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39 정탐의 정석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6월 25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9 정탐의 정석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13:1-2)

‘삶은 여행이다’란 말이 있다. 태어나면서 우리는 삶이라는 여정을 시작한다. 하나의 여정을 마치면 또 다른 여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하나 하나의 여정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여정지에 대한 정탐이 필요하다. 정탐은 ‘드러나지 않는 사정을 몰래 살펴 알아내다’란 뜻이다. 지금 현지, 승구, 유창이가 독일 이탈리아 전도여행을 준비하고 있는데, 현지가 자주 하는 말이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표현이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관련된 영화와 책을 보고, 인터넷 서치를 통해 현지에 계신 선교사님과도 연결하면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정탐을 잘 할 수 있을까?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꾼을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정탐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을 더 광야에서 보내야 했다. 한 번의 정탐이 250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운명을 결정한 것이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오늘은 이들의 실패를 통해 이들이 놓친 정탐의 정석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출발한지 둘째 해 둘째 달이 지나 바란 광야 북쪽,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게 된다. 그곳은 브엘세바에서 약 80km 떨어진 곳이었다. 이제 삼 일 정도 열심히 걸으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정탐꾼을 먼저 보내자고 모세에게 요청한다. 이에 모세가 이렇게 말한다. 1:22, “너희가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 하기에여기서 ‘정탐하다’는 히브리어로 ‘하파르(חפר)’다. ‘탐지하여 찾아내다’는 뜻이다. 앞으로 있게 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들은 그 땅의 지형을 파악하길 원했던 것이다. 이에 모세는 열 두 명의 정탐꾼을 파견하게 된다.

정탐꾼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여호수아일 것이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의 원래 이름이 아니다. 원래 이름은 ‘호세아’다. 13:16, “이는 모세가 땅을 정탐하러 보낸 자들의 이름이라 모세가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라 불렀더라왜 모세는 유독 한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 불렀을까? 호세아(הושע)는 ‘구원자’란 뜻이다. 그런데 여호수아(יהושע)는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호세아라는 이름 앞에 요드(י)가 하나 더 붙은 것이다. 탈무드에 의하면 모세는 대부분의 정탐꾼들이 불안정하고 충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그는 호세아가 그들에게 휘둘릴까봐 우려했고, 그래서 그의 이름에 점 하나를 더하게 된다. 요드(י)는 야훼의 첫 글자이기에 하나님을 상징하는 문자다. 모세는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이 먼저 와야 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그의 이름 앞에 요드를 더했다는 것이다. 이름이 바뀌면서 여호수아의 정체성도 바뀌게 된다. 그는 이제 자신이 구원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자가 되실 것이라는 새로운 전망을 갖게 된다. 또한 그는 정탐의 상황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보다 앞서 행하실 것을 기대하게 된다. 나의 삶에 하나님이 더해진 인생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첫 번째 정탐의 정석은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을 더하라는 것이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을 앞세울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전망으로 정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탐의 정석, 두 번째는 ‘두려움을 빼라’는 것이다. 열 명의 정탐군들은 정탐하는 동안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고 말한다. 이들은 왜 이런 두려움과 열등감에 빠졌을까? 랍비 조나단 삭스는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신명기에서 ‘정탐하다’라는 말은 ‘하파르(חפר)’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사용됐다. 그런데 민수기에서 하나님은 ‘투르(תור)’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신다. ‘투르’는 ‘탐험하다. 보다’란 뜻이다. ‘여행객’이란  뜻의 히브리어 ‘타얄(תיר)’이 ‘투르’에서 온 말이다. 여행객들은 아름답고 장엄하고 영감을 주는 곳을 간다. 하나님은 열 두 명의 정탐군을 보내면서 그 땅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 땅에 매료되라고 그들을 보낸 것이다. 탈무드는 남자가 여자를 먼저 만나보지 않고 결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가르친다. 만나본 뒤 사랑이 싹트고 결혼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의 땅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 땅을 본 적이 없었다. 정탐꾼을 먼저 보낸 것은 그 땅을 가보고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랑에 빠지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사랑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게 된다. 정탐꾼의 사명은 그 땅을 보고 그 땅에 매료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땅을 얻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싸워야 한다고 백성들에게 보고해야 하는 것이었다. 단기 선교나 전도여행도 마찬가지다. 단기 선교 가서 사역만 열심히 하다가 지쳐서 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에게 그 나라에 다시 가라면 별로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단기 선교 가서 열심히 사역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땅의 좋은 것도 보며 그 곳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 땅에서 나는 맛있는 음식들도 많이 먹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 땅과 사랑에 빠져야 한다. 그래야 그 땅에 다시 가고 싶고, 그 땅을 위해 두려움 없이 나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정탐꾼들이 헤브론에 이르렀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그 헤브론에는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라고 나온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이 거인을 보고 두려움에 빠진다. 그들은 불과 1년 전 애굽 군대를 홍해 바다에 쳐 넣으신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가나안 족속들이 그들 때문에 떨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다. 여리고에 살던 기생 라합이 이렇게 보고했다. 2:9-10, “여호와께서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주민들이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시혼과 옥에게 행한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헤브론에 있던 거인들도 분명 떨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열 명의 정탐꾼들은 오히려 그들의 겉모습만 보고 두려워 떨었던 것이다.

두려움의 보고는 삽시간에 전염되었다. 온 회중이 밤새 통곡하며 울부짖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고 그들을 인도해내신 하나님까지 원망했다. 14: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두려움은 그동안의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게 만든다. 그들의 결론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불안에 사로잡힐 때 사람들이 쉽게 하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익숙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거짓안전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종이었고, 고된 노역으로 시달리며 못살겠다고 부르짖었던 것을 망각한 것이다.

그러나 갈렙은 달랐다. 그는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말한다. 같이 정탐하고 왔는데 무슨 차이일까? 물론 갈렙도 헤브론에서 거인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랍비들이 갈렙은 헤브론과 연결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헤브론은 어떤 곳인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헤브론은 또한 요셉이 형들을 찾으러 떠났던 곳이다. 그러다가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헤브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된 시작점이었다. 갈렙은 조상들이 묻혀 있는 그 곳으로, 또한 모든 일이 시작된 그 곳으로 돌아가기 원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의미를 발견할 때 두려움을 넘어선다. 의미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두려움과 싸우는 것이다. 따라서 정탐의 정석, 두 번째는 두려움을 빼야 한다는 것이다. 두려움을 빼기 위해선 사랑에 빠져야 한다. 두려움을 빼기 위해선 의미를 찾아야 한다. 갈렙은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땅에 매료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헤브론에서 그 땅을 반드시 취해야 하는 의미를 발견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외쳤다. 그의 인생은 한 마디로 두려움이 빠진 인생이었다.

정탐의 정석, 세 번째는 믿음을 나누라는 것이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성들 앞에서 갈렙은 자신의 믿음을 나눈다. 14:7-9,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수학에서 통계는 현상을 파악하고 미래를 예측하는데 사용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통계가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통계가 오히려 믿음의 역사를 방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현상을 믿음으로 해석하고, 그 믿음을 나누며 그 믿음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통해 진행되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세상을 위험으로 가득찬 곳으로 본다. 자기 힘만으로 그러한 위험들을 통제하고 정복하려 하니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똑같이 세상을 정탐해도, 그곳이 위험으로 가득하다고 보지 않는다. 갈렙의 자신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영어로 자신감은 ‘confidence’다. 이것은 라틴어에서 온 말인데, ‘함께(con) 믿음(fide)을 갖다’란 뜻이다. 갈렙은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외쳤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께 있었다. 하나님과 함께 믿음을 공유했기에 갈렙은 자신감이 있었다. 우리도 하나님과 믿음을 함께 갖기 까지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감을 갖게 된다. 그래야 우리는 자신감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내가 이끄는 사람들도 같은 믿음으로 일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탐의 정석, 마지막은 곱하기다. 오늘 토라포션은 이 말씀으로 끝난다. 15:37-3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귀의 술에 더하라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유대인들의 옷을 자세히 보면 셔츠 끝에 실 가닥이 달려있다. ‘찌찌트(ציצת)’라고 불리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민수기의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옷에 찌찌트를 달고 다니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청색은 히브리어로 ‘트켈렛’이다. 왜 청색일까? 광야에서 언약궤를 이동할 때 최종적으로 그 위에 덮는 것이 순청색 보자기였다. 따라서 순청색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이동했던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그들이 입은 옷의 순청색 찌찌트를 바라보며 그들과 함께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했던 것이다.

자 그런데 여기서 ‘투르’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한다. 찌찌트를 다는 목적을 설명하면서 모세는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베 로 타투르 아하레이 레바브켐 (ולא תתרו אחרי לבבכם).’ 이 말을 직역하면 ‘너희의 마음을 따라 정탐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이다. 오늘 토라포션의 정탐이야기는 찌찌트를 보며 너희 마음대로, 너희의 눈으로 보는 대로 정탐하지 말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경을 바라보다가 하나님을 놓쳤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들의 불안한 마음을 따라 상황을 해석하고, 눈으로 본 현상에 마음을 빼앗겨 스스로 좌절하고 만 것이다. 그 결과 광야 1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정탐의 마지막 공식은 기억을 곱하라는 것이다. 광야의 세대가 어디서 실패했는지, 그 기억을 증대시키라는 것이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과 마음에 품는 것을 통해 상황을 인식하고 감지한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런데 우리가 눈으로 본 것과 마음으로 느끼는 것 만을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 쉽다.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가 중요하다. 겉으로 드러난 표면의 현상만 보는 것은 우리를 전진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것으로 현상을 해석한다면 우리는 불안한 환경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발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나안 정탐 이야기는 너무도 슬픈 사건이다. 믿음이 없어 한 세대가 멸망해버린 이야기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믿음의 세대가 누릴 수 있다. 믿음이 사라지는 이 시대에 다른 전부를 놓치더라도 우리는 이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믿음으로 가나안을 정탐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이 있었기에 그 믿음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전수된 것이다. 이 믿음의 정탐은 우리 다음 세대에도 이어져야 한다.

세상에는 우리가 아직 내딛지 않은 인생의 여정들이 많이 있다. 누군가는 대학과 군대를 가야하고, 누군가는 직장을 찾아야 하고, 누군가는 결혼을 꿈 꾸고, 누군가는 출산을 소망하며, 누군가는 육아의 과정을 힘들게 지나고 있다. 또한 세상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 많다. 아직도 닫혀 있는 북한과 복음이 들어가기 힘든 나라들이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믿음으로 정탐할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은 다음 세대에 하늘의 안식을 나누어 줄 믿음의 사람을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우리는 두려운 상황들을 계속 만나게 될 것이다. 사회의 불안은 어제보다 오늘 더 커져갈 것이다. 우리가 과거로 돌아간다고 안전한 것이다. 더 높은 성을 쌓는다고 안전한 것이 아니다. 믿음의 사람은 과거지향적이 될 수 없다. 믿음의 사람은 높은 성 안에 숨어 안전을 추구하지 않는다. 갈렙처럼 믿음으로 정탐할 수 있는 사람만이 거인들이 있는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다음 여정을 믿음으로 정탐할 수 있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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