 말을 그대로 전할 사람,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을 가감없이 전할 사람을 선택하신 것이다. 이사야도 자신이 부적격자라고 느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이렇게 탄식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5).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자신이 부적격자라고 느끼며 이렇게 말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렘 1:6). 그러나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평가는 달랐다. 하나님은 이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큰 약점을 가장 큰 장점으로 사용하셨다.
우리 역시 남들이 모르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 앞에서, 직분 앞에서 머뭇거리며 부끄러워할 수 있다. 우리는 아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모세가 한 역할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아론이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할 때에도 아론을 믿었다. 그런데 그것은 모세의 삶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의 삶에서도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믿음인 것이다.
수학자 에티엔 파스칼(Etienne Pascal)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과학자의 하나님도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가르친 대로 믿는 자의 하나님이다. 신앙은 인간의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믿음은 철학자나 과학자들이 추구하는 합리적인 생각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의 이성과 감각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믿음을 취해야 한다. 기도를 통해 성령님이 주시는 감동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
하나님은 아론에게 그의 사명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레 10:10-11,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또 나 여호와가 모세를 통하여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 여기서 아론의 사명은 두가지 동사로 표현되어 있다. ‘레하브딜(להבדיל)’과 ‘레호로트(להורת)’이다. 아론의 사명은 첫째, 거룩하고 속된 것,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는 것이다. 둘째는 모세를 통해 주신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하나님이 정하신 기준과 뜻을 분별하고 가르치는 것, 그것이 제사장의 사명이었다. 이것은 신약 시대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우리들의 사명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생각과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고 계신 것을 따라야 한다. 사람을 평가하는 것도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을 따라선 안 된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어떤 믿음을 갖고 계신지를 분별해야 한다.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대하는 자신의 판단 기준이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에게 취했던 태도는 이방인들은 부정한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편견을 깨기 원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베드로가 욥바에 왔을 때 환상 중에 유대인이 부정하게 여기는 동물을 잡아 먹으라고 하셨다. 그 때 베드로는 이렇게 반응 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행 10:14). 이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 환상으로 베드로는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초청에 응했고, 그들에게 복음을 나누었을 때 많은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놀란다.
예수님 역시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믿음을 알았던 분이다. 바리새인들은 손을 씻지 않고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자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었다고 비난한다. 그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 7:15-16,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밖에서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은 음식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음식물은 정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정말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며,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유대인들은 부정한 자와의 접촉을 꺼렸다. 그들은 부정한 것과 접촉할 경우 거룩이 훼손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철저한 격리와 거리두기로 부정한 것과의 접촉을 차단했다. 그것이 구약 시대 모세의 법이었다. 그러나 신약성경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히 7:18-19,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그러면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더 좋은 언약의 보증으로 오셨음을 선포한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거룩의 방향이 바뀐다. 구약시대처럼 부정한 것에서 자신을 분리하고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한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상종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셨다. 앉은뱅이와 소경이 그분과의 접촉으로 온전해 진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에게 다가가 그를 소생시키신다.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았던 혈루증 여인도 고쳐주신다. 마을에서 추방되어 철저히 격리되어 살아갔던 나병환자들에게도 친히 찾아가 치유하신다. 예수님은 부정한 자들과 접촉했음에도 그의 거룩이 훼손되지 않고 부정결의 문제들을 해결하셨다. 그것은 그가 부정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믿음을 아셨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기적의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분리되고 고립된 나라가 아니다. 전진하고 침노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히 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예수님의 보혈은 어떤 더러운 것도 맑히시는 능력이 있다.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없다. 예수님의 피는 분리가 아닌 연합으로 이끈다. 서로 원수 되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님의 보혈 아래 한 새 사람으로 거듭난다. 바울은 말한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정죄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도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 안에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하였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그 믿음은 곧 하나님이 갖고 계신 믿음인 것이다.
나는 유대인 친구들이 음식법과 같은 ‘전에 있던 계명’ 때문에 ‘하나님의 믿음’과 동떨어져 살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지금은 이방인과의 분리를 통해 거룩을 지키는 시대가 아니다. 이방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고 거룩을 선포해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을 갖고 계신데, 그 믿음과 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제사장의 사명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이 있기에 그 정하신 한계 밖으로 사람들이 가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한계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한계를 두셔야 했다. 한계를 갖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간 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 밖의 것을 욕망하게 만든다. 그래서 한계 밖의 것을 욕망할 때 거룩은 깨지고, 인간은 에덴을 상실하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와 하나님의 믿음을 따라 살기 보다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하나님의 질서를 마음대로 변형하는 시대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하실 때가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의 믿음’을 구하는 제사장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구별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세상과 분리되어 나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거룩을 전염시키는 자들이 되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한 제사장의 사명을 맡기시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믿음이 크시다. 그리하여 우리를 믿으시고 불러주시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끄러워 하지 말고, 더욱 담대히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