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5월 28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5 바로 걷는 비결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레 26:13)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길 위에 서 있다. 넘어지지 않고 잘 걸어가는 것, 그것은 길 위에 선 우리의 책임이다. 오늘 본문은 레위기서 마지막 토라포션이다. 오늘 본문의 키워드는 ‘걸어가다’이다. 히브리어로는 ‘할라크(הלך)’이다. 레위기서 26장 3절에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여기서 ‘준행하다’가 바로 ‘할라크’다. 따라서 이 구절은 “너희가 내 규례 안에서 걸어간다면”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이 12절에서 제시된다. 레 26:12,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너희 중에 행하여’라는 표현에서도 ‘할라크’ 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너희가 내 뜻 안에서 걸어가면 나도 너희와 함께 걷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레위기서 전체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인생에는 축복이 따른다.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바로 걸을 수 있는지 그 비결을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우리가 바로 걷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규례 안에서 걷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규례가 내가 걷는 목적이 되지 않는다면 나의 기준, 내가 정한 목표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우리는 보통 내 생각을 따라, 내 감정을 따라 행동을 결정한다. ‘교회 갈 기분이 아니야’ 그러면 안 간다. 우리는 나의 생각, 나의 경험, 나의 감정, 내 이성의 굴레에 갇혀 있기 때문에 나는 똑바로 걷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뒤돌아보면 하나님의 길에서 한참 빗겨나 있을 때가 많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규례가 뭘까? 지난 주 토라포션에 나온 하나님의 규례가 뭐였나? 그것은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너만 잘 먹고 잘 사는 길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길을 택하라는 것이다. 이 규례를 신약 성경의 표현으로 바꾼다면, 그것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는 것이다. 쩨다카를 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이웃에게 우리의 것을 나눠주기 힘든 이유가 뭘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게 힘든 이유가 뭘까? 그것은 이웃의 내일보다도 나의 내일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나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앞서다 보면 내 이웃을 위해, 주님의 의를 위해 시간을 낼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내일 일은 우리가 염려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명령에는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약속이 따른다. 레위기서에서도 하나님의 규례 안에 살아가는 자에게 다음과 같은 축복을 약속한다. 레 26:4-5, “내가 너희에게 철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 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의 땅에 안전하게 거주하리라” 하나님은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는 자에게 풍성한 수확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축복이 따르는 것이다.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한 나라나 개인이 흥하고, 망하고, 성장하고, 쇠퇴하는 것을 좌우하는 가장 결정적인 메카니즘이다. 그 강력했던 제국, 앗수르나 바벨론이 하루 아침에 멸망한 이유가 무엇인가? 군사력이나 경제력의 쇠퇴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실력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규례 안에서 걸어갈 때 그들에게 약속된 또 다른 축복이 있다. 레 26:6-7,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울 때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의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너희의 원수들을 쫓으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이것은 샬롬의 축복이다. 샬롬은 전쟁이나 위기가 없는 상태가 아니다. 샬롬은 내 주변에 원수가 없는 상태가 아니다. 여전히 전쟁과 위기가 있고, 여전히 원수가 있지만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동하시기 때문에 그 모든 도발이 제압되는 상태가 바로 샬롬이다. 팬데믹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 위험 리스크들이 훨씬 많아졌다. 예루살렘은 오늘도 위기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그러나 샬롬은 아무 위기가 없는 진공상태가 아니다. 그런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것이 샬롬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걷고 계심을 확신할 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규례 안에 걸어가는 여러분과 함께 걸어가시는 분이시다. 그분이 함께 하시면 위기는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걷지 못하는 이유가 또 있다. 그것은 우리 삶을 묶고 있는 멍에의 빗장이 부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 26:13,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 위에 멍에를 씌웠다. 바로는 그들을 노예로 삼아 자신의 제국을 섬기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그들을 바로 서서 걷게 하셨다. 멍에의 빗장이 부숴져야 우리는 바로 서서 걸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서서 걷게 하였다”는 표현에서도 ‘할라크(הלך)’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관심은 당신의 백성들이 바로 서서 걷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서서 걷지 못하고 절뚝거리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멍에의 빗장’이 부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상을 숭배하며 종의 멍에를 메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위기 26장 서두에서는 순종과 불순종의 척도가 되는 우상숭배에 대해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레 26:1,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우상을 숭배하면 하나님을 따라 걷는 삶이 무너진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이 사라지기에 똑바로 걷지 못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우상이 뭔가? 우상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내가 추구하는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따라 걷지 못하게 방해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다. 히브리어로 우상은 ‘엘릴림(אלילם)’이다.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헛된 것’이란 뜻이다. 세상 사람들은 우상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며 숭배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눈에 우상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헛된 것일 뿐이다. 우상은 결국 우리를 절뚝거리게 만들고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축복을 가로막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걷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 삶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기 때문이다. 레 26:11-12, “내가 내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내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운다는 말은 나의 미쉬칸, 즉 나의 거처를 너희 안에 세운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사신다는 말이다. 그것은 나의 삶의 주인이 더 이상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셔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내 안에 와서 사시면 하나님은 나를 위해 싸우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삶의 밖에 계시면 내가 일일히 대적들을 상대해야 한다. 그건 정말 힘든 일이다. 그건 내가 피를 많이 흘려도 끝나지 않는 일이다. 하나님이 내 속에 와서 사셔야 하루 하루의 모든 전쟁이 끝나는 것이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란 말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걷겠다’는 말이다. 그것은 ‘내가 너희와 동행하는 삶을 살겠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동행이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의 속도가 아니라 전능자의 보폭과 속도로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주제, 바르게 걷는 비결이 뭘까? 세상 사람들이 몰려가는 길을 걷는 게 바르게 걷는 비결이 아니다. 모든 것이 이해되어야 발걸음을 떼는 게 바르게 걷는 비결이 아니다. 바르게 걷는 비결은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걷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했다.사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축복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저주도 약속하시는 분이시다. 저주가 왜 언약의 일부가 되야 하는가? 그것은 저주가 우리를 바로 걷게 하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저주는 단순히 우리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저주는 다른 우상들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제지시키기 위해 선포된 것이다. 낭떠러지로 달려가는 아이에게 부모가 “너 거기로 가면 죽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자식이 죽기를 바래서일까? 죽지 않게 하려고 경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도 그 저주의 결과를 당하지 않게 하려는 경고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걸어가게 하시길 원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이 열방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길 원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그 경고를 무시하고 그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들은 선포된 저주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저주의 고통 속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그 분이 정하신 길로 다시 돌이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레 26:40-42, 그들이 나를 거스른 잘못으로 자기의 죄악과 그들의 조상의 죄악을 자복하고 또 그들이 내게 대항하므로 나도 그들에게 대항하여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땅으로 끌어 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그들의 마음이 낮아져서 그들의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의 삶에 궁극적으로 이루시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언약이다. 그 언약을 다 이루시기까지 하나님의 사랑은 쉬지 않는다.우리의 소망은 이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께 있다.하나님은 당신의 언약 백성들을 꽃 길만 걷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저주의 징계도 허락하시는 과감한 분이시다. 많은 사람들이 내 인생에 축복이 있을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언약백성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와 징계의 시간 속에서도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온전히 세우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절절한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 짧은 인생 동안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걷길 원하신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규례 안에서 주님과 함께 걷는 우리의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