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4월 2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27 정하게 되는 법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레 13:45-46)
지난 일주일 사이 이스라엘에서는 세 번의 테러가 있었다. 총 열 한 명이 사망했는데, 우려가 되는 점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총격 테러였다는 점이다. 이제 유대인만이 아니라 우리도 안전할 수 없겠다는 염려가 된다. 테러는 혐오의 극단적인 표현이다. 구약시대 나병 환자는 공동체에서 극혐의 대상이었다. 피부가 변해서 보기 흉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전염될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나병을 진단하고 그 대상자를 정결케 하는 과정이 나온다. 우리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 혐오대상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혐오가 확산되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레 13:2-3,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여기서 ‘나병’은 히브리어로 ‘짜라아트(צרעת)’다. 그런데 짜라아트는 오늘날 ‘한센병’이라고 부르는 나병과는 다른 것이다. 성경에는 옷과 집안의 벽에 피는 곰팡이도 ‘짜라아트’라고 표현된다. 따라서 짜라아트는 곰팡이균으로 인한 악성 피부병이라고 보는 게 좋다. 당시짜라아트의 증상을 점검하고 그 사람이 부정한지 정한지를 선언하는 것은 의사의 일이 아니었다. 제사장의 일이었다. 정한지 부정한지는 의료적 판단기준이 아니라 종교적 판단기준이기 때문이었다.
레 13:4, “피부에 색점이 희나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피부가 희게 색점이 났지만 우묵하게 패이지 않고 털이 희지 않으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7일간 격리한다. 여기서 ‘가두어 둔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싸가르(סגר)’인데, 영어로는 ‘quarantine’이다. 일주일 격리는 구약시대 때부터 있었던 제도임을 알 수 있다. 레 13:6, “이레 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지니 그 환부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의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격리 후에 환부가 엷어졌으면 제사장은 음성판정을 내린다. 그리고 그 환자를 정하다고 선언한다.
자 그런데 양성 판정이 나면 어떻게 될까? 레 13:45-46,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확진 판정이 난 사람은 스스로 옷을 찢고 입을 가리며 자신이 부정한 자임을 알려야 했다. 그리고 병이 낫기까지 진영 밖에서 혼자 살아야 했다. 공동체와는 완전 격리되는 것이다. 여기서 ‘부정하다’는 말은 ‘불결하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영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부정하다’라는 말 ‘타메(טמא)’는 종교적인 의미로 더럽혀지고 부패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 랍비들은 이 악성피부병의 주된 원인을 ‘라숀 하라(לשון הרע)’ 때문이라고 본다. ‘라숀 하라’는 ‘evil tongue, bad speech, 사악한 혀, 나쁜 말’이라는 뜻이다. 요즘으로 하면 ‘혐오 발언’이라 할 수 있다. 유대 랍비들은 ‘라숀 하라’가 우상숭배, 간음, 살인이라는 죄, 셋을 합친 것보다 더 나쁘다고 말한다. 그것은 동시에 세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나쁜 말이 그 말을 받는 대상 뿐만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 자신과 그것을 옆에서 듣는 사람까지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리암도 모세에 대해 나쁘게 말하다가 나병에 걸린다. 짜라아트, 악성 피부병에 걸린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를 흔드는 것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결국 미리암은 짜라아트에 걸려 진영 밖으로 격리 조치된다. 그녀는 영적으로 부정하게 된 것이고, 그 결과 공동체와의 교제에 부적합한 자가 되었기에 격리가 된 것이었다. 그래서 짜라아트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이 부정한 사람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 그리고 공동체와는 철저히 격리 되어야만 했다. 혼자 있는 그 시간은 참회의 시간이 되었고, 다시 죄에서 돌이켜 정결함을 얻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혐오의 언어들이 넘쳐난다. 특히 인터넷 댓글이나 유튜브 영상을 보면 잔인하고 파괴적인 혐오 표현들로 가득하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미국과 영국 내 온라인 혐오 발언이 20%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한다. 혐오는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 삶이 힘들거나 위기가 오면 사람들은 좌절과 불안을 느낀다. 고통스럽고 두려운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분노를 쏟아 낼 대상을 찾는다. 그런데 그 분노는 강자를 겨누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다. 나보다 약한 사람을 조지는 것이다. 혐오는 혐오 대상이 되는 누군가의 존재를 지우는 행위다. 혐오는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폭력인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혐오 표현을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하신 그 사람의 존재를 부인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라숀 하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약 3:6, 8-9,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성경은 내가 하는 말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쉽게 내뱉은 말이 누군가는 자살을 결심할 만큼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레위기 14장에는 악성피부병 환자들을 다시 정결하게 하는 의식이 소개된다. 제사장이 진영 밖에 있는 환자를 진찰하고 그 환부가 나았으면 우슬초로 흐르는 물에 새의 피를 찍어 일곱 번 뿌린다. 그리고 ‘정하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7일을 더 장막 밖에 머물게 한다. 이어서 8일 째 되는 날 속건제를 드리게 한다. 속건제는 해를 끼친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제사이다. ‘라숀 하라’로 인해 다른 사람과 공동체에 해를 입힌 것에 대해 보상하는 제사인 것이다. 격리되었던 환자는 속건제를 드리며 완전히 죄사함을 얻게 된다. 그리고 다시 공동체로 복귀하게 된다. 따라서 악성 피부병에 대한 규례는 그들을 격리하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배제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을 다시 공동체로 회복하기 위한 조치였다. 조화로운 공존을 위해 잠시 격리와 참회의 시간을 허용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한 나병 환자를 만나셨다. 그는 예수께 나아와 절하며 말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에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다. 그러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게 된다. 구약시대에 짜라아트로 확진된 사람과 접촉하는 사람은 그 역시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은 철저한 격리와 거리두기로 부정한 자와의 접촉을 차단하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시간에 신약시대에 와서 거룩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나누었다. 구약시대처럼 부정한 것에서 자신을 분리하고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한 것을 향해 나아가 그 부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더 좋은 언약의 보증으로 오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상종하지 않았던 나병 환자에게 다가가신 것이다. 예수님은 부정한 자와 접촉했음에도 그의 거룩이 훼손되지 않고 오히려 부정결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부정함을 아시고 고쳐주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악한 말로 더럽혀진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분이시다. 그리하여 우리를 다시 하나님 앞과 공동체 앞으로 돌려보내시는 분이시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 피 흘리셨다. 그 사실을 믿고 주님의 보혈을 우리 마음에 뿌릴 때 우리는 다시 정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가만 보면 우리 시대 많은 사람들이 부정결의 문제로 씨름하고 있다. 자기 스스로 ‘나는 부정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나 권위자로부터 ‘라숀 하라’, 자신에 대한 안 좋은 평가의 말을 받아왔던 사람들은 낮은 자존감으로 신음하며 자기 스스로를 부정하게 여긴다. 살아오면서 주변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 역시 스스로를 부정하게 여긴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여러가지 평가와 비판의 말을 들으며 스스로를 부정하게 여기게 된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나는 부정하다’라는 느낌을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너는 정하다”는 선언을 받아야 한다.
나쁜 말, ‘라숀 하라’의 근원은 무엇일까? 최초의 ‘라숀 하라’는 에덴동산에서, 뱀에 의해 저질러졌다. 뱀은 간교한 말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했다. 또한 아담과 하와를 교묘하게 속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했다. 뱀의 교활한 말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부정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도 멀어진다. 서로 안의 친밀함도 파괴된다. 바울은 말한다.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와 사망이 합법적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성경은 사탄을 ‘참소하는 자’(계 12:10)라고 말한다. 사탄의 참소로 인해 우리 인간 안에 부조화가 시작되었다. 서로를 미워하고 혐오하게 되었다. 사탄의 참소와 그 영향 아래 나쁜 말을 하게 되는 사람들로 인해 우리는 깊은 영적 상처를 받게 된다. 이것은 구약시대 짜라아트와 같은 영적 질병인 것이다. 즉 나쁜 말로 인해 부정하게 된 상태인 것이다. 사탄은 교묘한 말을 사용하여 세상에 사망을 선물했다. 우리 인류는 이 나쁜 말로 인해 영적인 사망을 경험하고 있다. 그 말과 참소에 의해 오염되면서 스스로를 부정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구약 시대 나병환자처럼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헤치며, ‘나는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치고 있는 듯 하다.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영혼이 그처럼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런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다가가지 않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사회와 공동체에서 격리되는 것이다. 슬픈 일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이상 사망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로 우리를 부정하게 했던 모든 나쁜 말과 사망의 영향력을 끊어내야 한다. 성경은 또한 이렇게 말한다. 계 12:10-11,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사탄의 참소, 라숀 하라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어린 양의 피의 능력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던 나병 환자처럼 예수님께 나아가 요청해야 한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부정하게 여기는 부분에 손을 대어 고치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 분을 통해 정함을 얻어야 한다. 그분에게 나의 부정함을 고백하며 “너는 정하게 되었다”는 그분의 선언을 들어야 한다.
혐오와 경쟁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진짜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다. 외모와 조건에 상관없이 나를 용납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을 찾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평가와 험한 말들로 인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그 속마음은 나병보다 더 심하게 문드러져 있는 사람들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라숀 하라, 거친 말과 혐오 표현으로 인해 부정하게 된 것이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부정하게 된 자를 고치셨던 것처럼 예수님을 통해 정함을 얻은 우리들은 이제 혐오로 오염된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어야 한다. 따뜻한 말, 격려의 말로 그들 안에 상처로 자리 잡은 짜라아트를 씻어줘야 한다. 바라기는 사망의 권세로 오염된 이 세상에 예수 생명의 권세를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