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8월 6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5 근거 없는 사랑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신 1:32-33)
내일은 유대력으로 아브월 9일, ‘티샤 베아브(תשעה באב)’이다. 탈무드에 의하면 아브월 9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결정이 내려진 날이다. 신명기 1장은 항상 티샤 베아브에 읽게 되는데 여기에 바로 가나안 정탐 사건과 그로 인한 백성들의 원망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이 티샤 베아브는 성전이 파괴된 날이기도 하다. BC 586년 첫번째 성전이 이 날 파괴되었고, 공교롭게도 두번째 성전 역시 AD 70년 아브월 9일에 무너졌다. 유대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사건이 모두 이 날에 일어난 것이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 날을 기념하며 금식한다. 회당에서는 평소보다 촛불을 희미하게 밝히고, 모임이 끝나고서는 불을 완전히 꺼버린다. 유대 민족이 직면했던 캄캄했던 암흑을 기억하는 것이다. 티샤 베아브가 시작되기 직전의 샤밧은 ‘샤밧 하존(שבת חזון)’이라고 불리는데, 오늘이 바로 샤밧 하존이다. ‘계시의 샤밧’이란 뜻이다. 유대 민족이 당한 가장 어두운 역사의 비애를 기억하는 이 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계시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신 1:19,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호렙 산을 떠나 너희가 보았던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아모리 족속의 산지 길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른 때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데스 바네아에 이른 것은 출애굽 이후 2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을 떠나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왔다. 광야를 두려움으로 맞이하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그들은 가데스 바네아까지 별 큰 문제 없이 오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제 그들에게 ‘올라 가서 가나안을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계속 진격했다면 그들은 광야 생활을 2년 만에 끝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워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정탐꾼을 보내자고 모세에게 요청한다. 그런데 그들은 가나안을 정탐한 뒤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거기서 거인 아낙자손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원망으로 발전했다. 모세는 그런 그들의 태도를 이렇게 묘사한다. 신 1:26-27,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한 순간에 무너뜨렸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가장 영광스런 모험을 포기하고 과거 노예시절의 안전한 삶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두려움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그동안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게 하셨던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모세는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신 1:29-31, 33,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미래가 불확실 할 때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위험이 예상될 때 우리는 불안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그분과 함께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그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을 나와 불확실한 미래로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애굽 군대와 친히 싸우신 분이셨다. 광야에서 지친 자녀들을 안고서 가데스 바네아까지 이르게 하신 그들의 아버지셨다. 그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가득한 광야에서 먼저 그 길을 가시며, 그들을 위해 친히 장막 칠 곳을 찾으신 분이셨다. 모세는 이 사랑의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기에 너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휘둘려 그들의 현실을 원망과 절망으로 채웠다. 하나님은 그런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선언하셨다. 민 14:22-23,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선언이 티샤 베아브, 즉 아브월 9일에 있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티샤 베아브는 이스라엘 민족이 사랑의 하나님보다 두려움을 선택한 결과 맞이하게 된 슬픈 역사의 날이다. 그들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휘둘려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함께 지나오신 하나님의 임재를 붙들지 못했다. 그들이 연약하고 힘들 때 그들을 안고 가신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은 광야에서도 장막 칠 자리를 먼저 찾아주신 하나님이 그들의 미래에도 그러하실 것이라고 믿지 못했다.
샤밧 하존에 토라와 함께 읽는 선지서 말씀이 이사야서다. 사 1:21-23,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이 말씀은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의 도덕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거기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은에 비금속을 섞어 팔았고, 포도주에 물을 타서 팔았다. 그들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며 살았다. 정치인들은 뇌물을 좋아했고, 자신의 직분과 권력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데 사용했다. 이와 같은 부정과 부패는 사회 구성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사람들을 냉소적으로 만든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분열을 일으킨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며 산다면 평소에 성실히 살던 사람들도 왜 나만 공동의 선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도 공의와 정의의 길을 버리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국가는 망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예루살렘의 운명은 이들의 종교적 열심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삶에서 정의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회에 도덕성이 사라지고, 경제와 정치가 오직 자기 이익에 의해 좌우될 때, 신뢰가 무너지고 공동체로 함께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이러한 이사야의 선포 후, 약 120년 후에 멸망했다. 랍비 아브라함 이삭 쿡은 성전이 파괴된 것은 ‘근거 없는 증오’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정의가 사라지면, 그 사회에는 근거 없는 증오가 일어난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싫어하는 것이다. 그것이 멸망으로 가는 길인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의 모습도 처음 성전이 멸망할 때와 비슷했다. 마 23: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당시 종교 권력자들이었다. 이들은 종교적인 권력을 넘어 정치, 경제적인 기득권까지 독점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이 다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고 탄식하셨다.마 23:29-31,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면서, 자신들은 조상들 때처럼 선지자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라고 말씀 하신다. 그들은 선지자인 세례 요한을 죽였고, 이제 또 그들에게 쓴 소리를 하고 있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는 선지자들을 죽이는 것이다. 선지자의 선포가 사라지는 사회는 멸망으로 가는 사회다. 하나님의 정의가 선포되지 않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하나님의 뜻이 선포 되지 않는 사회는 권력을 가진 자의 뜻만 남게 된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이 사라진 사회는 죽은 사회이며 반드시 멸망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 같은 선지자를 죽인 남유다는 예수님 사후 40년이 지난 AD 70년에 멸망하고 만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의 공의를 버리고서라도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걸까? 그것은 인간의 깊은 자기 불안감과 두려움 때문이다. 편법으로라도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안전지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존재가 불안할 때 사람들은 안전지대를 찾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현실 속에서 자신을 지켜줄 대상을 찾는 것이다. 그것이 돈일 수 있고, 권력일 수 있다. 사람들은 불안한 현실을 살면서 하나님의 공의보다는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여겨지는 자기 이익에 집착하는 것이다.
2년이 넘은 코로나 상황은 우리 사회와 공동체를 많이 바꿔 놓았다. 염려되는 것은 이와 같이 불안한 현실 속에서 우리 사회에 근거 없는 증오가 커지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서 안전지대를 찾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추구하기 보다는 나부터 살고 보려고 모두가 다 자기 유익을 구하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하시는 분이다. 광야에서도 우리 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는 분이시다. 이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크고 두려운 광야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 우리는 우리의 유익보다도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공의를 먼저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한국 방문을 통해 많은 분들에게 근거 없는 사랑을 받았다. 너무 짧은 기간이라 충분히 교제도 못하고 샤밧 예배만 알렸는데, 여러 분들이 오셔서 함께 예배하며, 멀리서 왔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이번 방문은 연로하신 부모님과 가급적 시간을 많이 보내려는 목적이었는데, 그렇지 못했음에도 부모님들은 오히려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근거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근거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 모든 분들과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랍비 아브라함 이삭 쿡은 말한다. “If we were destroyed, and the world with us, due to baseless hatred, then we shall rebuild ourselves, and the world with us, with baseless love.” “만약 우리와 세상이 근거 없는 증오로 인해 파괴되었다면, 우리는 근거 없는 사랑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와 함께하는 세상을 재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가 주변의 모르는 사람들에게 조차 근거 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에게 근거 없는 사랑을 하라고 부름 받은 자들이다. 이 근거 없는 사랑이 근거 없는 증오를 덮을 때, 그 사회는 멸망으로 가지 않는 것이다. 아브월 9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랑보다 두려움을 선택했기에 역사의 아픔을 경험한 날이다. 우리는 이 날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여러분은 지금 환경이 주는 두려움 때문에 근거 없는 증오를 키우고 있지는 않은가? 여러분은 공의가 사라지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근거 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가? 믿음의 사람은 크고 두려운 광야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라가는 사람이다. 바라기는 두려움 때문에 타협하거나, 멈춰서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이 세상에 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