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36 광야의 깃발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6월 4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6 광야의 깃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여 각기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르며 자기들의 기를 따라 진 치기도 하며 행진하기도 하였더라” (2:34)

오늘부터 우리는 민수기서를 시작한다. 바미드바르(במדבר), ‘광야에서’라는 제목을 가진 이번 주 토라포션은 항상 오순절 바로 전에 읽게 된다. 따라서 광야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맞이하는 절기가 바로 오순절인 것이다. 오순절에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를 받았다. 오순절에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령을 받았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은 인생의 광야를 지나가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 광야를 통과하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다. 오늘은 광야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졌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라도 빨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마주친 것은 광야라는 황량한 현실이었다. 광야는 원해서 가는 곳이 아니다. 거기서 편히 살 수 있는 곳도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곳이 광야다. 성막이 완성된 뒤 이 광야에서 2년 차를 맞이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인구조사를 명령하신다. 1:1-3,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둘째 둘째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이스라엘 이십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진영별로 계수하되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의 수를 셀 때 ‘하나, 둘, 셋…. ”으로 세지 않는다고 한다. ‘로 아인, 로 슈타인…’ 즉 ‘하나가 아니고, 둘이 아니고…”라고 카운트한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다가 7만 명이 죽은 사건을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광야에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를 세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그들을 하나님 나라 군대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다. 각자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살기에도 벅찬 삶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지파별로 계수된다. 그리고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배치된다. 동쪽에 유다, 잇사갈, 스블론 지파, 남쪽에 르우벤, 시므온, 갓지파, 서쪽에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지파, 북쪽에 단, 아셀, 납달리 지파가 포진한다. 그리고 동서남북 각 진영에는 그들의 지파를 상징하는 깃발이 세워진다.

2:17, “ 다음에 회막이 레위인의 진영과 함께 모든 진영의 중앙에 있어 행진하되 그들의 순서대로 사람은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들의 기를 따라 앞으로 행진할지니라 유대인 랍비들에 의하면 동쪽에는 유다를 상징하는 사자 문양의 깃발이, 남쪽에는 장자 르우벤을 상징하는 사람 머리 문양의 깃발이, 서쪽에는 에브라임을 상징하는 소 문양의 깃발이, 북쪽에는 독수리 문양의 깃발이 세워졌다고 한다. 왜 깃발이 필요했을까? 왜 하나님은 광야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보기 원하셨을까? 깃발은 스스로 펄럭일 수 없다. 바람이 불 때 바람과 함께 작동하는 것이 깃발이다. 다윗은 시편에서 깃발을 이렇게 표현한다. 20:5,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세운 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운 깃발이다. 혼자만을 위해 세운 것이 아니라 민족 전체를 위해 세운 ‘우리의 깃발’이다. 그 깃발에는 하나님의 군대라는 집단 정체성이 있었던 것이다. 애굽에 노예로 있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흔들 수 있는 깃발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깃발을 흔들며 함께 가나안을 향해 행진하는 민족이 된 것이다. 그들은 더이상 존재감이 없는 노예가 아니었다. 생존을 위해 각자 힘든 싸움을 하는 개인들도 아니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군대로 행진하고 있는 것이다. 노예에서 하나님의 군대가 된 것, 그것은 엄청난 변혁이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깃발이 바람에 휘날릴 때 이제 하나님나라 백성, 하나님 나라 군대라는 그들의 존재감도 펄럭이게 된 것이다.

이 동서남북 펄럭이는 깃발 한 가운데 성막이 있었다. 성막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었다. 이스라엘 진영 한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진군하는 것이다. 따라서 광야를 통과하는 최대의 비결은 하나님을 삶의 중심으로 모시는 것이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최고의 준비는 하나님 한 분을 주목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구름이 성막 위로 떠오르면 진을 거두고 행진했다. 그리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다시 진을 치고 머물렀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그들이 어느 땅에 머물렀는가가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 머물렀는가이다. 모세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동행을 이렇게 표현한다. 1:31-33,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길을 가시며 장막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광야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안고 가시는 곳이다. 이 광야에서 중요한 것은 땅이 비옥하냐 아니냐가 아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충분한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동행하시는가의 여부이다. 우리는 이전보다 이동이 많은 삶을 살고 있다. 고국을 떠나 온 우리들은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이 광야와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하나님의 이름의 깃발이 있다면, 그리고 그 깃발을 내가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에 꽂는다면, 그곳은 더이상 나그네 길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는 홈이 되는 것이다.

광야를 통과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성공의 대열에서 멀어지거나 감당할 수 없는 사고와 질병을 마주 할  때, 혹은 자녀들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우리는 내 인생이 광야와 같다고 느낀다. 무력감이 깊어지면서 염려와 불안이 커진다. 나를 고통스런 광야의 현실로 인도한 모든 사람과 환경에 대한 원망도 커진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이 광야라는 시간을 허락하신 이유를 헤아려봐야 한다. 광야라는 히브리어는 ‘미드바르(מדבר)’이다. ‘말하다’라는 ‘메다벨(מדבר)’도 같은 히브리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광야는 다름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광야라는 환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생의 광야에서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고통과 혼돈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내 안의 탄식과 걱정이 너무나 커서 하나님의 존재는 그저 침묵하시는 분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인생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 많은 시간을 유대 광야에서 보내야 했다. 광야는 그의 피난처였고, 그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던 곳이다. 그의 인생에 광야가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다윗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의 시간을 보내셨다. 마가복음 1장 12절은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에게 광야의 시간이 허락된 것은 성령의 의지였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게 된다. 그 때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 시험을 대응하신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신다. 광야의 시간을 통해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을 할 수 있는 자로 준비되신 것이다. 광야는 이처럼 수많은 성경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준비된 곳이라 할 수 있다.

광야가 비록 힘든 곳이지만, 우리는 때로 우리 인생에 광야를 허락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모세는 광야의 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32:10-12,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다른 신이 없었도다 독수리가 새끼를 강하게 훈련시키는 것은 그에게 창공을 날 수 있는 날개 힘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새끼 독수리에게 광야의 시간은 창공을 날 수 있기 위해 준비되는 시간이다. 그것을 마치면 새끼 독수리는 하늘을 날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광야를 허락하시는 것은 영적 전쟁을 이기고 승리의 깃발을 꽂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군사들이 훈련되지 않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뜻대로 훈련을 통과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광야를 통과하며 펄럭였던 깃발은 이제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에 꽂혀 펄럭이게 되는 것이다.

40년의 광야를 통과하고, 그 광야 끝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상해보자. 그들은 처음 광야에 들어설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더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군대가 되어 광야 끝에 서 있게 된다. 그들은 더 이상 혼자만의 생존을 위해서 사는 자들이 아니었다. 서로에게 헌신된 공동체가 되었고,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한 깃발 아래 함께 행진하는 민족이 되었다. 그들이 혼자였다면 결코 광야를 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 깃발 아래 뭉쳤고, 성막을 중심으로 함께 행진했기에 그들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광야는 내 계급장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광야는 내가 벌거벗고 서는 곳이다. 오직 하나님과 나만 남는 곳이다. 그래서 광야야말로 진정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전적으로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할 수 있는 곳이 된다. 내가 의지했던 우상들이 정리되고 하나님 한 분만 나의 남편으로 세워지는 곳이 광야다. 내가 의지했던 것을 다 내려놓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곳이 광야인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광야를 잘 통과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광야를 잘 통과하도록 오순절에 말씀과 성령을 주셨다. 깃발은 바람과 함께 펄럭이는 것이다. 우리가 세운 믿음의 깃발에 말씀의 바람, 성령의 바람이 불어올 때, 우리는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군대로 진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말씀의 바람, 성령의 바람을 타게 된 제자들은 그들의 인생에서 ‘광야’와 ‘가나안’이라는 경계선이 사라졌다. 그들에겐 더 이상 ‘광야’도 없었고, ‘가나안’도 없었다. 그들은 말씀과 성령의 권능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의 깃발을 흔들며 전진하는 자이다. 사랑하는 사람와 함께 있다면 광야에 있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있든, 그 환경은 더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순절을 맞이하며 ‘우리는 하나님 나라 군대’라는 정체성의 깃발을 세우기 바란다. 바라기는 그 깃발 위에 말씀의 바람, 성령의 바람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길 기도한다. 그리하여 광야에서도 깃발 들고 전진하는 하나님의 군사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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