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6월 11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7 진정한 리더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게르손 자손도 그 조상의 가문과 종족에 따라 계수하되 삼십 세 이상으로 오십 세까지 회막에서 복무하고 봉사할 모든 자를 계수하라” (민 4:21-23)
좋은 리더를 만나는 것은 축복이다. 좋은 리더를 경험해본 사람은 그 자신도 좋은 리더가 될 가능성이 크다. 자신이 경험해 본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서는 좋은 리더가 되는 요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먼저 진정한 리더는 ‘머리를 들어 올리는 사람’이다. 머리를 들어 올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고유한 한 사람으로 카운트하는 것을 말한다. 이번 주 파라샤의 제목이 ‘나쏘’인데, 한글 성경에는 ‘계수하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원어 성경에는 ‘나쏘 엣 로쉬(נשא את ראש)’로 표현되어 있다. ‘머리를 들어 올리다’란 뜻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를 계수할 때 “머리를 들어 올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고대사회에서 인구조사는 통치자의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인구 수에 따라 소집할 수 있는 군대의 규모가 결정되었다. 인구 수에 따라 거둬들일 수 있는 세금의 수입이 결정되었다. 따라서 인구를 조사할 때 대중들은 노동력이나 군사력을 구성하는 수의 일부로 평가되는 것이다. 바벨탑을 건설할 때 건축자는 탑에서 벽돌이 떨어지면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꾼이 넘어져 죽을 때는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그저 그들의 제국을 위해 소모되는 숫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구조사를 명령하실 때 그들의 수를 세라고 하시지 않고, 그들의 머리를 들어올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숫자에 불과한 대중이 아니었다. 큰 자이든 작은 자이든, 많이 가진 자이든 적게 가진 자이든, 모두가 동등하고 소중한 개인이었다. 유대인 랍비 라쉬는 “그들이 하나님께 귀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세셨다”고 말했다.
다윗은 그의 시편에서 “여호와여 주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시 3:3)”라고 고백했다. 우리가 종종 머리를 떨구게 되는 때가 있다. 상황이 안 좋을 때다. 원수가 나를 방해할 때다. 내일 일이 염려가 될 때다. 그럴 때 우리는 머리를 떨군다. 예수님은 염려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예수님은 우리의 존재를 하늘 아버지와 연결하신다. ‘하늘 아버지가 공중의 새도 기르시는데,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않냐’고 반문하신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떨구는 이유는 하늘 아버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늘 아버지가 보호하시고 공급하실 것에 대한 믿음이 없기에, 자신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 머리를 떨구는 것이다. 바울은 하늘 아버지를 이렇게 소개한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는 이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안 좋은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머리를 들게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기 때문에 우리의 머리를 들어 올리시는 분이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리더십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소중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다. 세상은 그들을 세상의 평가기준으로 판단한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평가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잘 상대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리더는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존중하는 사람이다. 그들의 머리를 들어 올리는 사람이다. 세상에서는 작은 존재로 평가될 수 있는 사람도 소중한 존재로 느낄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여러분이 가게에서 만나는 점원도 숫자에 불과한 사람이 아니다. 잠시 만나더라도 그들의 머리를 들 수 있게 하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인 것이다.
두 번 째, 진정한 리더는 다른 사람의 다름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나쏘(נשׁא)라는 동사는 ‘들어 올리다’란 뜻도 있지만, ‘받아 들이다, 감당하다’라는 뜻도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감당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감당한다’는 것은 내가 지지 않아도 되는 짐을 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감당한다’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들도 받아 들이며, 그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감당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 내가 지지 않아도 되지만 다른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내가 그들의 짐을 감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는다. 대통령이 히브리어로 나씨(נשׁיא)다. 나쏘에서 온 말이다. 다른 사람들의 짐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나씨’, 곧 리더인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날 때 흔한 우리의 반응은 “쟤 뭐임?”이다. 그러면서 그런 사람은 내 인생에서 아웃시킨다. 그러나 ‘나씨’는 나와 다른 사람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진정한 리더가 되기 원한다면 나와 다른 사람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다름을 감당해야 한다. 히브리어로 결혼한 상태를 ‘네쑤인(נשׁיאין)’이라 한다. 이 역시 ‘감당하다’는 뜻의 ‘나쏘’에서 나온 말이다. 배우자의 다름을 감당하는 게 바로 결혼한 상태인 것이다. 감당할 만해서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감당하기로 언약을 했기 때문에 감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결혼은 서로에게 진정한 리더가 되겠다는 서약이다. 서로의 연약함과 다름을 감당하겠다는 서약인 것이다. 여러분이 평소에 만나는 사람들의 연약함과 다름을 감당하는 사람이 될 때 여러분은 진정한 리더가 되는 것이며, 동시에 최고의 결혼 준비를 하는 것이다.
세 번 째, 진정한 리더는 ‘구별된 사람’이다. 이번 주 파라샤에 나실인에 대해 나온다. 나실인은 히브리어로 ‘나지르(נזיר)’인데 ‘구별된 사람’이란 뜻이다. 민수기서에서 나실인은 어떻게 세상과 자신을 구별하는가? 먼저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한다. 또한 머리털을 자르지 않는다. 또한 시체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 부모나 형제가 죽었을 때도 그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 그들은 이러한 구별을 통해 그들이 서원한 기간 동안 온전히 하나님께만 집중했다. 신약 성경에서 대표적인 나실인은 세례 요한이다. 성경은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고 말한다. 누가는 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눅 1: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구별된 사람은 세상과 분리되어 하나님께 집중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한 사람이다. 그들은 이 세대가 잃어버린 것을 대신 애통하는 사람들이다. 잃어버린 세대는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그래서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지 않은 채 그냥 산다.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 사람과의 깨어진 관계를 그냥 깨어진 채 놔두고 산다. 잃어버린 세대가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이 시대에도 나실인이 필요하다. 이 세대는 아버지를 잃어버린 세대이다. 부모의 마음과 연결되지도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도 연결되지도 않은 채, 그저 세상이 주는 만족만을 추구하는 세대이다. 이 세대에 아버지를 찾아 줘야 한다. 따라서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께 집중함으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사역하는 자가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진정한 리더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리더는 ‘축복하는 사람’이다. 이번 주 파라샤에 제사장의 축복 기도가 나온다. 그 중 이런 내용이 있다. 민 6: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기서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호의를 말한다. ‘은혜을 베풀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난(חנן)’인데, ‘아랫사람에게 호의로 몸을 굽히다’라는 뜻이다. 부모는 아이를 돌보기 위해 몸을 굽혀 눈높이를 맞춘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필요한 섬김을 한다. 이번 주에 현지, 승구, 밍주가 베이비시터를 했다. 승구는 점심 때만 해도 아이들이 너무 귀엽다고 했다. 사진을 보내왔는데, 온통 쌍둥이 아이들을 안아주는 사진이었다. 나는 속으로 ‘저러다가 힘들텐데’라고 생각했다. 아니나다를까 저녁 6시 15분에 문자가 왔다. 문자의 내용은 ‘장가 안가’였다. 한마디로 애보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다음 날은 훨씬 애 보는 게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어찌되었건 베이비시터는 부모의 마음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아르바이트인 듯하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돌보시기 위해 몸을 굽혀 그의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신다. 우리는 값없이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은혜 받은 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베풀 수 있다. 나보다 아래 사람에게도 몸을 굽혀 눈을 맞추며 그들을 섬길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비록 부족하게 보일지라도 그에게서 최선의 것을 보고, 그 최선을 끌어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것이 은혜다.
죄로 인해 고통받는 세상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필요하다. 죄로 인해 흔들리는 것들이 너무 많다. 죄로 인해 가정이 흔들리고, 죄로 인해 관계가 흔들린다. 죄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주시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축복을 선포할 제사장을 세우셨다. 우리는 구약의 제사장처럼 이 세대를 위해 축복을 선포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우리 자녀, 직장 동료와 이웃들, 그리고 열방을 축복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제사장인 것이다. 우리가 축복할 때 돌파가 일어난다. 매인 것들이 풀어지는 역사가 일어난다. 산술적으로, 상식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하늘의 축복이 열려야 인생이 열리는 것이다. 우리가 손을 들어 축복할 때,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우리가 손을 들어 축복할 때, 우리가 축복하는 그 대상을 향해 하나님이 얼굴을 드시는 역사가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로 인한 저주를 끊고 하나님의 축복을 이 땅에 풀어놓을 사람을 찾고 계신다. 그렇게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진정한 리더인 것이다.
구약 시대 진정한 리더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세워진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이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왕은 다른 사람의 짐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기 위해 세상과 구별된 사람이다. 제사장은 죄의 저주를 끊기 위해 축복을 선포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이 예수님을 통해 모두 이루어진 것을 본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하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다. 예수님은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아버지의 소원에 집중하셨다. 그리하여 십자가에서 기꺼이 우리의 죄를 감당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서는 성공한 자, 가진 자를 리더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리더는 하늘 아버지를 소유한 자이다. 그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그 아버지의 원함을 이루어 드리는 자이다. 여러분이 아버지를 회복한 자가 되길 축원한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 드리는 진정한 리더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