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7월 9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1 죽음을 넘어서라
“사람이 부정하고도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회중 가운데에서 끊어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하게 하는 물로 뿌림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 (민 19:20)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삶의 일부가 뜯겨져 나가는 고통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가져다 준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그의 죽음이 가져다 준 변화와 함께 삶의 의미를 재구성 해야 한다.
광야 40년이 지나는 동안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는 광야 1세대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다. 고라의 반역으로 지도자 250여명이 일시에 죽었다. 염병으로 인해 하루 만에 만 사천 칠백 명이 죽었다. 가까운 삶의 현장에서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그야말로 충격과 고통일 것이다. 광야 1세대들은 믿음이 없었던 결과 사망이라는 혹독한 죄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광야 40년 동안 60만 명이 죽었다. 여자들의 숫자를 감안하면 하루에 평균 80명이 죽어간 꼴이다. 이처럼 죽음은 가나안 입성을 앞 둔 새로운 세대들이 직면하고 넘어서야 할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죽음으로 인한 오염을 씻어내야 했다. 그리고 죽음으로 인한 절망도 씻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음에 대한 대안으로 특별한 율례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붉은 암송아지로 재를 만들어 물에 섞은 뒤 그 잿물로 몸을 씻으라는 것이다. 붉은 암송아지는 히브리어로 ‘파라 아두마’다. 탈무드에 의하면 지혜로운 왕 솔로몬도 이 파라 아두마의 율례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유일한 계명이라고 한다. 오늘 우리는 솔로몬에게도 어려웠던 이 붉은 암송아지 재의 율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 역시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지혜를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민 19:2-3,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 너는 그것을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줄 것이요 그는 그것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서 자기 목전에서 잡게 할 것이며” 일반적으로 속죄제는 소나 양을 잡는 피의 제사다. 그러나 광야에서 이런 제사만 있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은 사람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멈춰서서 피의 제사를 드려야 했다면 가나안을 향한 행군은 진행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하나님은 붉은 암송아지 한 마리를 태워 그 재를 진영 밖 정한 곳에 두게 하셨다. 그리고 사람이 부정해졌을 때 그 재를 가져다가 물에 타서 우슬초로 찍어 뿌리고 다시 진영 안으로 들어오게 하셨다. 이 율례는 성막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정결케 하는 율례였다. 이 율례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부정을 정결하게 하지 않은 사람은 결국 죽음으로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어지게 되는 엄중한 율례였다. 민 19:20, “사람이 부정하고도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회중 가운데에서 끊어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하게 하는 물로 뿌림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
거룩한 백성 중에 부정한 사람들이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도 부정해져서 함께 멸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정한 자들을 진영 밖으로 격리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가나안을 향하여 행군할 수 있게 된다. 부정한 사람들은 진영 밖에 있지만,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을 따라 움직일 때 함께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부정함을 암송아지 잿물로 씻어낸다면 다시 진영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구약 성경은 죽음과 접촉하는 것을 부정하다고 말한다. 죽음은 죄의 결과 맞이 하게 되는 모든 사람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부정은 히브리어로 타메(טָמֶא)다. 사람이 부정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이 계신 성소에 들어갈 수 없다. 그 사람은 부정함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과 상관 없는 삶을 살게 된다. 타메의 반대 개념이 타호르(טָהוֹר)이다. 정결이란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결한 상태가 되어야 하나님이 계신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이 정결해야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그들의 삶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결함을 위해 ‘파라 아두마’, 즉 붉은 암송아지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법을 만드셨다.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를 매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불살라 재로 만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재를 흐르는 물에 섞어 바르면 정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단순히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을 따라 믿음으로 바르면 정결케 되는 규례였다. 따라서 이 파라 아두마의 규례는 철저히 믿음으로 행하는 규례였다. 부정한 자도 믿음으로 바르면 정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재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무 송아지나 태워서는 안 되고 반드시 붉은 암송아지를 태워야 했다. 그런데 붉은 암송아지는 흔한 것이 아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지금까지 역사상 아홉 마리의 붉은 암송아지가 유대 민족을 위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붉은 암송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유대인들은 열번 째 붉은 암송아지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제3 성전이 재건되기 전에 나타나 메시아에 의해 불태워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붉은 암송아지는 성전 업무를 시작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붉은 암송아지의 재로 정결하게 되어야만 제사장이 성전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붉은 암송아지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제 3 성전 건축을 시작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상징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붉은 암송아지는 과거 광야에서 있었던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현재의 이야기이며, 미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것이 제3 성전 건립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우리는 이 붉은 암송아지 규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도 붉은 암송아지가 나타나길 기다려야 할까? 민수기에 묘사된 붉은 암송아지에는 자격 조건이 있다. 흠이 없어야 하고, 멍에를 메 본 적이 없어야 한다. 붉은 색이어야 하며, 진영 밖에서 잡아야 하며, 다 태워져야 한다. 이런 면에서 붉은 암송아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흠 없는 대속 제물이 되기 위해 이 땅에 나타나셨다. 예수님은 죄의 멍에를 메 본 적이 없는 분이셨다. 그 분은 영문 밖으로 끌려가 붉은 피를 흘리며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사하기시 위해 자신의 전부를 다 내어 주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히 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 말씀에 의하면 붉은 암송아지 규례는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였을 뿐이다. 이제 신약시대에 부정한 자가 정결케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정결한 자로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결을 의미하는 ‘타호르(טהור)’는 육체가 겉으로 깨끗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정결은 하나님 앞에 내가 설 수 있는 자인가 아닌가의 문제이다. 하나님 앞에 스스로 정결하여 그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의로 하나님의 기준과 그 분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아무도 스스로 자격을 갖춘 사람은 없다. 죄와 사망에 접촉하여 모두가 부정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드시 우리 안에 있는 부정함이 처리되어야만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어떠한 자격으로 나아가는가?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죄와 사망의 권세로 부정해진 자들이다. 부정을 씻고 다시 정결해지는 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영원히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정결해 져야 한다. 무엇으로 정결해 지는가? 정결은 내 안에서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약 시대, 암송아지의 잿물을 믿음으로 뿌렸던 것처럼, 신약 시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우리 마음에 뿌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설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히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그 분의 보혈을 마음에 뿌림으로 정결함을 얻는다. 우리는 악한 세상에서 죄로 인해 부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의 악함이 문제가 아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피의 능력을 적용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사도 요한은 말한다. 계 12: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린 양의 피로 승리한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보증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 피를 날마다 뿌려야 한다. 죄와 사망의 권세는 우리를 부정한 자로 만들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만들려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셨다. 예수님이 죽음의 대가를 치르시고, 자신의 삶을 다 태워 남기신 보혈 만이 마귀의 권세를 무력화시키는 유일한 도구인 것이다. 누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그 분 앞에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이 필요한가? 붉은 암송아지의 재가 아니다. 오직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하다. 그 피를 믿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 만이 우리를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상실이 일상이 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가까운 동네에서 테러가 발생하고, 팬데믹이 일상의 경험이 되었다. 이러한 위험과 함께 상실은 피할 수 없는 모든 인간의 운명이다. 누구나 어느 시점에선 부모를 잃고, 형제를 잃고, 친구들을 잃는다. 죽음이라는 절망 속에서 사단은 사망의 권세를 통해 그의 인간 지배를 확장하려 할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선포하며 그 피로 정결케 된 자로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그의 생명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하면 우리는 손 털고 티끌로 돌아가야만 한다. 한 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그리하여 산 자와 죽은 자가 갈리는 때가 오게 된다. 오직 믿음 안에 산 자 만이 죽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죽음이 절망이 되고 위협이 될 때,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보혈에 있다. 그 피를 믿음으로 뿌려 정결케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부정한 세대에서도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우리의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