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7월 30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4 기억의 치유
“모세와 아론의 인도로 대오를 갖추어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자손들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들이 행진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들이 행진한 대로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민 33:1-2)
드라마 우영우가 인기다.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 이스라엘에서 지금 유발이가 보는 드라마인데, 한국에 나오니 조카들이 재밌게 보고 있는 드라마였다. 주인공이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졌지만, 그 장애로 인해 형성된 독특한 감수성으로 일반인들보다 오히려 더 훌륭하게 변호사 역할을 감당하는 내용이다. 이런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대리 힐링을 경험하는 듯 하다. 우영우의 아버지는 딸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딸을 변호사로 키워낸다. 그러나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드라마일 뿐이다. 이 드라마가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변화시키는데 작은 기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장애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 입장에서는 이 드라마를 보며 오히려 현실과의 차이에서 오는 더 큰 괴리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인생 여정에서 어느 순간 우리는 당황하는 순간을 맞이할 때가 있다. 그것이 결혼일 수 있고, 자녀 출산일 수도 있다. 아니면 어린 시절 겪게 된 사고이거나 부모로부터 받은 정서적 학대일 수 있다. 그러한 경험은 우리 삶에 아픈 기억이 되고, 우리는 평생 아픈 기억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유대인들에게 홀로코스트는 너무도 아픈 기억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아픈 기억을 잊지 않고 기념하기 위해 곳곳에 기념관을 세웠다. 야드바쉠도 그 중 하나인데, 그곳에 있는 욥의 동상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망각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포로가 되게 하고, 기억은 우리를 자유인이 되게 한다.” 유대인들을 자유인이 되기 위해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광야 40년의 시간을 끝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평지에 이르렀다. 이제 정말 가나안 땅 바로 코 앞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여기서 모세에게 광야 40년의 노정을 기록하게 하신다. 왜 하나님은 왜 그에게 과거의 여정을 기록하게 하셨을까? 기록은 기억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기억하기 원하셨다. 이 기억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오늘은 그것을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쳤던 마흔 두 개의 여정들이 나온다. 애굽 라암셋을 떠나 여리고 맞은 편 모압평지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여정은 단순히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노예로 살던 애굽 땅에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목표였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 년의 여정은 실패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직선 거리로 가고 싶었을 것이다. 힘든 광야는 그저 최대한 빨리 통과하는 지점이 되길 바랬을 것이다. 우리 역시 선형적이고 목표 지향적인 관점에 익숙하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광야가 없고, 풍요로운 가나안만 펼쳐지길 기도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걸어서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왜 그들은 이처럼 광야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걸까? .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신 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는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만드는 장소였다. 거기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 훈련이 있었고, 철저히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순종 훈련이 있었다. 그것을 위해 40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광야의 목적이 또 있다. 호 2:14-17,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광야는 우리 안의 우상이 제거되는 시간이다. 우리의 자아가 죽고, 노예 근성이 처리되는 시간이다. 그리하여 광야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는 거룩한 신부로 세워지는 시간인 것이다.
모세는 그가 죽기 전 광야 1세대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여정을 기록해야 했다. 민 33:2,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들이 행진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들이 행진한 대로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여기서 노정은 히브리어로 ‘마싸(מסע)’다. 마싸는 나싸(נסע)에서 온 말인데, 나사는 ‘장막 말뚝을 뽑다’란 뜻이다. 그래서 마싸는 ‘장막 말뚝을 뽑는 곳, 즉 ‘출발지 또는 여정’이란 뜻이 있다. 민수기 33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었던 지명이 모두 마흔 두 개가 나온다. 이름 모를 광야에 머물면서 그들이 겪어야만 했던 삶의 노정(마싸)이 곧 그곳의 지명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노정에서는 기억하기도 싫은 아픈 역사가 있었다. 기브롯 핫다아와에서는 음식 때문에 욕심을 품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시내산에서는 금송아지 우상숭배로 인해 삼천 명이 죽임을 당한다. 호르마에서는 고라의 반역으로 만 사천 칠백 명의 백성이 염병으로 죽게 된다. 싯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여자들과 음행에 빠지면서 이만 사천 명이 염병으로 죽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집단적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광야에서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역사는 불신의 역사였고, 배역의 역사였다. 집단적 죽음을 경험한 고통의 역사였다. 모세는 그가 죽기 전 광야 1세대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노정을 기록해야 했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돌아보는 것이 왜 그들에게 필요했을까?
뇌과학자 한나 모니어는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라는 책에서 “기억은 과거를 보존하는 능력이 아니라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이다”라고 말한다. 즉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두고 있었던 미래는 무엇이었나? 그들의 미래는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이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사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지금 광야 2세대를 하나님이 준비하신 미래로 이끄시기 원하셨다. 그래서 그들의 과거의 노정을 돌아보고 정리하게 하신 것이다.
한나 모니어는 우리가 과거를 회상하는 과정을 통해 기억의 원래 버전이 아니라 변화된 버전을 저장하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기억할 내용들을 살펴보는 동안에 그 내용은 새로운 버전으로 다시 기록된다는 것이다. 모압평지에 살아남은 광야 2세대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부모 세대의 아픈 역사를 기억해야 했다. 이들은 부모 세대의 반역과 불신, 그로 인한 죽음을 광야에서 지켜보았다. 그들은 염병으로 죽어가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깊은 아픔과 상처를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택한 장자 민족으로 너무도 혹독한 대가를 치르며 광야 40년의 시간을 지나왔다. 그들이 지나온 노정마다 부끄럽고 아픈 기억들이 베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들을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말 원하셨던 것이 무엇인지를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광야에서 고통스럽고 아팠던 기억을 재평가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그들은 광야를 단순히 고통스럽고 아픈 시간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광야의 시간을 이해해야 했다. 과거가 정리돼야 미래가 소망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노정 속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하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들어가는 가나안은 그리 소망스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나 원망을 간직한 채 가나안을 맞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준비하신 미래인 가나안을 누리기 위해서 그들은 반드시 그들의 과거를 하나님의 버전으로 다시 기억해야 했던 것이다.
우리 가족이 녹번동에 살았을 때 형이 죽었다. 형의 자살은 우리 가족의 비밀이 되었다. 나는 나란 존재가 형이 그런 선택을 하는데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가슴에 ‘죄책감, 정죄감’이라는 돌덩이가 얹혀졌다. 그 때부터 형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겼다. 일을 해도 두 배로 했다. 형이 죽기 전 “형 닮은 사람 봤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괜히 했나 후회하며 말을 조심하게 됐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조심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에도 두려움이 생겼다. 시선공포증, 대인공포증이 생겼다. 나이 40이 넘도록 그 증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에 목회상담을 공부하러 갔다. 남들의 회복을 돕겠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내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공부로 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았다. 2011년 캔사스시티에서 한 기도집회에 갔다. 그 때도 나는 마음의 문제로 씨름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진 십자가가 너무 무겁다고 생각했다. 기도 시간에 사역자들이 기도를 돕기 위해 회중들 사이로 지나 다녔다. 그런데, 한 한국 여성 사역자가 내 옆을 지나가면서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레마로 내 마음에 꽂혔다. 나는 내가 평생 짊어진 십자가가 무겁다고 생각했는데, 주님이 내 문제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마음으로 느끼게 된 것이었다. 통곡이 터져나왔다. 나의 과거의 기억이 다시 해석되었다. 나의 아픈 기억은 나 혼자 짊어진 십자가가 아니라, 주님이 함께 감당하신 십자가였다. 형의 죽음은 내 책임이 아니었고, 나는 형의 몫까지 살 필요가 없었다. 열 세 살 때 형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를 그 때 주님의 시각으로 재해석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간 나를 짓누르던 오래된 돌덩이가 치워진 듯 내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뒤 하나님은 우리 가족의 노정을 텔아비브로 옮기셨다.
이스라엘에서 7년의 사역을 마치고 2017년 잠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의 가족사가 다시 해석되는 경험이 있었다. 한국에 도착한 첫 날 두 누님께 전화를 했다. 누님들은 ‘너 언제까지 이스라엘에 있을거냐… 이제 만나면 담판을 짓자’고 하셨다. 당시 86세에 혼자 계시는 아버지를 이제는 한국에 나와 가까이 모시며 사역하라는 압력이었다. 한국에 나온 첫 날부터 나는 가족 앞에서 작아지고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새벽에 눈이 떠 졌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새벽 기도하시던 동네 교회에 갔다. 지난 주 그 교회 새벽기도가 없어져서 슬펐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토요일에는 기도회가 없는 날이었다. 이번 주 중에 또 갔는데, 성도들이 여전히 뜨겁게 기도하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고 감사했다. 그 날 기도하며 질문했다. ‘주님, 저를 왜 이스라엘로 부르셨나요? 제가 꼭 이스라엘에 있어야 하나요?’ 기도 중에 나의 가족사가 떠올랐다. 열 세 살 때 형이 죽으면서 내가 장자가 되었다. 그것도 2대 독자가 되었다. 누님들은 찬밥이었고, 나는 하나 뿐인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었다. 그 땐 그것이 당연한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장자가 끊어지고, 그 자리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 나의 가족사는 바로 교회의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자 이스라엘이 넘어진 자리에서 이방인인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이래서 나를 부르셨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원래 장자였던 유대인들이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은 나에게 끊어진 형을 다시 되찾는 일처럼 느껴졌다. 나의 아팠던 과거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재해석되었다. 나의 아픈 가족사는 나의 부르심이자 선교 비전이었던 것이었다. 내가 그토록 빨리 벗어나기 원했던 인생의 광야는 실상 나를 부르시기 위한 하나님의 오랜 기다림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는 기억을 위한 시간이었다. 불신으로 사는 삶과 믿음으로 사는 삶의 차이를 그들은 광야에서 경험했다. 인생의 광야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라 간 사람에게만 가나안은 의미 있는 곳이 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어도 그곳에서 하나님을 놓치면 또 다시 광야가 시작되고 만다. 따라서 광야의 노정은 그냥 빨리 벗어나야 하는 한 지점이 아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빨리 도달하는 것이 우리 인생 여정의 최종 목적도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중심으로 광야를 이동했듯이, 우리 역시 광야의 노정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동하며 언약 백성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광야에서 하나님만 순종하는 백성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가나안 땅에서도 다른 신에게 절하지 않는 거룩한 백성을 만드는 것이었다. 신 8: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광야의 노정에서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는 자가 된다면 그 사람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된다. 그래서 광야의 노정을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미래를 잘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광야를 믿음의 눈으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아픔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풍요로운 가나안이 주어져도 그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중에 광야가 없는 인생은 없다. 우리 각자 인생의 광야에서 겪었던 고통과 아픔은 시퍼렇게 우리의 기억속에 살아있다. 그러나 우리는 광야의 시간을 단순히 고통으로 기억해선 안된다. 반드시 믿음의 눈으로 그 고통스런 기억을 재해석해야 한다. 우리의 인생이 어느 지점에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해도 그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고통과 상처를 뛰어넘을 수 있다. 예레미아 선지자는 포로로 끌려간 민족의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다음과 같이 애가를 불렀다. 애 3:19-23,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다. 진노 중에라도 마침내 복을 주려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이 겪은 고통스런 기억을 재구성한다. 그는 그의 고초와 재난과 쑥과 담즙을 기억하고 처음엔 낙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아픈 기억을 다시 꺼낸다. ‘내 마음에 담아 두었다’는 것은 그것을 회상했다는 말이다. 과거의 기억을 꺼내 보며 그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히 무궁하시다는 사실에 다시 소망을 갖는다. 주님의 성실하신 사랑에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여러분도 고초와 재난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신실하신 주님의 성품에 주목하길 바란다.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면, 과거 광야의 노정에서 겪게 된 우리의 아픈 기억들은 치유될 수 있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고통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미래를 향한 재료로 사용될 수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라기는 과거 여러분이 지나왔던 광야의 노정을 믿음으로 재평가 할 수 있길 바란다. 그 광야에서 있었던 아픈 기억들을 치유 받는 은혜가 있길 바란다. 여러분의 아픈 기억이 여러분의 부르심이자 미래 비전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소망스런 미래를 맞이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