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5월 21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4 욕망의 안식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레 25:1-2)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있다. 요즘 초등학생 장래 희망 1위가 ‘건물주’라고 한다. 땅이 있고, 건물이 있는 사람은 요즘 같이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나님은 왜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면서 매 7년마다 그 땅을 안식하게 하라고 하셨을까? 오늘은 그 이유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레 25:3-5,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네가 거둔 후에 자라난 것을 거두지 말고 가꾸지 아니한 포도나무가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 430년 후에 그 약속을 지키셨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지만 그의 후손들에게 그 약속을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시내산에서 다시 한 번 땅에 관련한 계명을 주신다. 그것은 매 칠 년마다 땅의 안식년을 지키라는 것이다. 육 년 동안은 땅에 파종하여 그 소출을 거둘 것이지만 제 칠 년 째는 그 땅을 쉬게 하라는 것이다.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 칠 일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주셨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행위였다. 그것은 내가 일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의 삶을 책임지신다는 믿음으로 지키는 것이다. 매 칠 년마다 땅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공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행위였다. 이것 역시 내가 일 년 동안 땅을 쉬게 해도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책임지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지킬 수 있는 것이었다.
땅은 히브리어로 에레츠(אֶרֶץ)다. 출애굽기 19장 5절에서 하나님은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다”고 말씀하신다. 한글 번역으로 ‘세계’라고 했지만, 히브리어로는 ‘콜 하아레츠(כל הארץ), 즉 ‘모든 땅’이 하나님의 소유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에레츠’ (אֶרֶץ) 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알렙(א)과 라쯔(רץ)로 구성되어 있다. 알렙(א)은 엘로힘(אלוהים)의 첫 자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단어다. 라쯔는 ‘원하다, 갈망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라짜(רָצָה)’에서 온 말이다. 이처럼 땅은 하나님의 갈망이 있는 곳이다. 따라서 땅이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사용되어질 때 인간은 안식을 누리고 행복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 칠 년마다 땅의 안식년을 지킬 뿐 만 아니라, 매 오십 년째 해를 희년으로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레 25:10-11,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년에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들을 위하여 자유를 선포해야 했다. 여기서 ‘자유’는 히브리어로 ‘데로르(דרור)’다. ‘데로르’에는 ‘빨리 움직이게 하다’라는 어원적인 뜻이 있다. ‘데로르’가 선포되면 주인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노예를 빨리 자기 소유지와 가족으로 돌아가게 해야 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진 빚도 빨리 면제해 줘야 했다. 그 혜택을 받는 입장에서 희년은 정말 자유와 해방의 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혜택을 베푸는 입장은 어떨까? 그에게는 그 어느때 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요구되는 해가 될 것이다. 특히 희년에 파종하지 않는 것에는 더 큰 결단이 필요하다. 사십 구 년째 안식년에 이어 오십 년 째 희년에도 파종하지 않는다면 삼 년간 밭에 소출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가 농경사회임을 감안해 볼 때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계명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레 25:18-19, “너희는 내 규례를 행하며 내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땅에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라 땅은 그것의 열매를 내리니 너희가 배불리 먹고 거기 안전하게 거주하리라” 그리고 하나님은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21절)’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을 믿고 안식년과 희년을 지킬 때 하나님의 축복을 그 땅의 온 백성들이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기 원하셨던 하아레츠, 그 땅 백성들의 삶이었다.
사실 땅은 인간의 온갖 갈망이 투영되는 곳이다. 사람들은 땅을 더 얻기 위해 피 비린내 나는 전쟁을 일으킨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더 부자가 되기 위해 땅 투기를 한다. 한국 엄마들은 자녀의 성공을 위해 좋은 학군이 있는 땅으로 이사를 간다. 젊은 청년들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도시로 몰려든다. 땅은 그렇게 인간의 욕망이 응집된 곳이다. 그런 땅을 육 년마다, 오십 년마다 안식하게 하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멈추라”는 계명인 것이다. ‘안식하다’라는 히브리어 ‘샤밧’은 ‘멈추다’라는 뜻이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멈출 수 있을 때 그 사회는 소망이 있다. 그러나 가진 사람일수록 자신의 욕망을 멈추는 게 쉽지 않다. 그들은 법을 어기면서, 혹은 법을 이용해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한다. 따라서 한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욕망이 커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자유가 상실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면서 세상 나라와는 다른, 안식과 자유가 있는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기 원하셨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멈추고 그 대신 하나님의 갈망이 그 땅에 이뤄지도록 해야 했다. 그것이 그들의 부르심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일에 실패하고 만다.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가 노예로 70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던 땅에서 그들은 땅에 관한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았다. 땅이 70년의 안식년이 필요했다는 것은 그들이 적어도 490년 동안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던 땅에서 하나님의 갈망이 아닌 자신들의 욕망을 추구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레 20:22,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주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의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지 않았기에, 즉 하나님의 갈망을 추구하지 않았기에 그들에게 언약의 땅이었던 그곳이 그들을 토해 낸 것이다.
땅 위에 사는 동안 우리는 갈망을 가지고 산다. ‘아니 로쩨 (나는 원한다)’는 말은 인간이 가장 먼저 배우는 말 일 것이다. 아기는 엄마의 젖을 원한다고 운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해서 고통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은 항상 또 다른 것을 욕망한다. 그래서 인간이 욕망하는 것 멈추기를 배우지 않는다면 이 땅은 고통의 연속일 뿐이다. 에레츠, 이 땅은 인간의 욕망이 멈추고 하나님의 갈망이 부어져야 하는 곳이다. 그래야 샬롬이 있고 안식이 있게 된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욕망을 멈출 수 있을까? 산으로 들어가서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할까? 헛된 욕망, 다른 이웃을 착취하는 욕망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우리의 부르심과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이렇게 규정하신다. 레 25:55,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종’이다. 종은 주인의 원함을 이루어 드리는 존재다. 하나님의 갈망을 이뤄드리기 위해 사는 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종으로서의 부르심인 것이다. 이 땅 위에서의 삶이 내가 원하는 것 만을 이루기 위해 산다면 그것은 스스로 안식 없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야만 우리는 하나님의 갈망을 이 땅에서 이루며 살게 되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가 올 때 진정한 희년이 이루어질 것에 대해 예언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그 예언의 말씀을 이렇게 선포하셨다. 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은 단순히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하셨다. 그것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주의 은혜의 해, 즉 희년이 단순히 사회개혁을 통해 이뤄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으셨다. 영적으로 해석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 하나님의 종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이제 인간 사회에 희년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포로됨에서 자유를 얻는 희년은 매 오십 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예수님과 함께 언제나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희년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 예수님을 통해 희년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욕망에 종 노릇하는 노예로 살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갈망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권과 자유를 말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을 벗어난 인본주의적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다. 그러나 인본적인 자유의 실상은 자유가 아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유는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이 없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나의 욕망을 안식하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갈망을 이루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 시편 기자는 말한다. 시 25:12-1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갈망을 선택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땅의 상속을 약속하신다.
‘가진 것이 많아 많은 것을 소비할 수 있을 때 행복하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주는 환상이다. 지금 우리는 쉬운 해고를 바탕으로 한 무한 경쟁 사회, 신자유주의가 이끄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부는 더욱 소수의 가진 자에게 몰리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부로 많은 자유를 누리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한 경쟁에 내몰리며 더욱 자유를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이런 사회를 바로 잡기 위해 오십 년 마다 희년의 자유를 선포할 수 없는 일이다. 희년의 자유는 예수님이 오셔서 이미 선포하셨다. 이 희년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상관 없이 하나님의 갈망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종이라는 히브리 단어 ‘에베드’는 ‘아바드’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다. ‘아바드’는 ‘섬기다, 예배하다’란 뜻이다. 우리는 이웃을 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갈망을 선택할 수 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비밀을 알아가면서 기꺼이 하나님의 갈망을 선택하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다. 기꺼이 여호와의 종이 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희년의 자유가 시작되었다. 이 희년의 자유는 마찬가지로 기꺼이 주님의 종이 되어 예배하고, 섬기는 우리를 통하여서도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눈 먼 자가 다시 보고, 눌린 자가 자유케 되는 그 은혜의 역사가 하나님의 종된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 이루어지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