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4월 30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1 거룩의 비결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 19:2)
오늘 토라포션의 제목은 ‘케도쉼(קדשים)’이다. ‘거룩하라’라는 뜻이다. ‘거룩하라’는 명령처럼 부담스런 것은 없다. 우리가 얼마나 거룩과 거리가 먼 사람들인지는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자가 된다는 것은 의로운 자가 된다는 말과 같은 말일 것이다. 지난 주 야리브가 질문을 했다. 베드로후서 말씀에 관한 질문이었다. 벧후 1:5, “For this very reason, make every effort to add to your faith goodness; and to goodness, knowledge” 질문은 이랬다. Is it that faith is already without goodness, so we need to add goodness to it? Does it mean that goodness is independent of faith? 답변은 간단히 해주었다. 여기서 “add”가 순차적으로 뭔가를 더하라는 수학적 개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하라”는 것은 헬라어로 “공급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믿음이란 덕목이 선행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덕목이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답을 주었다. 물론 믿음이 기독교인의 가장 기초가 되는 덕목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믿음에는 선행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답변을 주고 나서도 이 질문이 계속 생각났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선행을 중요시 하기 때문이었다.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니 이 질문이 “선행과 상관 없이 믿음이 성립될 수 있는가?”, “의롭지 않아도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이해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같이 찾아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레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여기서 “너희는 거룩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케도쉬 티흐유(קדשים תהיו)”다. 그런데 이것은 명령형이 아니다. 미래형이다. “너희는 거룩하게 될 것이다”라는 선언이다. 이렇게 선언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행을 통해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과 선포로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토라포션 ‘케도쉼’이 속죄에 관한 규례를 다룬 ‘아하레이 모트’란 파라샤 이후에 나온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은 반드시 속죄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레위기 16장을 보면 대속죄일 규례가 나온다. 욤 키푸르는 일년에 한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해 동안 지은 모든 죄를 사함 받는 날이다. 아무리 의로워보여도 사람은 은밀한 죄가 있는 법이다. 욤 키푸르가 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속죄가 필요한 존재라는 성경적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이 날 두 마리의 염소가 희생제물로 드려진다는 것이다.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하여 속죄제물로 죽임을 당한다.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하여 산 채로 광야로 보내진다. 아사셀은 히브리어로 아자젤(עזאזל)인데, 염소를 뜻하는 ‘에즈(עז)’와 ‘사라지다’란 뜻의 ‘아잘(אזל)’이 결합된 말이다. 즉, 아사셀은 ‘사라지는 염소’인 것이다. 이 염소를 광야로 보내기 전에 하는 의식이 있다. 레 16:21-22,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이 의식은 대제사장이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그 염소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이 염소는 그야말로 백성들의 죄를 뒤집어 쓰는 희생양, Scapegoat가 되는 것이다. 이 염소는 백성들의 모든 죄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면 광야에 놓이게 된다. 유대인들은 이 ‘접근하기 어려운 땅’을 광야에 있는 절벽으로 보고, 거기서 염소를 떨어뜨렸다고 해석한다. 그러면 염소는 백성들의 죄를 지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염소가 사라지면서 백성들의 죄도 사라지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희생양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다. 사 53:5,7-8,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이 말씀을 보면 누가 생각나는가?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이렇게 외쳤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는 이스라엘 나라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메시아는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지기 위해 희생양으로 오시는 분이었다. 예수님이 죽으심과 함께 이 땅에서 사라지면서 인류의 원죄에 대한 사함이 선포된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있는 사람들을 이렇게 호칭한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고전 1:2)”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다 뒤집어 쓰고 사라진 속죄양이 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끝내신 분이다. 그것은 구약의 제사처럼 매년 반복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 분이 흘리신 피가 나의 죄를 단번에 속한 것이다. 이러한 속죄가 있었기에 거룩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이 거룩한 성도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선행을 많이 했는지, 우리가 얼마나 의로운지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조건이 아니다. 선행은 거룩의 조건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에게 따르는 결과인 것이다.
레위기 17장에서는 피흘림이 속죄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레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죄인이 거룩해지기 위해서는희생 제물의 피가 필요했다. 죄인의 죄를 속하는 속죄의 피가 필요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이유는 이 속죄의 피를 흘리셔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룩은 우리의 의나 선행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작성하신 속죄를 믿음으로 받아드릴 때 거룩한 성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속죄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을 회복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에 관한 규례들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사랑하라’는 두 가지 명령이 나온다.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고, 다른 하나는 ‘거류민을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사랑하라’는 명령을 이어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거룩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보자.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원수를 갚는 것, 동포를 원망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하는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 이것은 우리의 본능적인 대사다. 그러나 복수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한 사회의 사람들이 일일이 원수를 갚고, 주변 사람들을 원망한다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될까? 거룩이 파괴된다. 하나님은 원수를 갚는 것, 동포를 원망하는 것 대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원수를 갚고 싶고, 동포를 원망하고 싶은 본능 대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웃 사랑을 선택할 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거룩하다’고 보시는 것이다.
이제 ‘거류민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보자. 레 19:34,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기서 거류민은 히브리어로 ‘게르(גר)’다. ‘이방인, 외국인’을 말한다. 너희 가운데 살고 있는 이방인, 외국인을 자기 같이 사랑하는 명령이다. ‘이방인’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렵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방인을 두려워한다. 나와 공유할 만한 것이 없는 낯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사랑할 이유를 좀처럼 찾기 힘들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 근거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너희도 그 때를 생각하고 지금 너희 가까이 있는 거류민들에게 잘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방인들을 배려하라는 계명을 또 찾아볼 수 있다. 레 19:9-10,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기서 묘사한 것처럼 거룩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해 이삭을 흘리는 사람이다. 자기 것이라고 남김 없이 거둬드리는 사람이 아니다. 보아스가 그랬다. 그는 이방 여인 룻을 위해 이삭을 흘렸다. 그러다가 룻과 결혼하여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다. 흘리는 게 남는 장사인 것이다.
거룩은 이처럼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관계적인 것이다.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 거룩인 것이다. 단지 혼자 열심히 기도하다가 성령의 은사 받고, 환상을 보는 게 거룩이 아니다. 거룩은 나의 욕망을 희생하고,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해 사는 것이다. 결국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자가 거룩한 자인 것이다. 레위기 18장에는 성관계에 대한 규례가 나온다. 주변 세상에서 다 하는 성관계를 하나님의 백성에게 금지시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결혼 후 부부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하는 모든 성관계가 거룩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이 단순히 토라의 계명 때문에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나의 의가 된다. 그러나 속죄의 은혜를 경험한 자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이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에게 나를 내어준다면 그것은 거룩한 것이다. 이것이 거룩한 성도의 부르심인 것이다. 우리는 결국 ‘주는 존재’가 되라고 부름 받은 것이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자신이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로마서는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의 존재적 사명은 바로 ‘주는 자’인 것이다.
결혼도 사실은 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결혼 전 우리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전부를 줄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막상 결혼하면 어떤가? 우리는 내가 얼마나 받는데 익숙하고, 주는 것이 힘든 존재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모든 관계에는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하다. 내가 죽을 때, 남도 살고 나도 사는 게 십자가의 역설이다. 내가 피 흘릴 때 남이 생명을 얻는 것이 십자가의 비밀이다. 우리는 이 은혜를 예수님을 통해 이미 얻었다. 우리 역시 이 십자가의 은혜를 적용해야 거룩에 이르게 된다. 내 의지, 내 욕망을 죽이고,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해 나를 내어주는 것이 거룩인 것이다. 이 원칙을 적용하며 부부생활을 한다면 여러분은 10년, 20년 뒤에는 이전보다 훨씬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이다. 결혼은 결국 ‘주는 자’로 거듭나기 위한 것이다. 결혼해서 아기가 태어나면 우린 밤낮 없이 주는 일을 해야 한다. 젖을 물려줘야 하고,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고, 업어주고 안아줘야 한다. 그것을 잘 감당해야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가정은 하나님의 ‘주시는 능력’이 전수되는 곳이다.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곳이 아니라, 자녀를 위해 내어주고, 나그네를 위해 이삭을 흘리는 곳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줄 수 있는 가정과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한 생명의 능력이 흘러가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힘 있는 사람이 대우 받는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거룩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그들은 자신이 성공하고 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행복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려는 선택을 피한다.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이삭을 흘리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흘러가기를 원하신다. 관계 속에서 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비결인 것이다. 이렇게 관계 속에서 거룩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보다 훨씬 행복하다. 그것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기(행 20:35)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줄 때 하나님의 축복과 생명의 능력이 그 속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우리에게 허락하신 관계 속에서 아낌없이 사랑하고 주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목적을 이루는 성도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