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5월 7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2 질투하는 교회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레 20:26)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나누겠다. 각 나라 여자들의 남자에 대한 이상형이 다르다고 한다. 미국은 운동 잘하는 남자, 프랑스는 똑똑한 남자, 일본은 돈 많은 남자라고 한다. 한국은 뭘까? ‘운동 잘하고 똑똑하고 돈 많은 남자’라고 한다.
그저께 제니의 결혼식이 은혜 가운데 마쳐졌다. 특히 유발이와 밍주가 신부 들러리 하느라 수고가 많았다. 그 날 신부 친구로 드레스 입은 모습이 너무 예뻤다. 바로 시집가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교회 친구들 특송하느라 애썼다. 신랑 신부 몰래 준비한 건데, 합창이 참 아름다왔고, 신랑 신부도 기대치 못했던 특송이라 너무도 좋아했다. 가사가 아가서의 내용으로 만든 노래였다. “Arise my love, my lovely one, come” 아마도 결혼식을 참석한 우리 싱글 친구들은 ‘나의 이상형은 어디 있을까, 이 노래를 불러줄 나의 사랑은 어디 있을까’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이스라엘 땅에 세워진 지 15주년이 되는 날이다. 오늘은 아가서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아 8:6-7,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본문 6절에서 술람미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고 요청한다. 이것은 언약에 기초한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다. 도장은 약속에 대한 보증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가서의 신부는 상사병에 걸릴 만큼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만이 아니라 그 사랑에 대한 영원한 보증을 원한 것이다. 지혜로운 요청이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감정이 사라질 때 얼마든지 버림받거나 잊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그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결혼한 부부들을 조사한 결과 정말 로맨틱한 사랑에 사로잡힌 기간은 평균 2년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물론 이틀이 안 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구름 위에 떠다니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때가 있다. 우리의 눈이 열리면서 우리는 상대방의 결점을 보기 시작한다. 결혼한 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우리는 ‘아, 내가 정말 나와 다른 사람하고 결혼했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상대방의 결점이 점점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배우자가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점점 짜증나기 시작한다. 사랑에 빠졌을 때는 보이지도 않았던 티끌 같은 것들이 이제 태산처럼 보이는 것이다. 실제 결혼 생활에서 우리는 화장실 변기 뚜껑을 내리고 물을 내렸는지, 아닌지를 가지고 싸운다.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맞는데, 어느 순간 결혼 생활은 서로가 적군이 되어 싸우는 전쟁터가 된다. 그러다 보면 한 때 ‘사랑에 빠졌던’ 감정은 도대체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게 된다. 많은 결혼한 커플들이 그러한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이혼을 하게 된다. 감정에 기초한 사랑은 감정이 흔들릴 때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우리의 감정이 흔들릴 때 우리는 다시 언약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결혼 하신 분들은 이미 의지적 결단에 의해 사랑을 하기로 언약을 맺은 사람들이다. 병들었을 때나 힘들 때도 죽는 날까지 사랑하겠다고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서약했다. 그리고 혼인 신고하며 도장까지 찍었다. 결혼하신 분들은 아가서 신부의 요청대로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도장 찍은 인생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식었다고 물릴 수 없는 인생이다. 도장은 지워지지 않는다. 언약도 지워지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유지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 감정이 사라진 뒤에도 변함없이 붙들어야 하는 게 바로 언약에 기초한 사랑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언약에 기초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질투할 때 언약에 기초한 사랑을 할 수 있다. 아 8:6,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여기서의 질투는 덜 성숙한 사람이 ‘저게 나보다 예뻐?’하면서 갖게 되는 그런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니다.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아내를 바라보며 남편은 질투를 느껴야 정상이다. 그것은 아내와 남편이 배타적인 언약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내 아내는 이 놈, 저 놈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나 하고만 언약을 맺었기에 다른 사람에게는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아 4:12)이 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약적 사랑에는 반드시 그것을 방해하고 빼앗는 것에 대한 불 같은 질투가 따르는 법이다.
하나님도 질투하시는 분이시다. 출 34:14-15,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너는 삼가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하게 섬기며 그들의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제물을 먹을까 함이며”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 본문에서도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레 20:26,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우리는 더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질투는 세상 사람이 이기적으로 하는 질투와 다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언약을 맺은 대상을 보호하고 지켜내기 위한 질투인 것이다. 언약에 대해 질투하는 것은 언약을 맺은 상대에 대한 최고의 존중을 의미한다. 세상 신에 마음을 빼앗기는 우리를 바라보며 질투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존중하시고 우리를 지켜주길 원하시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 역시 그 언약적 사랑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 질투해야 한다. 분노해야 한다. 그 사랑을 지켜내고, 충성스럽게 가꿔야 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와 언약적 관계에 있는가? 가장 먼저 우리는 사랑하는 아내, 남편, 그리고 가족과 언약적 관계 안에 있다. 우리는 다른 어떤 것들이 이 관계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질투하기까지 이 관계에 충성해야 한다. 묵은 땅을 기경해서라도 사랑을 꽃 피우고 열매 맺게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근본적으로 주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와 주님 사이에 어떠한 다른 것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질투’가 히브리어로 ‘킨아(קנאה)’인데, 이 말에는 ‘열심’이라는 뜻도 있다. 바울의 말은 ‘내가 하나님의 질투심을 가지고 너희를 위해 질투한다’는 말이다. 영어 성경으로도 “For I am jealous over you with godly jealousy”라고 표현한다. 그리스도와 언약관계를 맺은 우리들은 주님과 배타적 언약관계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주님과 우리 사이에 어떠한 것도 끼어들어서도 안되고, 그 관계를 방해하는 다른 대상에 마음이 나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주님은 죄 많고 허물 많은 우리를 당신의 소유, 당신의 신부 삼기로 작정하셨다.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해야만 했다. 우리를 얻기 위해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하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말한다.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그분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사랑은 그렇게 누군가가 먼저 한 사랑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죽음 같이 강한 사랑을 먼저 시작하셨음을 우리가 알 때, 비로소 우리도 죽음 같이 강한 사랑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먼저 하신 사랑도 그 내미신 손을 우리가 맞잡지 않으면 시작될 수 없다. 나는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주님이 먼저 시작하신 언약적 사랑 안으로 들어오길 축원한다. 그 분이 내미신 손을 맞잡기를 축원한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분이 하셨던 것처럼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조금 하다가 감정이 시들면 멈춰버리는 나약한 사랑이 아니라, 내게 십자가가 드리워지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강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그런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길 축원한다.
아8:7,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이와 같다. 그 사랑의 불길은 많은 물도 끄지 못하고 홍수라도 삼킬 수 없다. 그 사랑은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신, 사랑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의 언약 관계는 확장된다. 내 가족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분의 언약으로 부르시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언약적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교회로서 우리의 사명이 있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말한다. 벧전 4:8-10,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우리가 왜 내 가족도 아닌 사람에게 봉사하는가? 우리가 왜 허다한 죄가 보이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피를 흘리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모두가 혈연을 뛰어 넘는 언약적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우리에게 도전하신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 새 언약인 것이다.
마지막 때에는 자기 자신은 사랑하지만 서로를 사랑하지 않아 고통 당하는 때가 온다고 성경은 말한다. 사랑하기 힘든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자기 기준에 걸려, 자기 감정에 걸려 우리는 사랑하기를 너무 쉽게 포기 한다. 그러나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를 향한 부르심이자 도전이다. 우리는 우리 가족을 포함해서 주님이 언약으로 초대하시는 모든 사람들과 언약적 관계에 놓여 있다. 우리는 이 언약적 관계 안에 사랑이 식어져 가는 것을 슬퍼해야 한다. 그리고 이 사랑을 방해하는 것들에 대해 분노하고 질투해야 한다. 나의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과의 사랑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는 분노하고 질투의 감정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과감히 끊어내야 한다. 바라기는 교회 창립 15주년을 맞이 하면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위해 열정적인 사랑을 하는 성도로 일어나길 축원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지켜내기 위하여 그 사랑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질투하는 교회로 일어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