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4월 9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28 간절한 믿음
“너희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부정에서 떠나게 하여 그들 가운데에 있는 내 성막을 그들이 더럽히고 그들이 부정한 중에서 죽지 않도록 할지니라” (레 15:31)
이스라엘 나프탈리 베네트 총리 연정이 흔들리고 있다. 같은 당 소속 실만 의원이 연정 지지를 철회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결정으로 과반 의석이 무너졌기에 이스라엘은 어쩌면 또 다시 총선을 치러야 할 수도 있게 되었다. 실만 의원이 지지를 철회한 이유는 유월절 ‘무교병’ 논쟁 때문이었다. 최근 이스라엘 보건부 호로위츠 장관이 병원장들에게 보낸 편지가 문제의 발단이었다. 그 편지는 ‘유월절 기간 병원 방문객들에게 누룩이 들어간 빵의 반입을 허용하라’는 내용이었다. 극우 성향인 그녀는 “나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국민의 유대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에 동참하지 못한다”고 연정 지지를 철회하는 이유를 밝혔다. 이에 대해 세속적인 유대인들은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구약 시대의 율법과 관행이 더이상 필요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이처럼 구약 성경에 있는 수 많은 율법 조항들은 아직도 현대 이스라엘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삶에 실제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오늘은 이번 주 토라포션에 나오는 정결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레 15:19, 24, “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의 몸에 그의 유출이 피이면 이레 동안 불결하니 그를 만지는 자마다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 누구든지 이 여인과 동침하여 그의 불결함에 전염되면 이레 동안 부정할 것이라 그가 눕는 침상은 다 부정하니라” 이것은 여인의 유출에 대한 계명이다. 월경은 여자가 매월 주기적으로 하는 생리 현상이다.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를 부정하게 취급하는 것은 피를 흘리기 때문이다. 생명이 피에 있는데, 그것이 유출되는 것을 죽음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유출은 죽은 시체를 만지는 것처럼 부정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 의식상의 부정이지 실제로 그 사람이 부정한 죄인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유대인들은 이 계명에 따라 부인이 생리 기간 중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다. 침대도 코셔 침대를 쓴다. 같이 붙여 있던 침대를 따로 떼어 놓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처럼 먹는 것만이 아니라 잠자리에서도 거룩을 생활화해야 했다.
레 15:25, “만일 여인의 피의 유출이 그의 불결기가 아닌데도 여러 날이 간다든지 그 유출이 그의 불결기를 지나도 계속되면 그 부정을 유출하는 모든 날 동안은 그 불결한 때와 같이 부정한즉” 자 그런데 간혹 생리 기간이 아닌데도 유출이 있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사람은 유출하는 모든 날 동안 부정한 자가 되는 것이다. 유출은 지난 주 살펴본 문둥병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질병이 아니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지나갈 수 있는 질병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은밀한 질병에 대한 규례가 있는 것일까? 거기엔 이유가 있다. 레 15:31, “너희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부정에서 떠나게 하여 그들 가운데에 있는 내 성막을 그들이 더럽히고 그들이 부정한 중에서 죽지 않도록 할지니라” 먼저 유출에 대한 규정은 그들을 부정에서 떠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유출병이 있는 자와 혹 그와 동침한 자가 성막에 들어가 죽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또한 자신의 부정을 모르고 더 심각한 고통을 초래하게 될 것을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인간을 보호하고 하나님과의 거룩한 경계선을 지키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던 것이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 보면 혈루증으로 고생했던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무려 12년 동안 하혈하는 병을 앓았다. 그녀의 12년의 삶은 어땠을까? 그녀는 여러 의사를 찾아 갔다. 가진 돈도 다 썼다. 그러나 아무 효험도 없고 병은 더 심해졌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멀리했다. 이 여자와 접촉했다가 자신도 부정해 질까 봐 그녀를 피했다. 혹 남편이 있었다면 그는 하혈하는 그녀를 버리고 새 장가를 갔을 것이다. 남편도 사회도 그녀를 버렸다. 그녀 안에는 자신은 부정한 자라는 깊은 죄책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도 자신을 버렸을 것이라는 깊은 절망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의 소문이 들려왔다. “그분이 병자들을 고치셨대.” “그분이 나병환자도 깨끗하게 하셨대.” “그분이 바람과 바다도 잠잠하게 하셨대.” “그분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셨대.” 실의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이러한 말들이 들려왔다. ‘이런 분이라면 나를 고치실 수 있겠다.’ 이러한 간절한 믿음이 그녀에게 올라왔다. 그녀는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 예수님은 당시 갈릴리 회당장의 딸을 고치러 가시던 중이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며 에워싸 미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무리 가운에 끼어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것은 그의 옷에 손만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위대한 랍비나 옷자락에서 치료하는 능력이 나온다고 믿었다. 말라기서에 이런 말이 있다. 말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이 문장의 히브리어 원어는 좀 다르다. 원문을 직역하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 의로운 해와 겉옷에서(비크나페하, בכנפיה) 치료가 나타나리니”이다. 카나프(כנף)가 ‘겉 옷 자락’이라는 뜻인데, 이 말씀에 따라 이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그 옷자락에 손을 대기 원했던 것이다. ‘손을 대다’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합토마이’인데, 이 말은 ‘불을 붙이다, 불을 켜다’라는 뜻의 ‘합토’에서 온 말이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들이신 것과 그분이 메시아이신 것에 대한 믿음으로 그 분의 겉 옷에 손을 대었을 때 어두웠던 그녀의 인생에 불이 켜진 것이다. 12년 동안 흐르던 하혈이 멈추고 처절했던 삶의 고통이 멈춘 것이다. 예수님의 치료의 능력이 그녀의 고통의 근원을 치유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것을 아시고 돌아 서며 말씀하셨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제자들은 워낙 군중들이 많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 행한 여자를 주목하셨다. 여자는 두려워 떨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털어 놓는다. 여자는 무엇을 두려워했을까? 어쩌면 부정한 자신이 스스로 격리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왔다는 것 자체가 모세의 법에 대한 위반이었다. 더군다나 손을 뻗어 예수님을 만짐으로 부정을 옮겼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에서는 여인이 ‘옷 가’에 손을 대었다고 묘사한다. ‘옷 가’는 헬라어로 ‘크라스페돈’인데, 이것은 유대인들이 겉 옷에 달고 다니는 옷 술인 ‘찌찌트’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아무나 만질 경우 처벌도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족은 예외였다고 한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려 두려워 떨고 있는 여인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예수님은 그녀를 딸로, 가족으로 불러주셨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면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평안’이라는 헬라어 ‘에이레네’는 히브리어로 ‘샬롬’이다. 이 여인에게 12년 동안 깨어진 것은 사람들과 샬롬, 하나님과의 샬롬, 그리고 자신과의 샬롬이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깨어진 샬롬을 회복시켜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선언하셨다. 이제 이 여인은 병이 나음으로 공동체의 삶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성전에 나가 제사드릴 수 있는 예배가 회복되었다. 예수님은 이후 회당장의 집으로 가셨다. 죽은 그의 딸의 손을 잡고 외치셨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이 예수님의 명령에 죽은 소녀가 살아났다. 소녀의 나이는 열 두 살이었다. 예수님은 12년으로 끝났던 이 소녀의 삶도 다시 살려주셨다.
구약 모세의 법에 의하면 유출하는 자와 접촉하거나 시체와 접촉하는 자는 그 역시 부정하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그 부정함을 상관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고치고 살리실 수 있었을까? 예수님 당시 구약의 정결 예법은 일반 민중들을 가장 억압하는 율법이 되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의식상 부정하게 된 자를 격리시킨 뒤 회복하게 하여 다시 공동체로 돌려보내는 그 원래의 의도를 잘못 적용했다. 절름발이, 소경, 이방인들을 다 부정한 죄인으로 여겨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차별하고 차단하는 법으로 적용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잘못 적용되는 구약 예법들의 시효 만료를 선언하셔야 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천칙으로 알던 안식일 법을 일부러 어기셨다. 정결법도 어기셨다. 죽은 나사로나 회당장의 딸의 시신을 만지셨다. 혈루증 여인이 자신이 옷자락을 만지는 것도 허락하셨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만지면 빛이 어둠이 되는 것이 아니다. 어둠이 빛이 되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짐으로 여인의 인생에는 환한 불이 밝혀졌다. 어두웠던 자가 빛을 보고 손을 뻗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 어둠이 짙을수록 더욱 간절함으로 믿음의 손을 뻗어 자신의 인생에 불을 밝혀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예수님은 진정한 율법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옛 언약의 시대를 끝내셔야 했다. 그리고 새 언약의 시대를 여셔야 했다. 히 9:25-26,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님은 구약 시대의 끝에 이 세상에 오셨다. 의로우신 그분이 영원한 한 번의 제사를 드리심으로 구약의 희생 제사를 끝내셨다. 예수님은 죄인과 모든 부정한 자들과 접촉하심으로 구약의 원칙대로 스스로 부정하게 되셨다. 그러나 그들을 대신하여 모든 부정함과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모든 부정한 자들을 정결하게 하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히 1:1-3,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은 구약 시대 부정결의 문제를 예수님 안에서 완성하셨다. 그분이 나를 정결케 하는 피 흘리셨음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는 그 피의 능력으로 깨끗하게 되는 것이다. 치유되고 회복되어 공동체의 삶, 예배의 삶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오래된 병들이 있다. 12년 동안 하혈했던 여인 못지 않게 수십 년 피를 흘리는 아픔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잘못된 가르침과 믿음 때문에 자신을 부정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피 흘리며 사람들과 격리된다. 아무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들은 피 흘리며 하나님과도 격리된다. 하나님은 이런 나를 사랑하지 않으실 거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다. “딸아, 아들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님은 우리의 오랜 질병 때문에 끊어졌던 하늘 아버지와의 관계를 다시 이어주기 원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를 구원하고 치유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지 마술과 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다. 우리가 잘못된 가르침과 편견을 뚫고 간절한 믿음의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 술을 만질 때 우리 인생에도 불이 켜지는 것이다. 그런 간절함이 차이를 만들고 기적을 만드는 것이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일도 간절함을 가졌던 누군가에 의해 가능한 일로 바뀌는 것을 우리는 종종 목격한다. 예수님 주위에 많은 무리가 있었지만 오직 손을 내밀었던 여인만이 고침을 받았다. 여러분에게도 의사가 못 고치는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상담사나 정신과 의사도 못 고치는 오래된 마음의 병들이 있을 것이다. 간절함으로 손을 뻗어 예수님의 옷 자락을 잡기 바란다. 주님의 치유의 능력으로 오랜 병에서 놓임을 받고 샬롬을 회복하는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